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길없는 대지』에서 간추린 루쉰 약사
- ‘루쉰’을 만나기 위한 마음의 준비
“벗이 있다 해도 공부를 함께하기란 어렵고, 공부를 함께해도 같은 주제·같은 인물을 탐구하기란 더 어렵고, 같은 주제·같은 인물을 탐구한다고 해도 같은 시절에 여행을 함께하기란 실로 어렵고, 어렵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우리는 해냈지 뭔가! 이 글의 필자들은 지난 20여년간 지식인공동체를 꾸려온 ‘동지들’이다[고미숙(감이당). 채운(규문), 문성환·길진숙·신근영(남산강학원), 이희경(문탁네트워크)]. 우리는 각자의 네트워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루쉰을 공부했으며(이거야말로 기적이다^^), 그러다 2015년 가을 “루쉰의 여정을 밟아 가는 새로운 평전을 써 보자”는 프로젝트에 의기투합했으며…”(고미숙, 「머리말」, 『루쉰, 길 없는 대지: 길 위에서 마주친 루쉰의 삶, 루쉰의 글쓰기』, 북드라망, 2017, 5쪽)
하… 도대체 ‘루쉰’이 뭐라고 그렇게들 주야장천 읽고, 쓰고, 여행까지 가신 겁니까(물론 탓하는 것은 절대 아니옵고…). 그래서 제가 한번 먹어 아니, 알아보겠습니다. 도대체 루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881년 9월 25일, 루쉰은 사오싱의 명문가 주씨 집안에서 태어났다.”[38쪽, 이하 쪽수는 모두 『루쉰, 길 없는 대지』] 그런데 왜 주씨가 아니라 ‘루’쉰(魯迅), 노씨냐 하면,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이고 루쉰은 100여 개가 넘는 루쉰의 필명 중 하나입니다. 특히 ‘루쉰’은 소설 데뷔작인 「광인일기」를 발표할 때 처음 사용한 필명이었는데요. ‘노’는 어머니의 성이기도 합니다. 루쉰은 명문가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가문의 영광을 누리기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과거시험 부정으로 ‘참수대기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요. 대기도 감옥에서가 아니라 감옥 근처에서 살림을 차려서 한 것이라, 두 집 살림에 감형을 받기 위한 로비에… 결국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쉰의 아버지까지 쓰러지고 맙니다. 다음 상황이야 뭐, 빤히 아시겠지요? 집이 망한 거죠. 하지만 루쉰은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럴 만큼 조부와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않았다. 일생 동안 그의 영혼을 인도한 건 오히려 어머니였다(훗날 「광인일기」로 데뷔할 때 그는 필명을 쓰면서 주씨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인 노魯를 택한다)”[46쪽]. 저우수런이 ‘루쉰’이 된 사연은 이렇지만 이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고 “가문이 망하고 왕조가 쇠락하고, 마침내 문명이 전복되는 그 시절의 아우라를 제대로 체득”하여 “일생 동안 한 번도 재기발랄한 청년인 적이 없었”[47쪽]던 루쉰은 마침내 도주를 감행합니다.
