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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지은이 노성숙, 양창아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6. 2. 5.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지은이 노성숙, 양창아 선생님 인터뷰


1. 선생님께 ‘철학’(-함)은 어떤 의미인가요?

【노성숙】 제게 철학은 단지 학문이기보다는 ‘철학함’의 활동으로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웃들과 더불어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사유하기’와 ‘대화’를 통해서 ‘철학함’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함’에서의 사유하기는 단순히 떠오르는 상상들의 유희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래로 뿌리는 내리며 뻗어 가기도 하고, 위로 뻗어 나가며 그 방향성을 탐색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철학적 질문을 통한 사유는 ‘철학’ 책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떨어져 나오는 ‘놀라움’, ‘상실’, ‘회의’ 등의 계기를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사유한다’는 것이 곧 ‘영혼이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철학함’에서 중요한 ‘사유하기’는 대화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이웃, 세계에 대해 사유하는 활동을 홀로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스스로 내적으로 대화하듯이 전개되며, 이러한 전개를 좀 더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타인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철학상담’의 분야에서 집단 프로그램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는 ‘소크라테스 대화’는 대표적인 ‘철학함’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창아】  자기 세계의 한계를 감지하고 인식하며 허물어뜨리는 과정. 사람들이 종종 삶에서 배운다고 하잖아요. 그 말은 한편으로 이미 배운 것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뜻하는데요. 철학도 그런 배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철학만이 그러한 배움 버리기로서의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없이 철학함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질문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세계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말이 혼잣말처럼 떠올랐는데요. 왜 이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을까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번 학기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의 『정치적인 것의 기원: 한나 아렌트냐 시몬 베유냐』(The Origin of the Political: Hannah Arendt or Simone Weil?)(trans by Vincenzo Binetti and Gareth Williams, Fordham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7)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는데 그 영향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에스포지토는 그 책 서문에서 아렌트와 베유의 사유 개념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데요. 그는 두 사람의 사유 개념이 특히 ‘비주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들에게는 주관적 의식의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구체적 현실의 차원에 진리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얘기해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기 세계의 한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기의 능력 향상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타자와 세계와 끊임없이 접촉하며 자기 안에 갇힌 상태로부터 벗어난다는 걸 의미합니다. 저는 철학함이, 어느새 견고해진 주관성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유 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2. 한나 아렌트는 귄터 가우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철학계’에 속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철학을 남성적인 직업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철학이 남성적인 직업으로 남을 필요는 없다고, “언젠가는 여성이 철학자가 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해질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이 책에 실린 김애령 선생님의 글 안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기도 한데요.) 선생님께서는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노성숙】 오늘날 독일어로 남성, 여성을 구별하지 않도록 하는 표기하는 운동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제 이메일주소는 독일어로 ‘philosophin’ 즉, 여성철학자입니다. 기존에 철학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남성을 의미하는 ‘Philosoph’이었던 것을 이미 의식한 단어입니다. 저는 당당하게 ‘여성’ 철학자라는 점을 표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철학자로서 여성인지 남성인지가 큰 무리 없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제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는 ‘여자가 철학을?’이라는 질문이 종종 제기되는 시대였습니다. 논리는 남성이고, 감성은 여성으로 인식하는 선입견에서 철학이 여성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네, 저는 여성으로서 철학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마치 공표라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양창아】  가우스의 질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어요. 가우스는 아렌트가 자신의 인터뷰에 참여한 첫 여성이라고 말한 후에, 다음으로 철학자라는 “대단히 남성적인 직업”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철학계에서 수행하는 자신의 역할”을 독특한 것으로 인식하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이 가우스의 첫 질문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아렌트는 가우스 질문의 전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답을 하고 있어요. 


