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지은이 이선현, 이솔 선생님 인터뷰
1. 선생님께 ‘철학’(-함)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선현】 올해 여름 어머니를 모시고 해운대에 있는 한 화랑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자연에 몰입한 시간을 다양한 기법들로 담아낸 전시였습니다. 어머니는 달맞이 길을 내려가시면서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이제 자연이 다르게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어머니의 말이 ‘철학’의 의미를 고민하는 저에게 다시 말을 걸어옵니다. 농부이신 어머니에게 자연은 철저히 계산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어머니는 자연을 계산의 대상으로 볼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을 작품을 통해 경험한 것 같습니다. 자연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순간을요.
‘철학’을 한다는 것도 이러한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의 현실에서 연구자는 대상을 앞에 세워 계산하고 따져보고 재현합니다. 세계는 재현하는 연구자에 의해 세워지는 한에서만 비로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물을 대상으로 재현하지 않을 때, 이러한 존재의 본질·구조·조건을 감각할 수 있게 됩니다. 철학은 세계를 ‘나’에게로 끌어와 내 앞에 세우지 않는 것, 즉 나—주체, 세계—대상과 같은 이분법이 아니라 나와 세계를 있게 하는 존재를 숙고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것, 그러한 존재를 보고자 하는 사색의 과정이 철학인 것 같습니다.
주디스 버틀러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대상으로 재현할 때, 그 주체는 알고자 하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제외시켜 세계와 분리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러한 위치에 서 있는 인간은 미디어에서 전쟁과 죽음의 장면을 마주한다 해도 눈 감아버리거나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안심하기도 하죠. 어떤 집단의 자유에 대한 호소가 내 삶을 방해하는 불편 요소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버틀러는 이러한 1인칭 시점을 벗어나기 위해 세계를 내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 바깥에 둘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나의 밖에 서게 되면 내가 어떻게 타자와 세계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후 깨닫게 된 것은 몸이 우리를 지탱하는 세계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접촉을 통한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했지만, 애초부터 세계에 노출된 몸은 서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즉, 피부와 살을 가진 몸은 접촉과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세계로 열려있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 없는 세상에 던져져 그 세상의 규범과 판단 기준으로 이해되고, 그 세계의 필요조건에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버틀러는 존재의 근원이 우리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고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타자·자연·역사·기술·제도·세계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그 관계성을 깨닫는 것이 버틀러 철학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성을, 그 구조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이솔】 “철학함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마도 학문으로서 철학이 가지는 정의를 묻기보다는 철학이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질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질문과 마주할 때마다 들뢰즈가 사르트르에 대해 말했던 하나의 표현을, 곧 ‘한 줌의 신선한 바람(un peu d'air pur)’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디알로그』에서 들뢰즈는 그 자신이 철학사에 얽매여 있던 당대 철학의 경직성을 벗어나 새로운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사르트르라는 ‘한 줌의 신선한 바람’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해방기에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철학사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저 헤겔·후설·하이데거 속으로 뛰어들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강아지처럼 중세 때의 스콜라 철학보다도 못한 스콜라적인 철학을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때 사르트르가 있었습니다.(Heureusement il y avait Sartre.) 사르트르는 우리의 바깥이었고, 그야말로 뒤뜰에 부는 바람이었습니다. (···) 소르본의 모든 가능성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질서의 새로운 재편을 감당할 힘을 준 것은 바로 사르트르 특유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절대로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죠. 어떤 모델이나 방법, 사례가 되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오히려 한 줌의 신선한 바람이었습니다. 막 플로르에 갔다올 때조차 그는 한 줌의 신선한 바람,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이었지요.”(Gilles Deleuze, Claire Parnet, Dialogues, Paris: Flammarion, 1996.)
제가 생각하는 철학함이란, 이미 주어진 사유의 질서 안에서 더 정교한 설명을 덧붙이는 일이라기보다, 그 질서 자체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굳어버렸는지를 감지하고, 그 틈에 다른 숨결을 불어넣는 일에 가깝습니다. 들뢰즈가 회고하듯, 해방기 프랑스의 철학은 이미 철학사 내부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학자들에게 헤겔, 후설, 하이데거라는 이름은 사유의 원천이기보다는 사유의 안전지대로 기능했고, 철학은 점점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보다 “어디에 소속되는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철학은 세계를 여는 언어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언어가 됩니다. 그러나 철학함이란 이처럼 이미 승인된 문제 설정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질문 방식 자체를 낯설게 만들고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체계가 아닌 ‘사건’, 방법이 아닌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약간 불온하고, 약간 불편한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 철학의 가치는 분명해집니다. 들뢰즈가 말하듯, 사르트르는 어떤 학파의 중심이 아니었고, 하나의 모델로 고정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철학사 내부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기보다, 철학 바깥에서 철학을 흔드는 존재였습니다.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 가치는, 특정한 이론이나 결론에 있기보다, 철학을 다시 세계의 공기 속으로 끌어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문학, 정치, 일상, 역사적 사건과 얽혀 있었고, 그 때문에 종종 “철학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철학을 살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사유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세계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언제나 우리를 안락한 해석의 자리에서 밀어내어, 선택과 행위의 자리로 끌어냅니다.
