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르귄, 『빼앗긴 자들』
- 사회체제와 일하는 사람에 관한 고도의 사고실험
『빼앗긴 자들』의 주인공 쉐벡은 천재 물리학자다. 여기서 ‘천재’라는 수식어를 쓰기 전에,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내 보기에 그 단어는 호들갑스럽다. 노력을 축소시키고 재능을 과장하려는 불온한 욕망이 엿보인다. 듣는 쪽을 간단히 압도하려는 교활한 기망의 기색도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한, 대하기 힘든 괴짜의 이미지. 쉐벡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노력하는 사람이고, 성실히 일상을 꾸려나가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자기중심적’이라니. 그의 고향 별에서 그것은 가장 신랄한 비난이었다. 안 된다, 나는 이 진지하고 고독하고 품위있는 남자에게 그런 오명 비슷한 한 방울도 묻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아나레스에서 나고 자랐다. 비옥한 쌍둥이행성인 우라스와는 달리, 아나레스는 황량하고 척박한 곳이다. 본디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의 땅, 광산기지에 광부들만이 2~3년씩 머물다 갈 뿐인, 식민지의 가치조차 없는 곳이었다. 자본주의와 계급제도, 온갖 차별이 만연한 우라스의 사회체제에 반기를 든 일단의 아나키스트들이 이민선에 몸을 싣고 건너오기 전까지는. 우라스의 세계의회는 재래의 질서를 뒤흔드는 문제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달을 내어줌으로써 저희 세계 밖으로 영영 내보내버리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오도’라는 사회주의 혁명가의 철학과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 ‘오도니안’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 달로 건너왔다. 이후 200년 동안 아나레스에는 평등과 나눔, 존중과 공유로써 작동되고 유지되는 사회주의 세상이 무르익었다. 소유와 착취가 작동하지 못하는 나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영리하게도 정착 초기부터 오도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썼다.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사피어 워프의 언어 상대성 가설을 뒤집어 적용한 형국이랄까. 이를테면 아나레스의 인공어 ‘프라 어’에는 계층을 가리키는 단어나 존칭이 존재하지 않고, 어법상 소유격이 회피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건 내 것이고 저건 네 것’이라는 말을 프라 어로 하면 ‘난 이걸 쓰고 넌 저걸 쓴다’라는 식이다. 자기중심적인 것, 우라스 사람처럼 소유하려 하고 착취하려 드는 것- 프라 어에서는 이런 말들이 가장 욕설에 가까웠다.
쉐벡이 평생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말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이를테면 어린 아기일 때 그는 햇볕 드는 자리를 독차지하려고 떼를 쓰다가 보모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그건 네 게 아니다. 네 것은 없어. 그건 사용하기 위한 것이지. 함께 나누기 위한 거란다. 공유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어.”
좀 더 자랐을 때, <말하기와 듣기> 수업에 참석한 그가 시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쏟아내자, 그룹 지휘자는 중단시키며 훈계했다.
“말하기는 나누는 거다. 상호협동의 기술이지. 넌 나누고 있지 않아. 자기 중심적으로 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다만 달랐을 뿐이었다. 자기 생각에 침잠하는 내향적인 기질을 타고 났던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건 그 사회가 선호하는 인간 유형의 범주는 언제나 협소한 법이다. 그리고 그 범주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내밀한 자괴감과 씨름하게 되기 마련이다.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편안해지는 사람들. 스스럼없는 사교성을 열심히 흉내내며 하루를 보낸 뒤 자기혐오에 사로잡혀 이불킥 하는 사람들. 수십 년을 살아도 매순간 세상에서의 처신이 아득히 낯선 사람들. 하지만 이곳 지구에서는 최소한, 이런 사람들이 반사회적이라는 혐의에까지 시달리지는 않는다.
