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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베짱이의역습

바보야, 문제는 취향이 아니라니까

by 북드라망 2017. 10. 17.

바보야, 문제는 취향이 아니라니까



나의 ‘개인적인’ 음악취향 변천사


처음으로 ‘취향’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다. 2006년,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당시의 나는 50~100곡 정도가 들어가는 512mb용량의 mp3에 ‘버즈’의 노래를 가득 채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힙합’이 대세 아니었겠는가. 내가 듣고 있던 온건한 락발라드 따위는 설 자리가 없었다. ‘드렁큰 타이거’, ‘다이나믹 듀오’, ‘배치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고, ‘무브먼트’, ‘소울컴퍼니’, ‘지기펠라즈’ 같은 크루들에 대해 알고 있다면 훌륭한 대화상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형누나들의 취향을 모방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듣는 음악이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 나는 좀 더 거만해져 있었다. 당시에 누군가 내게 mp3를 빌려달라고 했다면, 허세 가득한 말투로 ‘아는 노래 없을 텐데’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함께 얘기 나눌 상대가 없어지자 힙합에 대한 나의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다. 그래도 남들 다 듣는 걸 들을 수는 없다는 저항감 탓인지, 나는 당시 밴드부 보컬이던 친구와 함께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의 브릿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오아시스’, ‘블러’, ‘라디오헤드’, ‘트래비스’, ‘뮤즈’… 언제 힙합을 들었냐는 듯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영국밴드들의 음악에 심취했다.


지금은 좀 더 팝쪽으로 기울었다. 고딩때는 너무 메인스트림 같다는 이유로 듣지 않았던(!) ‘콜드플레이’의 팬이 되었고, 지나치게 트랜디하다고 생각했던(!) ‘빈지노(그리고 물론 재지팩트)’의 모든 곡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로 나열하자면, ‘악틱몽키즈’, ‘뱀파이어 위켄드’, ‘스노우 패트롤’, ‘레드핫칠리페퍼스’, ‘에드 시런’, ‘로드’, ‘언니네이발관’, ‘이랑’, ‘바이바이 배드맨’, ‘검정치마’ 등을 즐겨듣는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하면서부터는 음악을 듣는 경향이 훨씬 더 잡다해지고 파편화됐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은 이처럼 늘 모방을 통해서만 형성되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취존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다. 요즘은 온갖 분야에서 ‘취향’이 이야기된다. 음악취향, 영화취향, 음식취향은 물론이고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할 때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취향이다. 성정체성 또한 일종의 취향 문제로 간주된다(‘성적취향’). 민족이나 이념, 계급 따위의 ‘거대한’ 것들이 퇴장한 자리를 이제 취향이 차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장 ‘사적’인 범주인 취향의 영역으로 환원되어버린 것이다.


‘취존’.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를 줄인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뭘, 어떻게? 우선 이는 ‘내가 뭘 좋아하든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다. 이념에는 얼마든 태클을 걸 수 있지만, 취향은 불가침의 영역이다. 호모포비아 문제를 둘러싼 SNS상의 논쟁을 보라. 양 진영은 똑같은 논리로 서로를 공격한다. 한쪽에서 ‘나의 개인적인 성적취향을 존중하라!’라고 말하면, 반대쪽에서는 ‘나는 너와 성적취향이 다르므로, 나의 취향에 따라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라고 응수한다. 양쪽 모두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취향의 환원불가능성이다. 이처럼 ‘취존’은 굉장히 유용한 윤리적 지침으로 작동한다. 모든 건 각자의 취향일 뿐이니, 판단하려 들지 말고, 바꾸려 들지 말고, 공연히 싸우려 들지 말지어다. 아니, 사실은 취향을 말하는 순간 갈등 자체가 성립될 기반을 잃는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존중해 달라’는 이러한 외침 속에는 인정에 대한 갈구가 섞여있다. 그렇지 않다면 뭐하러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자신의 취향과 감성을 공들여 ‘전시’하겠는가. 그렇다면 ‘취존’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나의 취향을 인정해달라, 다만 평가하진 말고.’


‘취존’이라는 윤리에는 취향이 가장 내밀한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작동하고 있다.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국적도, 계급도, 내가 속해 있는 집단도 아니다. ‘진정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즉각적인 호오의 감각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다. 때문에 나와 나의 또래는 결코 특정한 집단에 스스로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교양’과 ‘취향’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교양이란 스스로가 지식인 계층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는 표식 같은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해 취향은 무리로부터 자신을 구별해내는 수단이다. 따라서 취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훌륭한 취향’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취향’을 개발하는 일이다.


나도 여태껏 취향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고수해왔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그저 상이한 취향들이 있을 뿐.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올바름을 강요하는 대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한다. 어떤가? 취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우리는, 어떤 집단이나 이념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부모세대에 비하면 훨씬 덜 기만적이고, 훨씬 더 겸손하지 않은가?



