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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신들의 사회』 - 무엄하고도 불경스러운!

by 북드라망 2017. 11. 15.

로저 젤라즈니, 『신들의 사회』 - 무엄하고도 불경스러운!



내가 생전 처음 인도에 도착했던 밤, 델리 국제공항은 정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그게 잦은 일이라고 해서 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공항 경비원들이 구불구불한 길목에 드문드문 늘어서서 손전등으로 길을 비춰 출구를 안내해 주었다. 여정을 시작한 인천공항, 경유해온 홍콩공항과 비교하면 안 그래도 터무니없이 초라했을 시설이,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 더욱 괴괴해보였다.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은 어둠속에 얼굴만 동동 떠있었다. 그 ‘다른’ 이목구비에 새겨진 선명한 음영과 부리부리한 눈 때문에, 그들은 얼핏 무시무시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전등 불빛을 따라 걸으며 나는 지금 제의를 위한 가면을 쓴 제관들이 이끄는 대로, 신에게 바칠 산 제물로서 제단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가슴이 뛰었다. 이국의 낯선 공항이란 언제나 비현실적인 무대다.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조리 비일상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인들 불가능하겠는가. 나는 정말 제물일지도 몰랐다. 저들은 변장한 제관들일 수 있었다. 저 모퉁이를 돌면 해골을 쓴 여신상이 창칼을 거머쥔 여러 개의 손을 내밀어 사납게 나를 맞이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뭐니뭐니 해도 이곳은 신들의 나라인 것을. 야마, 칼리, 크리슈나, 그리고 불타의 나라. 다시금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기쁘게 제물이 될 마음이야 없어도, 나는 그들을 오래도록 사랑해왔다.  




특정한 나라를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자기 삶을 통과해 지나간 자잘한 요인들, 이를테면 어릴 때 벗겨먹은 초콜릿 포장지, 삼촌이 보내온 그림엽서, TV에서 본 다큐멘터리, 백과사전에서 읽은 특이한 풍속 같은 것들이 그 나라를 방문해서 직접 보고 겪고 느끼고 싶은 마음을 서서히 형성해간다. 내 경우, 인도를 향한 열망에 불을 붙인 여러 요인 가운데 틀림없이, 그 신성한 이름들이 있었다. 아니, 그 이름을 훔쳐 쓴 배덕자들이 있었다. 고대의 성스러운 신화를 삿되게 사용한 자들, 과학 기술력을 무기로 신의 지위를 찬탈한 자들, 신의 이름으로 대중과 역사를 기망한 자들. 나를 인도로 이끈 수많은 요인들 중에는 틀림없이, 신을 자처한 그 무엄한 인간들- 소설 『신들의 사회』의 주인공들이 있었다. 

 

로저 젤라즈니의 1967년작인 그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애초에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학교 도서관 SF 섹션에서 제목만 보고 빌려온 책이었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심드렁하게 뒤적이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올라가는 기분이 이러할까. 빙빙 돌다가 지면으로 패대기쳐지는 기분이 이러할까. 혹은, 어슬렁대던 놈팽이가 분에 넘치는 노다지로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 어째서인지 표지를 새로 복사해 제본해놓은 그 책은 그때까지 읽어온 어떤 SF와도 달랐던 것이다. 그토록 현란한 문체, 그토록 오락가락 복잡한 서사 구조, 그토록 인문학적인 배경지식, 그 와중에 무협지를 읽는 듯 빼어난 오락성, 그리고 ‘종교’를 향한 그토록 무엄하고도 불경스러운 관점이라니! 


그때 나는 아직 어리버리한 열 여덟 살 대학 신입생이었다. 이런저런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짤막짤막 언급되는 정도가 전부였다. 경험도 일천했다. 기독교에 관련해서는 과자 준다는 친구 말에 홀려 주일학교에 갔다가 ‘너희 부모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면 죽어서 모두 지옥 갈 것’이라는 설교를 들으며 겁에 질려 울고불고 하던 기억이 있었고, 불교에 관련해서는, 국립공원의 사찰들을 지날 때 퉁방울같은 눈알을 부라리는 사천왕이 무서워 빙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었다. 자청하여 영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솔직히 고백컨대 그것은 멋진 외국어 이름이 갖고 싶었던 중2병적 허영의 소산이었다. 『신들의 사회』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때 나는 ‘안토니오’라는 이름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 신도는 여자 이름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고, 수녀님이 권해주신 안토니오의 여성형 ‘안토니아’는 내 쪽에서 퇴짜를 놓았다. 어떤 상징성이나 신앙적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음운학적인 이유로 ‘안토니오’가 좋았던 것이기 때문에, ‘안토니아‘가 되어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일이었다. 부루퉁해 있다가 결국 고른 세례명은, 좋아하는 SF 만화 『1999년생』의 주인공 ‘크리스탈’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노래 잘 하는 가수 아길레라의 퍼스트네임도 그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경건하게 영세를 받고 나서는 쭉 나이롱이었다. 애초에 띄엄띄엄하게나마 성당을 다녔던 건 그 고풍스러운 건축양식과 품위 있는 의례가 좋아서였지 딱히 들끓는 신앙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확실히, 종교가 그 자체로 나의 흥미를 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게 민감한 테마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중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가까이서 나는 거기서 위안을 얻거나 의지처로 삼는 지인들을 보았고, 멀리서는 그것을 이유로 살인을 하거나 심지어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많은 역사책이 증언하고 매일의 저녁 뉴스가 중계해 알려주는 종교의 영향력은 내 이해나 공감 너머 엄존하는 무거운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종교란, 잘 모르겠지만 별로 자세히 상관하지 않는 게 나은 그 무엇, 섣불리 침해했다가는 어떻게든 사달이 날, 일종의 시한폭탄이나 핵 유출의 현장같은, 불가침의 성역이었다. 