“어지간한 생활을 하다가 밑바닥으로 추락해 본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세상인심의 진면목을 알 수 있으리라. 내가 N으로 가서 K학당에 들어가려 했던 것도 다른 길을 걸어,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찾아보고자 함이었을 게다.”(루쉰, 「서문」, 『외침』 중에서)
“1898년 무술정변이 일어난 그 해, 열여덟 살의 청년 루쉰은 고향을 떠나 난징에 있는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간다.”[50쪽] 그러나 훈련이라는 것이 “돛대 위를 올라가는 것이 고작”[51쪽]이었기에 반년 만에 다시 광무철로학당으로 옮기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돛대 위로 올라가고 굴 속을 파 봐도 “아무런 재간도 배우지 못”하자 “1902년 22세의 청년 루쉰은 도쿄 유학길에”[52쪽]. 오르게 되는데요. 처음엔 고분(弘文)학원에 들어가 일본어와 과학을 배우다가 “‘문득’ 의학을 공부하겠다 마음먹고 센다이(仙臺)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이 1904년. (표면적으로는) 환등기 사건을 계기로 의학공부를 중단하고 도쿄로 돌아온 것이 1906년. 그 사이에 잠시 귀국해서 혼례를 치른 후, 동생 저우쭤런(周作人)과 도쿄로 돌아와 책을 읽고 번역하는 일로 소일하다가 귀국한 것이 1909년.”[56쪽] 도합 8년 동안 일본에서 청춘을 보내게 됩니다. 이 시기의 루쉰은 대부분의 20대가 그렇듯이 되는 일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정신을 뜯어고치는 일”이 몸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시급하겠다는 생각에 의학공부를 작파하고 문예운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도쿄의 친구들과 함께 잡지 출간을 계획하였으나 “출판을 앞두고 원고를 담당한 사람은 사라지고, 물주는 달아나고, 남은 ‘세 사람조차 각자의 운명에 쫓겨 더 이상 한데 모여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할 수도 없게”[57쪽] 되었지 뭡니까. 그럼에도 도쿄에서 루쉰은 장타이옌을 만났고, 니체와 바이런을 읽었으며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번역합니다.
센다이 의전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고향, “그 사이 혁명(1911년 신해혁명)이 있었고, 청제국이 멸망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106쪽]되었고, 1912년 5월 루쉰은 중화인민공화국 임시정부의 교육부의 말단 직원이 되어 고향을 떠나 베이징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말이 교육부 2과 과장이지 실제로는 턱없는 예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상태”라 “날마다 그저 출근하는 게 일”[109]이었으며, “혁명의 주체들도 권력을 잡게 되면서 금세 낡은 구세력과 비슷해졌을 뿐 아니라, 위안스카이가 주도하는 정국은 불안했으며, 진보인사들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과 방해가 자행되었으며, 반혁명의 세력들은 여전히 완강하게 버티고 서”[106~107쪽] 있는 상황.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어서 루쉰은 고비석의 탁본을 뜨고, 베끼며 그 ‘적막’을 견디고 있을 무렵, 오랜 친구 첸쉬안퉁이 찾아와 자신과 함께 계몽운동을 하자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루쉰의 대답이 그 유명한 ‘철방의 비유’입니다.(요기는 『루쉰, 길 없는 대지』의 110~111쪽을 보시면 자세히 나오니 책으로 보시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흠흠;;).
<신청년>에 개재되었던 『광인일기』
이 사건을 계기로 루쉰의 첫 소설이 탄생됐으니, 그 유명한 「광인일기」입니다. 그리고 루쉰의 대표작 「아Q정전」으로 마침내 루쉰은 명실상부한 중국 근대 문예운동의 기수가 되었으나, “적막 속의 루쉰을 일으켜 세운 신문화운동의 기수, 『신청년』이 1921년 분열된 것이다”[127쪽]. 정치에 치중하는 천두슈와 문학에 치중하길 원했던 후스가 결국 결별하면서 루쉰의 전우들이 흩어지고, 이후 “주의-사상의 난립, 정치-문화의 분쟁”[128쪽]이 “공리로 치장하고 자신의 실체를 감춘”[129쪽] 적으로 사방에 포진한 상황. 이에 루쉰은 소설로, 잡문으로, 강연으로, 번역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싸우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날.
“1926년 3월 18일, 천안문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150쪽] 훗날 3·18참사라 불리게 되는 이 사건(은 책 150쪽을 자세히 봐주시고..)으로 인해 당시 루쉰이 가르치던 베이징여자사범대학의 두 제자 류허전과 양더췬이 사망하게 됩니다. 이에 루쉰은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자신이지만, 그런 자신이 쓴 글은 더욱 무력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인 한” 써야 했습니다. “망각이라는 구세주가 강림하지 못하게, 피의 부채를 갚을 때까지 그 빚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청년들의 무덤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 그렇게 그는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 먹이 아닌 청년들의 피”[150~151쪽]로요.
