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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스퍼거는 귀여워] 아빠와 아들, 둘 만의 방콕 여행기

by 북드라망 2025. 10. 21.

아빠와 아들, 둘 만의 방콕 여행기

 

글_모로
일리치 약국과 로이약차에서  일하고 있다.
열심히 쌍화탕을 달이고, 약차를 손질한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과 만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해외에서 감자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미아방지 목걸이라도 해야 하나?”


 
말이야 방구야. 초등학교 6학년에 키 172cm인 아이를 잃어버릴 걱정을 하다니. 아무리 장애가 있다 한들, 아이가 자란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한 남편의 말에 웃음이 났다. 물론 내가 없어서 불안한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좀 심하지 않니?

남편은 여행을 좋아한다. 물론 나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남편만큼은 아니다. 우리는 결혼 후 코로나 시절을 제외하고는 일 년에 한두 번씩 해외여행을, 수시로 국내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가게 되면 지겨운 집안일에서 벗어나게 되니, 나야 땡큐다. 청소랑 밥만 안 해도 그게 휴식이니까. 실컷 놀고 돌아와 깨끗하게 치워진 호텔 방을 볼 때의 기분이란! 하지만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에는 한계가 있다. 매번 비슷한 휴양지에 바다를 낀 리조트, 마사지, 수영 같은 여행이니까. 물론 좋다. 좋긴 한데, 나는 수영도 못하고 덥거나 사람 많은 것도 싫어한다. 여행 가서 가장 좋은 점은 깨끗한 호텔 방에서 낮잠을 자거나 썬베드에 앉아 책을 읽는 거다. 그러려면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배부른 소리라는 건 나도 알지만, 사실이 그렇다.

 




황금연휴, 두 남자의 여행이 성사되다!
올해도 황금연휴가 줄줄이 있다 보니 남편의 여행 욕구가 솟구쳤다. 원하는 목적지는 (언제나 그러하듯) 태국. ‘또’ 방콕을 가자는데, 어찌나 태국을 좋아하는지 (참고로 생긴 것도 태국 사람을 닮음) 검사를 해보면 태국 DNA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N번째 태국행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 그러면 아들과 둘이 가는 건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다.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냐고. 남편은 오케이 했고, 감자도 웬일로 아빠랑 둘이 방콕을 가겠다고 했다. (학교를 빠지는 게 솔깃했던 모양이다.) 사실 두 사람 간의 소통에 약간 착오가 있었는데, 감자의 ‘가볼까?’(갈까 말까 고민 중이라는 뜻)를 남편이 ‘가볼까!’(간다는 확정으로)로 곡해해 들은 것. 실행력 만렙 인간은 그날로 방콕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버렸고, 그렇게 얼레벌레 두 남자의 4박 5일 여행이 성사됐다.

세상에 마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나는 여행 일정 브리핑을 들으며 삐죽거리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동시에 막상 간다고 하니 살짝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둘이서 국내여행은 몇 번 가봤지만, 해외는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감자는 매번 더운 나라에서 물놀이를 많이 하다 보면 열이 났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뭐, 둘이 알아서 잘 다녀오겠지 하는 마음 반, 진짜 괜찮을까 하는 마음 반이 교차했다. 그러던 중 여행 일주일 전, 남편은 위의 문자를 보내왔다. ^^;

여차여차하여 시간이 흘러, 여행 당일. 아침 비행기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공항으로 가야 했다. 그래도 배웅은 해야겠다 싶어 나도 일어나 짐 챙기는 걸 도와주는데, 감자의 얼굴이 잔뜩 긴장해 있었다.

“막상 둘이 가려니까 긴장이 되는데요?”


녀석. 나는 걱정 말라며 ‘아빠 사용 설명서’를 알려줬다. 아빠는 엄마랑 다르니까, 말 안 하면 모른다고. 뭘 먹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이야기하라고. 그러곤 짐을 들려서 두 사람을 후루룩 보내버렸다. 디디링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하… 어찌나 행복하던지.