들뢰즈가 말한 ‘한 줌의 신선한 바람’이란, 사르트르가 새로운 교리를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철학이 다시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표현일 것입니다. 결국 “철학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철학이란 정답을 제공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유가 굳어버리는 순간을 감지하고 그 자리에 한 줌의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그것을 보여준 아주 드물고도 결정적인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2. 한나 아렌트는 귄터 가우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철학계’에 속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철학을 남성적인 직업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철학이 남성적인 직업으로 남을 필요는 없다고, “언젠가는 여성이 철학자가 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해질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이 책에 실린 김애령 선생님의 글 안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기도 한데요.) 선생님께서는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선현】 아마 버틀러라면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로 미국 사회에 등장했을 때는 젠더를 남성/여성으로 구분하는 이성애적 젠더 규범과 생물학주의를 내세운 신보수주의에 저항하고 개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버틀러가 내린 결론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 성(sex)과 젠더가 이성애적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진리인 줄 알았던 규범이 시간 속 반복을 통해 구성된 결과라는 사실, 즉 젠더가 규범과 권력의 반복적 효과이며 결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은 남성 중심 사회에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에 저항하는 여성의 단합조차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철학계를 남성이 장악한다고 해서 여성철학자를 내세우는 것은 버틀러에겐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남성철학자를 단일한 형태로 규명하고 이를 비판 없이 모방하는 역담론일 뿐입니다.
이러한 버틀러의 입장을 근거로 한다면, ‘여성철학자’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은 없습니다. 남성 중심의 철학적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뭉친 ‘우리’라는 여성은 또 다른 이들에게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배제성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로서 여성의 동등함에 대한 요구와 명명 덕분에 남성중심적 체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주체적인 지적 생활을 누릴 수 있겠죠. 그러나 여성철학자로 명명하는 과정에서 그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배제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여성철학자와 남성철학자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국 남성 위주의 철학계에 반대하여 여성철학자로 명명하는 것은 기존의 남성/여성이라는 이성애적 규범을 유지하는 데 동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주체를 토대로 상정하는 것은 도리어 주체의 규범을 설정하는 법입니다. 버틀러는 정체성에, 주체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이 필요한 상황과 그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버틀러처럼 젠더 규범을 해체한다면, 여성 운동이 기반으로 삼아온 여성의 경험과 몸까지도 사실상 해체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이것이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이후에 받은 비판입니다. 친구의 말을 빌려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도 자본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에게 자본 너머를 상상하라는 요구가 사리에 맞을까요?’ 마찬가지로 여성철학자로서의 위치와 그 단어의 의미를 실제로 느껴본 적 없는 이에게 이 단어의 해체를 운운하는 것은 조금 가혹해 보이기도 합니다. 철학계에서도 여성과 남성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연대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여성철학자’라는 말을 가져본 경험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면 안 되지만요. 해체도 세워진 것이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이솔】 ‘여성철학자’는 잘못된 개념입니다. 저는 이것이 없어져야 할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성철학자’라는 개념이 없어져야 할 단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성’과 ‘철학자’의 결합이 ‘부조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합이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철학함에는 성별이 덧붙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은 하나의 개념은, 하나의 삶과 같이, 시간 속에서 태어나며 살아가고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념은 역사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다하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특정한 시대는 특정한 개념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여성철학자’라는 단어는 어떤 필요와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는 역사적으로 철학사는 의도적으로든 구조적으로든 여성 사유자를 배제해왔고, 그 결과 “철학자”라는 보통명사는 사실상 남성 철학자를 지시해왔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에서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은 일종의 교정적 명명으로 기능해 왔다고 봅니다. 즉 ‘여성철학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여성도 철학을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해온 여성들이 체계적으로 지워져 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명명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이 개념이 가지는 잠정적·역사적 가치를 옹호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성철학자’라는 개념을 경계하는 까닭은, 이 표현으로 인해 ‘여성철학’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환상이 만들어 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이 어느 순간부터 특정한 주제(몸, 돌봄, 감정, 사적 영역)를 다루는 하나의 영역이 되고, 특정한 방식(관계성, 비폭력성, 서정성)을 여성적 사유의 본질처럼 환원해버릴 때, 이 개념은 새로운 배제의 장치가 됩니다. 이때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사유의 자유를 제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성철학자’라는 개념이 철학사의 배제와 침묵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적 명명으로는 유효하나, 이 명명이 사유의 내용이나 방식까지 규정하려 들 때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저는 ‘여성철학자’라는 이름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독자들께 선생님이 전공한 철학자의 한 문장을 전해 주세요. 그리고 그 문장을 선택하신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이선현】 “내가 생각하기에 슬픔이란 파도처럼 밀려오는 법이어서, 목표, 기획, 계획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해도 실패하고 만다. 무너지게 되는 때가 있다. 지쳐 쓰러져도 왜 그런지 모른다. 