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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이가 태어나던 날

by 북드라망 2024. 8. 12.

아이가 태어나던 날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절개도 없이 그냥 아이를 낳은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다. 아이가 빨리 나오지 않아도 촉진제를 놓지 않아, 종일 진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엄마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산원에서 진행하는 엄마 교육도 듣고, 준비하던 중. 아뿔싸. 내가 딱 출산 예정인 그 주에 조산사가 스위스에 학회 출장을 가신다는 게 아닌가. 어머나! 왜!! 하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출산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병원은 자연주의 출산법이라고 부르는, 르미에르 분만을 한다는 병원이었다. 대기실이 따로 없이 원룸처럼 생긴 공간에 침대 하나와 의자 등이 간단하게 꾸며져 있었고, 거기서 출산까지 같이 진행했다. 엄마 집에 있을 법한 친근한 이불이 있고, 베개도 같이 놓여있었는데, 출산할 때 조도를 낮춰주고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점점 진통이 강해지자 무서웠지만, 그 순간에 네팔 안나푸르나에 올랐던 기억이 났다. 내가 무모하게 히말라야산맥을 장비도 없이 올랐을 때 느낀 건, 아름다운 자연도, 밤이 되면 쏟아지듯 떨어지는 별도 아니었다. ‘모든 고통은 끝난다.’라는 진리. 다리가 터질 듯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던 그 날의 등산이 이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고통스러워하자, 간호사가 와서 무통 주사를 맞겠냐고 물어봤다. ‘당연하죠!’ 나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을 생각까지 했으면서도, 그 순간에는 진통을 쌩으로 감당할만한 배짱이 생기지 않았다. 척추로 약이 스르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온몸에 약 기운이 돌았다. 아! 이게 바로 무통 천국이구나.

 

 “선생님! 이제 정말 나올 거 같아요. 아파요!”


무통을 맞았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약을 한 번 더 넣었다. 나는 이 순간을 내내 후회했다. 조금만 더 참을걸…. 약이 너무 세서 하반신이 얼얼해진 탓에 내가 출산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아이가 언제 나오는지 느낄 새도 없이 간호사가 위에서 배를 눌러대고, 힘을 주라는 박자에 맞춰 온 힘을 다할 뿐이었다. 자다가 불려 나와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멍한 얼굴로 아이를 받은 의사 선생님이 내 배 위에 아이를 올려주었다. 시커멓고 쭈글쭈글한 얼굴이 보였다. 어머, 너무 못생겼잖아? 내가 다른 것도 아닌 사람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실감이 안 갔다. 정말 내 배에서 나온 게 맞아? 옆에서 남편이 손을 떨며 탯줄을 자르는 모습이 보였다. 걱정과는 달리 나는 병원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에 아이를 낳았다. 어리둥절할 속도였다. 그렇게 나는 아이와 만났다.
  



몇 년이 지나고 다시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다. 이번에는 출산이 아닌 자폐 검사를 위해서 말이다. 어릴 때부터 몇 번의 검사를 받았고, 개인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지만, 큰 병원에도 가봐야지 싶어서 몇 달을 기다려서 온 대학병원이었다. 기본적인 풀베터리 검사에는 웩슬러 지능검사와 사회 성숙도 검사 등이 포함되어있었고, 거기에 K-CARS라는 자폐 평정척도 검사를 추가했다. 아이가 임상심리사와 풀베터리 검사를 받고 있을 때, 나 역시도 대기실에 앉아 기나긴 설문지를 작성했다. 몇십 장은 될 거 같은 길고 긴 문항들은 언제 옹알이를 시작했는지, 언제 걷기 시작했는지부터 시작해서 공을 던지는지, 젓가락질하는지 등 수많은 물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몇 시간은 걸릴 거 같았다.

