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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지은이 강선형, 김분선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6. 2. 3.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지은이 강선형, 김분선 선생님 인터뷰

 

1. 선생님께 ‘철학’(-함)은 어떤 의미인가요?
【강선형】 들뢰즈의 유명한 개념 가운데 ‘거짓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들뢰즈가 니체로부터 가져온 ‘거짓의 역량’ 개념은 진실을 일깨우는 허구의 힘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해서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 자체를 와해시키는 힘을 가리킵니다.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가 와해된다는 것은 철학이 더 이상 고정되어 있는 진리를 발견하거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철학에 관심이나 가질까요? 철학의 쓸모는 단지 개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진리 찾기에 있다는 믿음이 철학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를 공부하며 이런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진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고 절망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정답이 없는 철학에서만 끝나지 않는 질문들을 배우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정답이나 결과를 바랍니다. 끝나지 않는 과정 속에 있다는 건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논의가 끝난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을 기피하기도 하고, 미디어에 나와서 가장 빠르고 명쾌한 답을 내려주는 사람들을 추앙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철학도 ‘쇼츠’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늘 과정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무엇이’ 되었다고 하면, ‘무엇이’보다는 ‘이런저런’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정답을 동어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설명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발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철학과 함께 질문을 배우고, 질문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위대함은 철학이 없었다면 아주 큰 자리를 차지했을 아둔함을 줄여준다는 데에서 나온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아둔함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즐거움은 인생의 즐거움을 닮은 것 같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무의미한 반복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과정은 늘 새로운 배움의 과정인 것처럼, 무엇에 답하고자 했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우리는 철학의 과정을 통해 그 즐거움을 배웁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에 끊임없는 발명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궁극적인 목적지를 가지지 않는 모험이라고 썼습니다.

 



【김분선】 저에게 철학함은 사유함입니다. 혼자 사유하기보다 함께 사유하기로 확장하여 나아가면 더 좋을 듯하여 연구와 교육을 하며 철학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게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 파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철학적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 따라가기 벅차서 버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철학을 지식으로 쌓는 것은 말 그대로 질문하면 답이 나올 수 있도록 기계적으로 학습하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철학 공부는 기계적으로 하여 같은 답이 도출되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정확하게 그 내용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분별되지 않습니다. 또 철학자가 전달하는 바르게 의미를 이해했는지 아는 거부터가 어렵고 나를 시험대에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것뿐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가져오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고행의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조각난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맞춰지게 됩니다. 그 시간을 건너야 철학자의 사유 근처에서 맴돌 수 있고 책 속 철학자들의 사유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세계를 파악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철학적 사유의 근원에는 모두 인간인 철학자의 사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사유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하고, 자기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하고, 낯선 세상에 발을 맞출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저에게 철학은 오랜 친구와 함께 사유를 나누는 과정과 같습니다. 


2. 한나 아렌트는 귄터 가우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철학계’에 속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철학을 남성적인 직업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철학이 남성적인 직업으로 남을 필요는 없다고, “언젠가는 여성이 철학자가 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해질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이 책에 실린 김애령 선생님의 글 안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기도 한데요.) 선생님께서는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강선형】 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분명 삶과 아주 밀접해 있었겠지만, 자신의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삶의 문제이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철학을 시작할 때에는 서양의 철학을 공부하는 동양인, 남성의 철학을 공부하는 여성 등이 내가 나의 삶을 규정하는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규정하는 문제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을 공부하는 환경에 익숙해지며, 규정되는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동양인이나 여성뿐만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 쓴 것처럼 ‘박사님Herr Doktor, 박사님Herr Doktor, 부랑자양반Herr Schnorrer, 부랑자양반Herr Schnorrer!’이라는 아렌트가 전해주는 이야기도 계속 상기되었습니다.


들뢰즈의 ‘되기devenir’ 개념은 이러한 고민 과정 중에 늘 중요한 배움을 주었습니다. 들뢰즈는 아이-되기, 여성-되기, 동물-되기 등의 개념들을 말하지만, 이때 남성-되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때 남성은 다수성을 가리키는데, 남성뿐만 아니라 백인, 어른, 이성적임과 같은 것들도 다수성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남성-되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되기’가 유사성이나 모방, 동일화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미 다수성의 표준이 정해져 있고, 그와 얼마나 동일하고 유사한지, 그리고 얼마나 그것을 잘 모방하는지만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같은 것이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어떠한 변화도 생성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되기는 다수자-되기가 아니라 소수자-되기만이 가능합니다. 남성-되기란 없고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등만이 있는 것입니다.


여성 철학자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되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도 등장하는 표현인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해 글을 쓰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되기 위해 쓰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기 위해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여성의 고유한 글쓰기에 관해 질문을 받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한 바 있는데, 울프는 ‘여성으로서’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끼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지 않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나의 글을 통해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그것이 저에게는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 이정표가 되어줍니다.