아렌트는 가우스의 질문을 받자마자 곧장 자신을 철학계에 귀속시키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요. 자신은, 굳이 말하자면, 정치이론을 전공하고 있다고 답하면서요. 어찌 보면 아렌트가 남성이었다면 받지 않았을 가우스의 첫 질문 자체에 여성을 철학계 외부에 위치시키는 관행이 반영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나는 철학자처럼 느끼지도 않고, 철학계가 나를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고 믿지도 않아요. … 철학이 남성적인 직업으로 남을 필요는 없어요! 언젠가는 여성이 철학자가 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해질 거예요.”라는 아렌트의 대답은 이러한 편견을 문제 삼으면서도(그러한 편견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도 말하고 있지요), 그것과 별개로 그러한 남성 중심의 기준에 굳이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듯한 입장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 답변의 함의는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질문과 응답 속에서 드러납니다. 아렌트가 철학자임을 부정하니까 가우스는 정치이론과 정치철학의 차이가 뭐냐고 묻거든요. 가우스 자신은 아렌트를 철학자로 규정하고 있다고 말하면서요. 그 질문에 대해 아렌트는 정치와 철학 사이에 긴장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제까지 서양 철학은 대부분 그 긴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고 비판해요. 복잡한 정치의 영역에 단일한 철학적 진리를 적용하려는 섣부른 시도를 계속했다고 비판하지요. 그리고 철학자가 자연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견해를 피력할 수 있다고 해도 정치에 대해서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견해를 피력할 수 없다고 덧붙여요. 아렌트는 적어도 정치에 관한 한,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 철학자도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당파성(또는 부분성)을 인정하면서 정치에 개입하는 또 다른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가우스가 질문했다면, 아렌트는 그러한 명명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면서 그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며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런데 저는 바로 이 대화에서 제기된 문제와 더불어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이 명명은 여성을 동일한 존재나 특성으로 한계짓는 측면이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철학의 외부, 그보다도 다른 철학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측면이 있고요.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이 갖는 효과도 마찬가지인데요. 전자의 측면을 강조할 경우, 여러 철학자의 사상을 각각의 특성에 주목하여 살피기보다 마치 ‘여성’으로서의 어떤 동일한 본성이 있는 것처럼 다양한 철학자를 여성이라는 이름 하나로 묶어서 틀에 가두는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하지만 후자의 측면을 강조하면, 이 명명은 각각의 ‘여성’ ‘철학자’의 차이를 동일화하지 않으면서 정전이라 불리는 철학자의 작품들에서 은폐된 여러 관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에 따라 기존의 ‘철학’ 자체에 대한 성찰과 ‘철학적 서술’의 정치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간단히 전자를 거부하고 후자를 받아들이자는 방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관련해서 두 측면이 묘하게 얽혀 있는 부분이 있어서 쉽게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여러 여성철학 가운데 어떤 입장은 여성의 본질을 실질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강조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입장은 반본질주의적 입장을 강하게 피력하니까요. 저는 반본질주의적 입장을 옹호하고, 철학이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견해처럼 젠더, 인종, 계급 등에 기반한 여러 관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성의 정체성이 단일하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여성이라는 기표가 철학의 외부를 가리킨다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앞서 아렌트가 정치와 철학 사이의 긴장을 강조했다고 얘기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긴장은 정치와 철학이 구분되면서도 서로 심대한 영향을 주고받기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저는 다양한 여성철학자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그러한 긴장을 사유하는 영역을 한껏 열어젖혔다고 생각해요. 이들의 사유와 더불어 철학이 그 자신의 한계를 열어젖힌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측면에서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을 긍정할 수 있어요. 

 