아나레스에서는 다르다. 그곳은 사람 사이의 관계와 공동체의 압력이 법적 강제를 대신하는 극단적인 집단주의 사회다. 고독이나 프라이버시는 사치와 과다함으로 치부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외톨이 성향은 그냥 ‘다름’이 아니라 도덕적인 결함으로까지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러하니 쉐벡이 겪어야했던 도덕적인 갈등- 본성과 사회의식 사이의 줄다리기는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밀한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내 자신의 기질과 사회의 요구를 일 안에서 화해시켰을 때였다. 혼자 있을 때 일이 더 잘 되었던 것이다. 물리학 연구는 가치가 있는 일이었고, 그는 그 일을 잘 했으며, 그것은 그의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행했으므로, 혼자 있을 때 일이 더 잘 된다면 혼자 일할 이유가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프라이버시라는 특권은 그의 성실한 책임이수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했고, 그는 자기중심적이라는 자책도 함께 떨쳐낼 수가 있었다.
『빼앗긴 자들』은 하나의 종족이 이룬 두 개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를 놓고 전개한 고도의 사회인류학적 사고실험처럼 보인다. 소설 속에서 내내 대비되는 두 세계의 구도는 일견 냉전시대의 은유와도 같다. 우라스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본주의 천국 미국을 꼭 빼닮았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우아하게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는 상류층, 고된 노동과 차별과 비하 속에 힘들게 생을 견뎌야하는 하층계급 사람들. 우라스 사회를 떠받치는 건 기본적으로 소유와 착취, 불평등과 우열개념의 비틀린 순환이다.
반면 아나레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 사회를 구 쏘련에 대입시키기는 힘들다. 현존했던 어떤 공산주의 국가도 가 이르지 못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아나레스는 오히려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정교한 상상 모델에 가깝다. 사회주의 철학에 입각한 인공의 언어까지 따로 만들 정도로 세심하게 계획되어 자본주의의 무균지대에서 긴 세월 성숙한 무정부 사회주의 사회가 과연 천국에 가깝냐고 하면,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인간사회의 병폐는 여기에서도 생겨난다. 집단주의와 관료주의가 과도하게 발달한 아나레스에서는, 우라스 사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인간성 억압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다름에 대한 억압, 자유에 대한 구속이.
그 사이에 쉐벡이 있다. 적대와 몰이해의 벽을 넘어 자발적으로 두 체제의 사이를 오간 한 사람이. 아나레스적이기엔 너무 개인적이고, 우라스적이기엔 너무 양심적인 우리의 경계인이. 그리고 『빼앗긴 자들』은 그로 인하여 사회체제에 대한 거대한 사고실험(물론 이 역시도 훌륭한 과업이었지만!) 아래의 더 깊은 층위에서, 그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 섬세한 역동을 들여다보게 된다. 물리학 연구라는 자신만의 일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고 세상과 소통해나가는 쉐벡을 투과하면서, 이 이야기는 사람의 본성과 일의 의미, 그리고 소명에 관한 꾸준한 고찰의 기록으로 변주된다. 일에 대한 책임감이 어떻게 삶의 내용을 구성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쉐벡은 이 4년간 자신의 의지에 대해 배웠다. 혼란 속에서 오히려 그 강력함을 배웠다. 어떤 사회적, 윤리적 의무도 그것과 동등하지 않았다. 굶주림조차도 그것을 누를 수 없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존재의 의무는 더 절대적이 되었다.
그는 오도니안 용어로 이 의무를 그의 <세포적 기능>이라 인지했다. 개인의 개인성,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그러므로 그의 사회에 대한 최선의 기여를 표현하는 유추적 용어였다. 건강한 사회라면 적응성과 강함을 찾는 모든 기능간의 공동작업 속에서 그가 자유로이 최대 기능을 시험하도록 놓아둘 것이다.