이를 계기로 “루쉰은 수배자가 되어 ‘도바리’(도망)을 치다가”[171쪽]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베이징을 떠나기로 합니다. 1926년 마흔여섯의 루쉰은 샤먼으로 가 잠시 샤먼대학에 몸을 담았지만 루쉰은 이 ‘무사태평한 천당’을 떠나 1927년 1월 다시 광저우로 향합니다.
왼쪽부터 쑨원, 장제스, 마오
그리고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국공합작의 약속을 깨고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체포, 살육하는 우익 쿠데타를 감행한다. 곳곳에서 백색테러가 자행되었다. 상하이에서만 300명이 살해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4월 15일에는 광저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2천여 명의 노동자와 공산당원이 체포되고 100여 명이 살해되었다.”[178~179쪽]. “학생들이 잡혀가자 루쉰은 강력하게 항의하였지만 속수무책. 중산 대학은 ‘당교’(黨校)이기 때문에 정부 방침에 반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학교 관계자들. 늘 공리와 대의를 입에 달고 살다가 어느새 장제스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밑으로 기어 들어간 기회주의적 문인들. 이들은 주인보다 더 사나운 ‘발바리’들이었다. 루쉰은 4월 21일 중산대학을 사직하고 입을 닫는다.”[180쪽] 그리고 조용히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향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하이에서 루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장제스의 위협이 아니라 ‘창조사, 태양사, 정인군자 무리의 신월사 구성원이었던 문호들의 날카로운 포위공격’”[181쪽]. 이로부터 소위 ‘혁명문학논쟁’이 지루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이 상하이에서 루쉰은 적들과 동지를 동시에 상대하며 싸우다 1936년 10월 19일 사망하게 됩니다. 죽음을 예감한 루쉰은 죽기 몇 달 전 유언장을 작성하는데, “1. 상을 치를 때, 누구에게서건 돈 한 푼 받지 말라.— 다만 친한 벗의 것은 예외이다.
2. 바로 널에 넣고 땅에 묻어라.
3. 어떤 기념 행사도 하지 말라.
4. 나를 잊고 제 일을 돌보라.— 그렇지 않는다면 진짜 바보다.”(루쉰, 「죽음」, 『차개정잡문 말편』)라고 했다고 합니다. 진짜 압권은 그 뒤에 붙인 글.
“서양인은 임종 때에는 곧잘 의식(儀式) 같은 것을 행하여 타인의 용서를 빌고 자기도 타인을 용서한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며, “나의 적은 상당히 많다. 만일 신식을 자처하는 사람이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나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결정하였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일갈합니다. 이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 죽음!”[211쪽].
고미숙 선생님은 “루쉰이라는 우상을 전복하라고, 그 전략과 전술은 나로부터 배우라고. 그 전투를 수행하는 데는 너희들 같은 ‘게릴라적 집단지성’이 딱이라고”[214쪽] 루쉰이 당신들을 이 길 위로 호명한 것이 아닐까, 라고 하셨는데 비록 루쉰이 직접 남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이 후대의 친구들에게 보낸 텔레파시(?)는 제대로 전달되고 응답을 받지 않았네 싶네요.^^
지난 2010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루쉰전집』이 출간되고 있지만, 아직 루쉰을 직접 만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아니 되셨다면 일단 『루쉰, 길 없는 대지』로 여섯 분의 선생님과 루쉰의 생애를 직접 걸어보셔요. 어쩌면 몇 년 뒤, 여러분들도 ‘루쉰 로드’를 탐사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또 압니까? 그때 『루쉰, 길 없는 대지 2』가 나오게 될는지요. 하하하.
(정색) 책은 서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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