3. 독자들께 선생님이 전공한 철학자의 한 문장을 전해 주세요. 그리고 그 문장을 선택하신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노성숙】   “고통이 말해지도록 하려는 욕구는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주체에게 부과된 객관성, 주체가 그 자신의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된다.]”(아도르노, 『부정의 변증법[ND]』 29)
최근 들어 저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서부터 ‘실천으로서의 철학함’으로 강조점을 이동해가고 있으며, 철학상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된 주제는 ‘고통’입니다. 고(苦, suffering)와 통(痛, pain)을 구별해본다면, 육체적인 통증(痛症)은 어느 정도 객관화할 수 있겠지만, 심리적인 아픔은 워낙 주관적인 성격이 강해 객관화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양자가 서로 감응하면서 고통이 총체적으로 더욱 심화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혹은 철학사적으로 말해진 모든 진리가 현실에서 몸으로 겪는 아주 구체적인 고통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또한 고통은 주체가 경험한 것을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며, 그 개념이나 언어로 모두 담을 수 없는 사태를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도록 촉진합니다. 따라서 아주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나오는 ‘철학함’을 위해 ‘고통’의 계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양창아】  한 문장이 아니라 한 문단을 전해야겠어요. 아렌트 사상의 핵심과 그녀의 인격적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지는데, 한 문장만 잘라내기가 힘드네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홍원표 옮김, 인간사랑, 2010)에 수록된 「어두운 시대의 인간성: 레싱에 관한 사유」에 있는 구절인데요. 이 구절을 선택하게 된 이유와 맥락을 먼저 말하고 싶어요. 아렌트가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지요. 이 글에서 아렌트는 형제애와 우정을 구분하고, 우정이야말로 정치에 적합한 관계이자 감정이라고 말해요. 흔히 우정을 사람들 사이의 친밀성을 드러내는 현상 중 하나로, 형제애 또는 연인이나 가족 간의 사랑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잖아요. 하지만 아렌트가 보기에, 사랑은 말이 필요 없는 관계나 동질성에 기반한 관계를 추구하는 데 반해, 우정은 그 본질이 대화 속에 있는 관계로서, 우리가 함께 사는 세계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진 존재와 맺는 관계입니다. 친구는 특별한 목적 없이도 공동의 세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 내가 보지 못한 세계의 다른 면을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생각이 똑같다면, 대화는 끝이 나겠지요. 그러니까 아렌트에게 친구는 나와 코드가 맞고 말없이도 생각이 통하는 존재라기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존재,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다른 이질적 존재입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관점의 ‘복수성(plurality)’이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공동의 세계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세계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고 말하기도 해요. 달리 말해, 공적 영역에서 다른 의견이 말해지지 않고 다른 시각이 드러나지 않으면, 세계는 ‘비인간적인’ 것이 됩니다.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성(humanity)’도 인간의 동질적인 자연적 본성의 의미가 아니라 우정(philia)의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애, 즉 필란트로피아(philanthropia)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여기에는 친구와 세계를 공유하는 경험의 기쁨, 이질적 존재와 함께 살고 이야기하며 세계의 면면을 풍요롭게 경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니 대화는 논쟁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논쟁 과정을 통해 세계의 다른 면을 보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를 이전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때때로 이러한 공적 대화를 통해 함께 사는 세계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도 있지요. 아렌트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정치적 경험의 핵심(heart)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어두운 시대’의 어두움은 이와 같은 정치적 경험이 그 의미를 잃고 사람들에게서 그 경험 자체가 소실되는 사태를 가리켜요. 여기서 이질적 존재는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나 적이 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대의 징후 중 하나는 공적 영역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차이를 드러내는 논쟁적 대화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공적 영역에서 타자와 동등하게 맺는 우정의 관계가 불가능해진 세계, 즉 ‘비인간화된’ 사회에서는 위로와 위안을 주는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만이 자기다움과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지게 되어요. 하지만 그렇게 논쟁과 차이가 사라진 세계는 다양한 관점의 결핍으로 인해 타자에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지요. ‘타자’의 이질성은 ‘우리’ 공동체의 특성에 맞춰서 동화되어야 할 요소로만 여겨지게 됩니다. 아렌트의 견해에 따르면, 타자의 이질성에 기반한 다른 시각이 공론화되고 공적으로 존중될 수 있을 때, 그것이 공동체에 새로움으로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 정치의 경험이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저는 현재 우리가 레싱과 아렌트의 시대와는 또 다른 결로, 그러나 같은 의미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 구절을 선택했어요. 

“레싱도 이미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으며, 시대의 어둠은 결국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의 삶을 파괴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며, 공적 영역만이 줄 수 있는 빛과 조명을 대신해, 친밀함의 온기 속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이 논쟁을 피하고, 가능한 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싱 같은 기질의 사람에게는 그런 시대와 폐쇄적 세계 내에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따뜻해지기 위해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레싱으로부터 멀어져갔다. 하지만 다투기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논쟁적인 성향을 지닌 그는 외로움도 견딜 수 없었지만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형제애의 과도한 친밀함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결코 자신과 논쟁을 벌였던 사람과 결별하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다만 세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세계를 인간적으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기를 바랐지, 누군가의 형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On Humanity in Dark Times: Thoughts about Lessing,” Men in Dark Times, San Diego: Harcourt Brace Jovanovich, c1983, p. 30(국역본 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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