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editor’s memo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이 있다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수월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기준’의 이쪽 편과 저쪽 편을 꽤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된 것인데, 아마도 이게 ‘나이 먹으면 보수적으로 변하지’ 하는 말의 진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보자면 ‘니체’는 중년에게도 꽤나 위력적이다. ‘기준’의 이쪽저쪽이 아니라, ‘기준’ 자체를 허무는 데 능한 사람이니까. 기준을 세워놓고, 한쪽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기 쉬운 청춘에게라면 그 위력이 더욱 배가될지도 모르겠다.
밑줄긋기
평범, 그것은 나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나의 ‘평범’은 ‘평균’과는 무관한 것이다. 사실 나는 평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평균적 삶’을 거부함으로써 나의 평범을 구축했다. 미래를 불안해하고, 남들만큼 갖지 못함에 안타까워하고, 사회적 척도에 부합하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평균적 삶의 태도’에 정면으로 저항하며 ‘자기만의 개성’ 따위를 과시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한쪽에는 평균적인 삶의 태도가, 다른 한쪽에는 평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태도가 있다. 이러한 두 태도 모두는 자기 앞에 놓인 것이 별 볼일 없는 ‘보통의 삶’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한쪽은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감으로써, 반대쪽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정건화, 『청년, 니체를 만나다』, 「‘평범’의 냉소주의에 맞서」, 북드라망, 39쪽)
나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배움의 역량’이다. ‘될놈될’이라는 진부한 명제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모든 곳에서 ‘주어진 것’만을 재발견하면서 배움의 기회, 즉 변신의 기회를 걷어차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늘 나 자신을 중간 정도에 위치시키기를 좋아했다. ‘이 정도면 봐줄 만하다’는 수동적 긍정을 되풀이하면서. 그러나 이는 단지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나를 고수하겠다는 오만과 무능력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같은 책, 「천재, 초친적으로 배우는 자들」, 99쪽)
우리는 자존심이 세다. 우리의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느낄 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낄 때 분개한다. 우리가 착취에 저항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소중한 나’에 대한 가혹하고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것이며, 우리의 높은 자존심은 침해되어선 안 될 신성한 ‘권리’에 관한 것이다. 좋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우리가 수치스러운 착취와 노예 상태의 반대편에 놓고 동경하는 것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우수한 복지를 제공하는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욕망이야말로 우리의 노예성을 증명한다. 우리는 그저 가장 좋은 조건에 자신을 팔고 싶은 것이다. 기왕이면 초가집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궁궐의 노예가 되자, 행복하고 부유하고 즐거운 노예가 되자! 100년이 넘도록 그칠 줄을 모르는 니체의 탄식. “아!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나사가 되는 대가 하나의 값을 갖게 되다니!” (같은 책, 「내 자유는 내가 알아서 만들어 볼게요」,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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