 

 

질 들뢰즈

 

 

【김분선】 글쎄요.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을 거부할 이유는 없지만, 철학자에 남성철학자와 여성철학자를 구분하는 명칭으로 ‘여성철학자’라고 한다면 이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남성의 소유물인 시대도 아니고 여성의 앎과 남성의 앎을 구별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을 가지고 분별한다면 이 또한 문제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의 지성을 가질 수도 없고, 이를 표준화할 수도 없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철학적 혜안을 서로 다른 종류의 지성이라고 구분할 근거도 없고, 서로 같은 종류의 지성이라고 명명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일반적으로 철학을 남성적인 직업으로 생각한 이유가 특정 직업에 필요한 조건이나 특정 직업에 필요한 지식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에서 오는 권력의 불균형한 발전과 사회적 권한에 대한 불평등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현대 여성이라면 철학을 대단히 훌륭한 남성의 전유물이라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넘어설 수 없는 지성 너머의 어떤 것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라 봅니다. 그만큼 여성의 교육 및 지식의 성장이 있고 더 발전할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또 여성이 보는 세계의 질서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거나 더 풍성하게 채워질 여지가 있습니다.

 

실제 합당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철학과의 성비의 변화도 관심을 가지고 살필 지점입니다. 철학과에 여학생이 전혀 없었던 시절을 지나, 제 학번 때에는 2:1의 성비로 올라섰는데요. 현재는 여학생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만 봐도 철학자에 대한 인식 역시 자연스럽게 변화될 시점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철학하는 여성인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연구하고 활동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독자들께 선생님이 전공한 철학자의 한 문장을 전해 주세요. 그리고 그 문장을 선택하신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강선형】  “거짓의 역량은 개구리와 전갈들에게 잡히고 말 정도로 허약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예술 혹은 삶의 유일한 기회, 즉 니체, 멜빌, 베르그손, 웰즈…의 기회이다.”(질 들뢰즈, 『시간-이미지』, 290쪽)


이 문장은 『시간-이미지』의 ‘거짓의 역량’ 장의 문장입니다. 특별히 멋있는 문장도 아니고, 부연설명도 필요한 문장이지만, 들뢰즈 철학이 왜 필요한가를 고민할 때, 항상 답이 되어주었던 문장이라 선택해보았습니다.


 들뢰즈에게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를 와해하는 ‘거짓의 역량’은 윤리적 사유입니다. 미리 정해져있는 참과 거짓, 선과 악,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아주 강력하고, 그래서 위험한 사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개구리와 전갈들에게 잡힐 정도로 허약하다고 말하는 것인데, 인용문의 개구리와 전갈은 오손 웰즈의 영화 <아카딘 씨>에 나오는 우화에서 온 것입니다. 우화에는 강을 건너기 위해 개구리에게 태워달라고 요청하는 전갈이 등장합니다. 전갈의 요청에 개구리는 분명 자기를 찌를 것인데 태워줄 이유가 없다고 거절합니다. 전갈은 개구리에게 자기가 찌르면 함께 가라앉기만 할 것이니, 찌를 이유가 없다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개구리는 전갈을 믿고 태우는데, 전갈은 강 한 가운데에서 여지없이 개구리를 찔러버립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가라앉습니다. 개구리가 죽음에 이르며 전갈에게 함께 죽을 것을 알면서도 찌른 이유를 묻자, 전갈은 이것이 자신의 성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개구리는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를 믿고 따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전갈과의 계약의 힘을 믿고, 전갈의 합리적인 설명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개구리에게, 다시 말해 옳고 그름의 명확한 잣대를 가진 자들에게 거짓의 역량은 전갈 같은 존재와 마찬가지로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힘일 뿐입니다. 또한 전갈에게도, 즉 개구리처럼 보편적으로 믿는 판단체계를 따르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저 타고난 성격대로 사는 것을 의미할 뿐인 자들에게도, 거짓의 역량은 무력합니다. 우리는 고정되지 않는 판단체계를 끊임없이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타고난 성격에 따르다 보면 그러한 창조적 역량이 쉽게 사그라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토록 허약한 역량만이 삶의 유일한 기회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로서만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늘 미리 주어져 있는 무언가에 빗대어서만 긍정될 수 있고, 또 대체로는 부정될 수밖에 없는 채로 있겠죠.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그것이 허약한 거짓의 역량에 있습니다. 들뢰즈의 철학은 늘 이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줍니다.

【김분선】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역사적 접근을 통해 감옥의 역사를 쓴 이유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현재의 시대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쓰려고 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며, 현재의 역사를 쓰려 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푸코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구이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역사가나 사회학자가 아닌 철학자인지를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푸코는 현재의 역사를 쓰려 과거의 역사를 보는 것이지 과거를 보려고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철학자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성을 탐구하고 현재의 문제를 조망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답을 찾고자 하는 이가 철학자 푸코입니다. 


저는 푸코의 현재성이라는 표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보고 현재로부터 미래를 구성하는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중요한 변환 장치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현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바뀌게 되기 때문에 현재성은 시간성의 중요한 변환 통로가 됩니다. 그런 이유에서 인용한 위의 문장은 푸코적인 것을 잘 드러낸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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