 


혼자 있어서 온전한 하루들
그래서 4박 5일 동안 난 뭘 했냐고? 거창한 걸 했다고 자랑하고 싶지만, 사실 거의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으니까. 술을 마셔서 흥청망청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싫었고, 어딜 갈까 했는데 그것도 귀찮았고, 그저 ‘혼자’ 집에 있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결혼 후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 집에 있어 본 건 처음이었다. 그저 혼자 있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깨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집안일을 잔뜩 미뤄두고,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실컷 보고,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었다. 미루고 미뤄두던 스케일링을 하고, 간헐적으로 아프던 마지막 사랑니를 뽑았다. 약국에서 일하고,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친구를 만났다.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그러나 ‘혼자 있어서 온전한’ 하루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점을 꼽자면 좀 웃긴 이야기긴 한데, 옷을 안 입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집안에서 유일한 여성인 나는 (그래 봤자 총 3명 중 한 명이지만) 언제나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나와야 했다. (자기들은 맨날 발가벗고 나오면서! 으악 내 눈!) 로션을 바르며 ‘좀 말리고 옷을 입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씻고 몸이 마를 때까지 벗고 있다가 대충 편한 옷을 걸치고 집을 돌아다니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역시 행복은 사소한 것에 있다니까.

그렇다면 두 남자의 여행은 어떠했을까. 4박 5일 동안 보낸 카카오톡, 갔다 와서 진행된 인터뷰, 내 느낌, 인스타 염탐 등으로 재구성한 두 남자의 여행 이야기, 시이작!

 


두 남자의 4박 5일 여행기
일단 문제없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쉽게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대기하면서 다정하게 ‘얼굴을 맞댄’ 셀카 사진을 보내왔는데, 감자의 표정이 매우 밝았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됐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난 뒤 핸드폰을 덮고 길게 낮잠을 잤다. 늦게 일어나 점심을 먹고 노닥거리다 보니,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남편은 ‘기록중독자’답게 ‘WELCOME TO THAILAND’ 앞에서 찍은 사진도 보내왔다. 역시 감자의 표정은 밝았다. 비행기 안에서도 편하게 갔다고 했다. 짜식, 다년간 수련한 결과 비행기를 잘 타는 인간이 된 듯하다. (6개월에 첫 해외여행을 갔었으니 말이다.) 감자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찜통’이라고 표현했지만, 한여름 우기의 태국 상황을 잘 아는 남편은 모든 숙소를 대형 쇼핑몰과 연결된 곳으로 잡았다. 먹는 것, 쇼핑 등 모든 걸 한곳에서 해결하려는 속셈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소울 푸드인 ‘푸팟퐁 커리’를 먹으러 갔다. 게를 튀겨 만든 카레 요리인데, 태국에서는 게 껍데기가 부드러워 통째로 먹을 수 있어 즐겨 먹는다. 그런데 감자는 낯선 음식을 절대 먹지 않으며, 특히 갑각류는 이상하게 생겼다며 싫어했다. 예상대로 감자는 카레로 범벅된 낯선 요리를 먹지 않고 대신 오징어 튀김을 시켰다. 첫날에는 호텔에서 쉬려 비싼 호텔을 예약했는데, 여기서 첫 번째 예상이 빗나갔다. 방콕에서 가장 좋다는(?) 수영장에 감자가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감자는 물에 젖는 게 번거롭고 귀찮다며 방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여름이면 물에 빠져 살다시피 했고, 너무 많이 놀다 열이 나곤 했던 아이인데 말이다. 내가 있었다면 살짝 꼬셔서 몸만이라도 담그게 했을 텐데, 그런 잔재주는 없었는지 혼자서 수영했다고 한다. (훗, 왠지 고소하다 ㅋㅋ) 하긴 나도 수영을 싫어해서 하와이에서 10일간 여행했을 때도 딱 한 번만 물에 들어갔으니, 역시 내 아들이다. 그런데 둘이서 물놀이하러 가야 자유가 생길 텐데, 이거 큰일인데?