나는 길고 긴 문항에 답을 하면서 아이가 태어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수만 번 되새겨본 순간이었다. 그 생생한 기억, 나는 많은 날 동안 기억을 조각조각 잘라서 떠올렸다.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을까 하고.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아챈 부모들은 대부분 원인을 자기에게서 먼저 찾는다. 내가 임신 기간에 뭘 잘못 먹지는 않았을까, 엽산이나 철분이 부족하지는 않았나, 아니면 유전의 문제일까 등 답이 없는 수만 가지 문제를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계획 임신을 했기 때문에 음주나 약물을 한 적은 없었다.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하려고 노력했다. 약간 우울하긴 했지만 ‘그런 거로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출산할 때 무통 주사를 맞지 말 걸 그랬나? 아니 출산하는 날 수간호사가 너무 불친절했어. 아이가 나오는데 기다려주지 않고 위에서 배를 막 눌렀다고. 아니야 근데 제일 큰 문제는 태어나자마자 내 동의도 없이 B형 간염 주사를 맞힌 거였어. 태어난 당일에 예방주사라니…. 조금 더 자연적으로 아기를 낳을 걸 그랬어. 아니 조산사에게 아이를 낳으려고 했는데, 마침 그 주에 그 조산사가 스위스로 학회 발표를 갔잖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생각. 한동안은 그랬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잠을 못 잤다. 어디에서 문제였을까 하고.

아이가 다른 걸 처음 안 순간 같은 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는 정말 까다로웠다. 많이 울었고, 아침에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 자기 직전까지 울었다. 엄마 껌딱지라 내 품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고, 잠들기를 어려워 했으며, 배변을 너무 할 정도로 늦게 가렸다. 거기에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클 정도로 키가 큰 우량아였다.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거웠지만, 꼭 그게 나만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이 육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도움 없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드니까.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건 뭔가 잘못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늘 일반적인 사람들과 주파수가 달랐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은 쉽게 하는데, 아주 쉬운 일들을 못 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너 살이 되자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했지만, 대화가 잘 안 되었다. 그때 빠져있던 퍼즐은 기가 막히게 맞추는데 젓가락질은 지금까지도 잘하지 못한다. 수학을 공부한다 쳐도 분수의 개념이나 도형 문제 같은 건 단번에 이해했다. 하지만 연산을 시작하고 짝꿍 수의 개념을 가르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3+7, 4+6 같이 더해서 10이 되는 개념을 이해해야 받아 올림이 가능한데 이게 정말 안되는 거다.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엄마가 키덜트라 아이랑 같이 로봇 놀이도 하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고 싶었는데 아이는 책만 봤다. 책도 도저히 읽고 있는지 아닌지 모를, 사전류를 좋아해서 매일매일 똑같은 과학사전이나 국어사전을 봤다. 정말 이 아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각종 발달 검사와 지능 검사 등을 하게 되었다.

 
다시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던 그 날의 기억으로 돌아가 본다. 삼성서울병원은 소란하고, 예약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진료가 길어져서 대기하는 인파로 북적였다.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아이를 앉히기 위해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뭐라고 이야기하실까. 사실 검사 전 상담에서 “누가 봐도 아스퍼거로 보여 검사할 필요가 없지만.”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대학병원에서 진단받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예상대로 아이는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 아스퍼거, ADHD를 진단받았다. 그러면서 지능이 아주 높은데, 의외로 전문직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앞으로는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게 될까를 생각했다. 통통한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퍼서 말랑거리는 볼로 밀어 넣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본다. 괜찮다가도 이런 날이면 마음이 또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리고 얼마 뒤, 엄마의 전화가 왔다.

 

“엄마가 얼마 전에 사주를 보러 갔거든.”
“응 그래? 뭐라고 하든?”
“첫마디가 지안이가 자폐냐고 하더라?”
“응? 그런 거도 나와?”
“애가 좀 아프네…. 하면서 그러더라고. 그런데 18살이 되면 다 좋아진대.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별로 티 안 나게 잘 클거래. 애가 똑똑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네.”


 
나도 사주를 공부한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운명은 어느 정도의 틀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주의 어떤 부분에서 장애를 볼 수 있을지 그런 것을 배운 적은 없다. 나는 엄마에게 나도 그분에게 사주를 보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나이가 많아서 더 사주를 보지 않는데, 아는 사람 소개를 겨우 한 번 본 거란다. 우리 가족의 사주는 좋으니 다시 볼 필요도 없다고 했다며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왠지 예전에 “아이에게 복이 많네.” 같은 이야기를 하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던 스님 같은 느낌으로 한 할머니의 위로를 들었다. 18살이 되면 괜찮아진대. 어느 근거인지도 모를. 도달하기 전까지 확인할 길도 없는 그 한마디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 정말로 내가 잘못한 게 없을지도 몰라. 모든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그 위치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라. 아이를 키우는 고비고비마다 힘든 순간들을 마주하지만, 단순하게도 나는 이런 작은 위로들을 모아서 살고 있다.

 

 

글_모로(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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