우리의 의식적인 계획, 우리 나름의 기획, 우리 자신의 앎과 선택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책 『위태로운 삶』 49쪽에 나오는 문장들입니다. 별안간 세상이 고요해지는 문장이었습니다. 나를 덮쳐온 슬픔이 더 큰 무언가와 연결되어있다는 감각, 세계와 이어지는 감각의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위태로운 삶』 을 읽을 당시 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첫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사흘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가족의 죽음에도 흔들림 없는 이성적인 나의 모습을 조금 대견해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며칠 뒤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의 냄새가 확 떠올랐고, 그 냄새의 기억으로 인해 목 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잠시 동안 온전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원했고 또 잠깐 그럴 수도 있었지만, 상실의 슬픔은 결국 저를 와해시켜 버렸습니다. 그런 제게 버틀러의 이 문장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알려줍니다. 내가 타자와 세계에 연루되어 있음을 슬픔이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상실의 순간에 저는 무엇을 잃었던 걸까요? 아버지를 잃은 것뿐만 아니라, 나라는 인물을 구성했던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상실한 것은 아버지와 나를 이었던 유대관계였어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가까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일 수도 있으며, 반려종일 수도 있겠죠. 혹은 미디어를 통해 접한 죽음의 소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상실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슬픔은 자율적이고 통제가능한 ‘나’라는 존재의 환상을 무너뜨립니다. 내가 침투 불가능하고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 상실의 슬픔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버틀러의 이 문장은 상실을 경험한 자들을 위한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사건 너머에 있는 신의 계획을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자신의 앎과 선택보다 더 큰 무언가’란, 너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관계성입니다.
다만 슬픔을 통한 관계성을 이해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관계성은 상실에 대한 단순한 감정적 공감이 아닙니다.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상실에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위선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죠.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소식에 안타까워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죄책감을 털어버리려는 수단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버틀러는 슬픔이 보는 것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은 단순한 공감을 넘어 나와 너를 구성하는 조건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버틀러의 문장을 통해 독자들도 세상이 고요해지는 순간을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관계성을 이해함으로써, 나와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심지어 적대하는 이들과도 연대할 수 있기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솔】 제가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사르트르의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L’écrivain est en situation dans son époque: chaque parole a des retentissements. Chaque silence aussi.(작가는 자신의 시대 안에 위치해 있다. 그의 모든 말은 파장을 낳는다. 침묵조차도 마찬가지다.)”(Jean-Paul Sartre, Situations II, 1948.)
그 많은 문장들 가운데 제가 이것을 택한 까닭은 이 문장이야말로 ‘가장 사르트르다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그의 철학을 특징짓는 개념들, 이를테면 실존, 앙가주망(engagement), 자기기만, 자유, 책임과 같은 논의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언제나 ‘상황(situation)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떤 본질이나 규범 바깥에서 중립적으로 사유하거나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특정한 시대, 사회, 정치적 조건, 언어와 관습 속에 던져진 채로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합니다. 이 점에서 “작가는 자신의 시대 안에 위치해 있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단지 직업적 작가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사유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규정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말한다는 것은 단순한 표현 행위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말은 세계를 단지 기술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와 동시에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구성합니다. 이것이 “각각의 말은 파장을 낳는다”는 문장이 가진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문장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면, 그 이유는 마지막 한 문장에 담겨 있을 겁니다. “침묵조차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는 침묵을 결코 무책임의 은신처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판단을 유보하는 중립적 상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상황에 대해 하나의 태도를 취하는 방식입니다. 부정의(不正義) 앞에서의 침묵, 폭력 앞에서의 침묵, 차별 앞에서의 침묵은 그 자체로 특정한 세계를 선택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책임 개념이 가지는 무게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제아무리 눈을 가리고 몽매(蒙昧)한 상태를 자처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책임을 떠맡고 있습니다. 침묵조차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르트르 철학에서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부담입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갖지 않습니다. 말하든, 침묵하든, 관망하든, 우리는 언제나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바로 이 사실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말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침묵이 전략화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립’을 가장한 회피, 피로를 이유로 한 거리 두기. 이 문장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더 많이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 그리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떤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관객’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의 문장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사르트르 철학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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