458 쪽
지난날 몇 개의 직업을 거치는 와중에, 내 일의 사회적 효용을 잘 헤아릴 수 없었던 경우들에 특히 무기력감에 시달렸던 것을 기억한다. 나이나 관행의 쫓김 없이 여러 일들을 거치며, 적성을 찾아 그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아나레스 사회의 노동관은 확실히 이상적이다. 심지어 그들의 언어에서는 ‘일’과 ‘놀이’가 한 단어이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는 확실히 아나레스보다는 우라스에 가깝지만, 개인이 자기 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사회, 모든 개인이 ‘여러 공동작업 속에서 자유로이 최대 기능을 시험’해볼 수 있도록 방임해주는 사회로 몇 발짝 더 다가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가 갈수록 조금씩 탄력을 더해가는 기본소득 논의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아직 멀고 험하겠지만, 논의가 태동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 될 수 있겠지.
『빼앗긴 자들』을 처음 읽은 건 십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습니다. 사실 첫 독서는 망했었어요. 진행을 따라가기 어려워 혼란스러운 가운데, 광막하고 황량한 이미지만이 가슴을 가득 채웠죠. 어떤 책이라도 내용을 헷갈려하면서 제대로 읽기는 힘든 법입니다. 책을 덮기가 무섭게 저는 제가 뭘 읽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그러나 한 대목만은 뇌리에 강렬히 새겨져, 그 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빛 바라지 않았습니다. 주인공 쉐벡이 우라스 사람들과 힘들고 궂은 일에 관해 말하는 장면이었죠. 그 장면은 심상하고 평이하게 지나갔지만 저한테는 크나큰 충격이었어요. 거기서 제기된 것은 제가 이전에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의문, 상상해본 적 없는 해법, 전제해본 적 없는 윤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러운 일은 어떻게 시키지요?”
…
“글쎄요. 우린 모두 다 그런 일을 해요. 하지만 아무도 그리 오래할 필요는 없지요. 좋아하지 않는 한에는. 데카드마다 하루씩, 공동체 관리자 회의나 블록 회의나 누구든 필요로 하는 쪽에 그런 일에 합류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순번제 리스트를 만듭니다. 달갑잖은 근무나, 수은광산 일과 제재소 일 같은 위험한 일은 보통 반년 정도만 하면 되고.”
“하지만 그러면 모든 인원이 그 일을 갓 배운 사람들로 구성될 텐데요.”
“그렇지요.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달리 어떻게 하겠소? 누구에게도 몇 년 안에 병신이 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할 순 없어요. 그런 일을 왜 하겠소?”
(중략)
“여기에서는 더러운 일을 누가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가 말했다.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상한 일이오. 누가 그런 일을 하지요? 왜 그들이 하고요? 돈을 더 받나요?”
“위험한 일에 대해서는, 가끔은요. 하지만 대부분 천한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덜 받지요.”
“그럼 그 일을 왜 하는 거요?”
“낮은 봉급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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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저는 ‘좋은 직업을 가지면 돈을 더 잘 번다’는 명제의 정당성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긴 세월 죽도록 노력하고 공부해서 변호사나 의사가 된 사람들이 안정적인 지위와 수입을 누린다는데 거기에 딱히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러나 처우나 환경이 나쁜 일들, 이른바 ‘어린이 장래희망’에 포함되지 못하는 직업군에 대해서는 별달리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였죠. 사실 아무도 장래희망으로 꿈꾸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누군가 하고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궂은 일, 힘든 일, 위험한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던가요. 그 일들은 교실이나 가정에서 보통 ‘공부를 안 하면 사후적으로 치러야할 형벌’로써나 부정적으로 예증됩니다. 누군가가 하고 있고, 반드시 해주어야만 사회가 지탱되는, 그 누군가의 생업을 인과응보의 사례로 태연히 모욕해버릴 수 있는 곳이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 『빼앗긴 자들』이 싹틔워준 이 의문은 이후 제 세계관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았고, 그래서 이 책은 줄거리를 기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쭉 제 인생도서의 반열에 올라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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