그렇게 첫날을 보내고 둘째 날. 시내 관광을 했는데, ‘타는 걸’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남편은 머리를 썼다. 지하철을 타고 수상버스를 타며 시내를 관광하는 일정을 잡았다. 다른 나라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우리나라와 다른 점을 발견하며 비교하는 걸 좋아하는 아들이 재미있어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게다가 400원짜리 수상버스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한 번 타고 나서 왜 수상버스가 필요한지 물어보다가, 방콕의 심각한 ‘트래픽 잼’을 보고 이해했다고 한다. 덥지도 않고, 아들의 흥미를 고려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점은 칭찬하고 싶다.

 



셋째 날은 두 사람이 입을 모아 ‘최고의 날’이라 한 코끼리 트레킹이었다. 사실 태국에서 '코권'을 위해 타기보다는 목욕을 시켜주거나 먹이를 주는 체험 위주로 바뀌고 있다. 태국을 여러 번 갔지만 감자는 코끼리를 타본 적이 없었다. 흙탕물에서 목욕을 시키고 먹이를 주는 체험은 몇 번 했었는데 말이다. 이번에는 감자가 꼭 코끼리를 타보고 싶다고 해서 트레킹 일정을 넣었다. 겁이 많은 아이인데, 어찌 된 일인지 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작년부터 여행에서 말도 타고, 루지도 타고, 거칠게 달리는 트럭도 타며 속도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코끼리 트레킹은 10명의 단체가 함께하는 반나절 투어였는데, 두 부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커플이었다. 약간 어색했다고는 하지만 감자는 봉고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일정을 즐겼다. 수상 시장을 구경하고 코끼리 서식지로 가서 15분 정도 트레킹을 했다. 감자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쉴 새 없이 코끼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엄마, 엄마! 코끼리 타는 거 정말 재미있었어요. 코끼리 위에 안장이 있는데, 아빠랑 타고 물도 건너고 진흙탕도 지나갔어요. 마치 새로운 교통수단 같았어요.”


제법 속도가 있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며 연신 코끼리 이야기를 했다.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코끼리 이야기를 했단다.) 250밧을 주고 촌스러운 액자도 사고, 100밧을 주고 아기 코끼리와 사진도 찍어 거실에 전시(?) 중이다. 얼른 치워버려야 하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다.

넷째 날은 택시로 단독 투어를 갔다. 사파리 투어였는데, 제법 큰 동물원이었는지 오랑우탄, 돌고래, 코끼리 등의 쇼가 많았다. 가이드는 시간에 맞춰 두 부자를 여기저기로 데려다주고, 핫스팟에서 인증샷도 찍어줬다. 하지만 감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기린 먹이 주기였다. 귀여운 기린이 기다란 혀로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기린이 음식을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고 하니, 신기했나 보다.
  

아빠와 같이 다니면서 만나는 '편하지 못한 느낌'
이렇게 알찬 두 부자의 여행은 놀랍게도 별다른 문제 없이 흘러갔다.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었다면 먹는 문제 정도였다. 감자는 먹는 양이 엄청나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적이다. 좋아하는 음식을 대량으로 먹는 건데, 주로 양념이 많이 되지 않은 것들이다. 좋게 말하면 입맛이 담백한 편이고, 전통 한식파이기도 하다. 숙소에서 챙겨간 햇반, 참치, 김치 등으로 밥을 먹고 원 없이 망고를 먹었지만 부족했다. 향신료 가득한 태국 음식이 입에 잘 맞지 않아 거의 외식은 ‘튀김류’로 대신했다. 며칠간 감자튀김, 오징어 튀김 등을 먹던 감자는 매일 튀김만 먹다 보니 괌 생각이 났다고 했다. (태국에선 향신료 때문에 못 먹었지만, 괌에선 정말 먹을 게 감자튀김밖에 없다.)