취향은 나의 힘


“벗들이여, 취향과 미각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아니라고 하려는가? 일체의 생명이 취향과 미각을 둘러싼 투쟁이거늘!/ 취향. 그것은 저울추인 동시에 저울판이요 저울질하는 자다. 저울추와 저울판, 그리고 저울질하는 자와의 실랑이 없이 삶을 영유하고자 하는 일체의 생명체에게 화 있을지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p.199)


니체에 따르면, 취향을 둘러싼 투쟁은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은 끊임없이 ‘의욕’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의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명은 무작위적으로 모든 것을 의욕하지는 않는다. 욕망에는 늘 ‘해석’과 ‘평가’가 함축되어 있다. 살아간다는 것, 다시 말해 의욕한다는 것은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과정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 해석과 평가가 의존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선험적 가치도, 주체의 자유의지도 아니다. 그것은 쾌와 불쾌의 ‘감각’이며,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힘의 느낌’이다. 이러한 감각과 느낌들 사이의 부단한 투쟁과 재배치.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취향’이며 또한 ‘생명’이다.




니체 또한, 모든 것은 취향의 문제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이때의 취향은 주체인 ‘나’의 취향이 아니다. 그 느낌을 촉발하는 대상들과, 느낌의 방향성들로 진동하는 신체, 평가하고 해석하는 생명(힘의지), 그것이 ‘나’를, ‘나의 취향’을 구성한다. 즉 저울추와 저울판, 저울질하는 자 사이의 계속되는 실랑이, 다시 말해 ‘취향과 미각을 둘러싼 투쟁’이 모든 것이다. 여기에는 실체화할 수 있는 ‘나’도 ‘나의 취향’도 없다. ‘나’는 취향을 둘러싼 끊임없는 투쟁과 계속되는 재조정의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취향’ 역시 투쟁을 통해 성립되어왔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게 느껴지는 폭력적인 경험과 함께 취향이 일변했다. 물론 그 이전에 나의 취향을 구성하고 있던 것들 또한 내게 고유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또한 이전 감각들과의 투쟁 속에서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둔 감각일 뿐이다. 취향의 획득은 그 자체로 다른 느낌, 다른 감각을 밀어내고 또 다른 느낌을 전유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10년 전, 20년 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려 보라. 그것들에 대한 낯선 감각은 우리의 취향이 한시도 멈춰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취향이란 기존의 취향, 즉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감각과의 부단한 투쟁이다. 그러므로 ‘나의 취향’이란 허상이다. 그저 투쟁 속에서 승리한 힘에 사후적으로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뿐이다.


평가하지 말고 존중하라. 취존. 그러나 사실 취향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평가하는 행위이며, 우리의 취향은 계속되는 재평가의 과정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취존’이란 실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더 이상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평가가 다른 평가를 대체하는 과정, 취향을 둘러싼 이 부단한 투쟁의 과정에는 매번 외부의 것들이 개입한다. 그러나 ‘취존’을 말하는 우리에게는 낯선 감각들 사이의 충돌이 야기하는 혼란과 불쾌감이 버겁다. 그래서 짐짓 점잖게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고 말하며 안전한 정체성과 타자의 인정 속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다.



난 널 존중해, 싸우자!


유희열은 한 TV쇼에서 “대중음악은 동네 형한테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음악취향이라는 것은 나보다 더 잘 아는 누군가(흔히 동네 형)의 취향을 모방하고 그로부터 배워가며 형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취향은 침해당해서는 안 될 소중한 정체성으로 승격되었다. ‘모방’이나 ‘배움’은 ‘취존’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지 이미 알고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이쯤에서 ‘동네 형’은 퇴장한다. 지금은 그 역할을 ‘취향분석 알고리즘’이 대신하고 있다. ‘멜론’이나 ‘왓챠’ 같은 사이트들이 제공하는 취향분석 프로그램은 결코 ‘배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취향’들을 알려주는 대신 우리 자신의 취향을 재확인시켜주고, 우리의 취향에 가장 ‘적합한’ 음악과 영화를 추천해준다. 알고리즘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의 내밀한 취향을 ‘존중’해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영화나 음악‘에는 흥미가 잘 생기지 않는다. 알고리즘의 친절한 추천을 받아놓고도 청개구리처럼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영화를 보게 된다. 아직 알고리즘의 분석이 충분히 정밀해지지 못한 탓일까?




사실 누군가의 취향을 모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은, 그 사람이 나와 일치하는 취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린 늘 다른 취향, 다른 감각에 매혹된다. 취향분석 프로그램의 완벽한 ‘존중’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애초에 존중되어야 할 고정된 취향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취향은 낯선 감각의 침입을 통해서만 형성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취향,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말해주는 모든 것이니까. 그런데 취향으로 드러나는 ‘나’란 내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취향을 존중하고자 하는 우리, ‘판단하지마!’, ‘인정해줘!’라고 말할 게 아니라,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가르쳐줘!’, ‘개입하고 싶어!’, ‘싸우자!’


글_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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