그런데 『신들의 사회』는 종교에 대해 내가 설정하고 있던 암묵적인 터부를 참신한 방식으로 깨버렸다. 물론 신화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 건 대수로울 것 없는 일이다. 그러한 콘텐츠는 언제나 있어왔다. 신이 등장하여 인간과 겨루며 화려하게 기량을 뽐내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넘쳐난다. 그때 기존의 신화는 대개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으로 깔린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달랐다. 여기서도 재래의 신화를 따다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옹립하지만, 그 차용 행위가 작품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작품 내부에서 일어난다. 작중인물들은 신이니 종교니 믿음이니 하는 신성 체계를 아주 간단히 ‘도구’로 소비해버린다. 『신들의 사회』가 발칙했던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신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과학기술로 무장한 인간이다. 신화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필요에 의해 전략적으로 도입된 지배시스템일 뿐이다. 소설은 딱히 인도신화나 불교의 교리, 기독교 신앙의 진위를 불경하게 폄훼하려 들지 않는데, 순전히 그냥,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어느 종교가 유익한지, 어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지, 따위의 신학적 화두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사실상 이야기는 그런 논의를 초월하여 전개된다. 


사랑의 반댓말은 무관심이라고 했다. 종교적 열광의 반댓말은 모독이 아니라, 깃털을 툭 쳐내는 것과 같은 ‘간과’가 아닐까. 이 무협 판타지처럼 속도감있게 잘 읽히는 SF 소설은 그러한 ‘간과’를 마치 청바지 걸쳐입듯 아무렇지도 않게 툭 수행해버림으로써, 조금도 무례하거나 공격적이지 않으면서 불경스러울 수 있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종교라는 주제에 대한 내 안의 심리적인 저항감, 조심스럽고 내밀한 터부의식을 효과적으로 축소시켰다. 저지선을 둘러치고 있던 상상의 지평을 넓혀준 셈이다. 파괴와 죽음, 불과 어둠, 각성과 열반 같은 심상을 띠고 있는 온갖 이국의 신들의 이름을 생생한 표정을 담아 내 마음에 각인시킨 것은 즐거운 덤이었다.  



손전등 빛을 따라 나가자 마침내, 공항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나왔다. 후텁지근한 공기 중에는 낯선 맛살라 향이 자욱했지만, 캄캄한 길 끝에는 제단도, 칼리 여신도 있지 않았다. 대신 낡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고, 커다란 흰소들이 유유자적 길을 가로지르는 인도의 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내 백일몽같은 상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안도했지만, 물정 모르는 관광객답게 택시비를 옴팡지게 바가지 썼다. 어쩌면 택시기사가 제관이었을지도 모른다. 택시가 제단이었을 수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인도의 신들은 나 대신, 내 지갑을 제물로 받아간 것이다.





『신들의 사회』가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닙니다. 젤라즈니의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남자 주인공은 지나치게 똥폼을 잡고, 씨니컬한 태도로 현학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자타공인 혼자 너무 멋있는 데다가, 여자들은 터무니없이 납작하게 그려져서 아무 매력이 없죠. 어릴 땐 남자 주인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는데, 여러 해를 두고 다시 읽을 때마다 좀 부담스러워지더니, 이제는 『CSI 마이애미』의 호반장님 보는 기분이 드네요. 노파심에 덧붙이지만 멋있는 건 확실합니다. ‘너무’ 멋있어서 문제인 거겠죠. 


불교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일상적으로 자주 보는 단어들이 아니다보니 멈칫거리며 읽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어요. 알고 읽으면 물론 더 재밌겠지만, 대충 넘겨도 큰 지장은 없습니다.  


사실 가장 큰 진입장벽은 작품의 얼개일 듯 합니다. 일반적인 기승전결의 흐름이 아니다보니, 처음 읽을 때는 좀 정신이 없어요. 뭐가 어떻게 된 얘긴지 종잡을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참고 읽을 가치가 있답니다! 끝까지 다 읽고 맨 첫 챕터를 한 번 더 되짚어 읽을 땐, 초반부 그 모든 모호하고 몽롱하고 신비로웠던 대목들이 신통스레 맑게 닦여 밑바닥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이번에 다시 읽는 내내 가장 거슬렸던 건 남녀 사이의 대화였어요. 동등한 계급으로 고르게 역할을 분배받은 신들 사이에서도, 여신은 남신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씁니다. 말투야 번역상의 문제일 수 있지만, 장면 하나하나, 남녀 사이에 언제나 노골적으로 위계가 느껴지도록 설정된 작품에서, 번역만 탓하기도 부당한 노릇입니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는 환생할 때마다 새로 들어갈 육체의 나이와 성별을 다르게 선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생물학적인 성별이 인간 사이의 위계를 설정할 근거가 될 수 없는 세상인 거죠. 그런데도 왜, 제 1세대에 속하는 칼리 여신은 까마득히 늦게 태어난 제 3세대 출신 야마에게 예사높임말을 들으면서 공손한 아주높임체로 응대하는 것인지, 이 재밌는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젤라즈니의 낡은 젠더의식만큼은 옥의 티가 확실합니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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