드디어 두 사람이 한식당에 갔을 때, 불판에 구운 목살, 누룽지, 김치찌개 등을 마주하고 감자는 말 그대로 ‘흡입’했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은 감자는 만족했다. 이틀에 한 번은 한식당에 가야 하는데, 늦었지 뭐. 그래도 아침 조식에서 죽이나 김치 등으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음식 선정에서 엄마가 없다는 티가 팍팍 났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아빠와 같이 다니면서 만나는 ‘편하지 못한 느낌’도 좋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있으면 좋아하는 것만 쏙쏙 골라서 주게 되니까. 조금 만족스럽지 않은 식사도 하고, 수영장에 가네 마네 하며 아빠와 의견 대립도 하고, 튀김만 잔뜩 먹는 하루도 괜찮지 않을까. 엄마는 ‘나의 확장’이고 아빠는 ‘처음 만난 사회’라는 말이 있다. 조금 늦었지만, 조금씩 아빠를 통한 사회화를 경험해보게 하고 싶다.

어릴 때는 눈만 뜨면 자라나 있는 감자와 만났다. 아이가 커가면서 성장 속도는 다소 느려졌지만, 이렇게 갑자기 만나는 ‘아이의 성장’이 놀랍기도 하다. 예민하고 울보였던 아이는 어느새 발 마사지를 받다가 잠들고,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즐겁게 먹고 놀았다. 투어도 잘 따라다니고, 더위에 지치지도 않으며, 아빠에게 ‘팩폭’을 날리며 자기 의견도 똑 부러지게 말했다. 물론 내가 중간중간 보낸 카톡에 답도 안 하고, 일기 앱에 일정을 기록하라고 한 내 말도 귓등으로 들었다.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해도 시큰둥한 목소리로 보고 싶다는 말도 안 하던 아들이었다. (실제로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한 듯했다.) 그 모습에 섭섭하다기보다 오히려 뭉클했다. 그래, 이제 내가 없어도 되구나. 내가 없으면 밥도 안 먹고 귀를 잡아당기며 하루종일 울던 아이는 이제 없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많아졌다는 게 너무 대견하다.


친해지진 않았는데, 친해지고 싶어졌어!
돌아와서 제일 먼저 물어본 건 ‘재미있었어?’와 ‘아빠랑 좀 친해진 거 같아?’였는데, 감자는 ‘재미있었고, 아빠랑 친해진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남편도 오는 비행기에서 물어봤다는데, ‘자꾸 물어보지 말라’고 했단다. 남편은 조금 친해졌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똑같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둘 다 씻고 소파에 앉아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남편에게 둘이 대화라도 좀 했냐고 물으니 ‘했지, 뭐 먹을래, 어디 갈래, 이런 거’라고 답한다. ‘듀오링고 이야기도 하고 좋아하는 유튜버 이야기도 하지’ 했더니, 남편은 ‘몰라’라며 웃었다. 그래, 그게 최선이다.

그래도 남편은 꽤 만족하는 듯했다. 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파워 J’임에도 아들을 위해 널널하게 계획을 세웠고, 그것마저 어그러졌지만(수영장에도 안 가고, 음식도 안 먹고 등등) 괜찮다고 했다. 아마 나랑 같이 있었으면 짜증 냈을 텐데, 아들 앞에서는 너그러워진 모양이다. 갔다 오더니 호불호가 명확해서 친구와 같이 간 여행처럼 알차게 다니기 좋다고 했다. 괜찮은 여행 메이트라나 뭐라나. 감자 쪽도 비슷했다. 아빠와 둘이 한 여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친해지진 않았는데, 친해지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또 여행을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간단히 ‘응’ 했다. 다음에는 유럽에 가고 싶다고^^ 아빠도 좋고, 아들도 좋고, 나도 좋은, 모두가 만족한 이번 여행. 이만하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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