『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
“이 책은 다만 『삼국사기』를 이야기하는 책일 뿐”
좌우노소를 막론하고 말빨을 세우는 데 ‘역사’처럼 가져다 쓰기 좋은 재료는 없다. 이 말에는 어떤 부정적인 느낌도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그런 점에서 ‘역사’가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객관적인 사실들의 집합으로, 정말 순수하게 그렇게 다뤄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생명을 다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도 ‘역사’를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결국 역사를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 혹은 사건들의 집합체로서, 혹은 병렬체로서의 연대기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 아래에서 직조된 역사 기술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역사가들은 저마다 무엇을 기억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함으로써 다른 역사 만들기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에 대해, 어떤 식으로 과거를 선별하여 계열화했는가를 살피는 과정, 이것이 진청 ‘탐사’의 실질이라 할 수 있다.
길진숙, 『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 20쪽
역사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조각상이면서 형태를 확정할 수 없는 유체 같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보느냐에 따라, 어떤 틀어 부어 넣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형태와 색을 보여준다. 그러면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문제는 ‘진실’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어째서인지 ‘진실’은 하나만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진실’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입장은 두 개일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만큼 그런 사례를 자주 보기 때문일테지만, 그만큼 그런 사례를 자주 보게 되는 이유는 그만큼 흔한 사고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어딘가에 온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 혹은 역사의 생산은 어떤 점에서 유용한가. 말하자면, 그걸 왜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역사가 어떤 한가지 진실을 가진 게 아니라면, 현재에 의해 의미가 계속 변형되는 것이라면, ‘알아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면 말이다.
동아시아 역사책을 찾는 이유도 분명하다. 나는 누구인가? 동아시아인인 나는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되었고, 이렇게 사고하게 되었는가? 나와 나의 사고, 나의 시대, 환경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가 궁금해서 과거를 뒤적인다.
같은 책, 21쪽
시작은 대체로 이러하다. ‘나의 기원’에 대한 의문, 지금 겪는 어떤 문제의 ‘기원’을 찾기 위한 작업이다. 출발이 이렇기 때문에 그것은 고정불변의 것일 수가 없다. 당면한 현재가 어떤 문제를 던져주는가, 오늘의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역사’를 어떻게 생산해 내느냐에 따라 오늘의 세계가 달라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거기에 기대고 있는 미래까지 매 순간 변형되는 셈이다.
『삼국사기』도 김부식과 그의 시대가 어떤 필요를 제기했기에 생산된 텍스트일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김부식의 시대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 시대로 소환해 내어서, 특정한 ‘의미’로 구성할 것인지가 문제다. 『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는 바로 그점을 문제 삼는 책이다. ‘고증’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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