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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토용의 서경리뷰] 주공, 왕인가 신하인가

by 북드라망 2026. 3. 4.

주공, 왕인가 신하인가

 

토용(문탁 네트워크)

 

주공의 등장
꽤 오래전 ‘성균관스캔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한복 입고 찍은 청춘로맨스물이었는데, 그 드라마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따로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금등지사金縢之詞’를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그게 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기 때문이다. 금등지사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남긴 글로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후회하는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영조가 바로 공개하지 않고 후세에 남길 것을 명하면서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문서를 공개하면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 복권을 했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정조와 관련된 책, 영화, 드라마에서는 픽션까지 더해져 금등지사가 자주 다뤄지고 있다.

금등지사는 억울한 일을 글로 남겨 후세에 진실을 알리고 오해를 푼다는 뜻을 가진다. 금등지사가 이러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서경』 <금등金縢>편에 등장하는 주공周公과 연관이 있다. 금등은 ‘금등지궤金縢之匱’를 말하는데, 쇠사슬로 묶어 봉함한 상자이다. 보통 주나라 왕실에서는 점을 친 후 그 축문을 상자에 넣고, 그 상자를 쇠사슬로 묶어 보관했다. 그렇다면 <금등>에 등장하는 이 상자에는 어떤 문서가 들어있었던 것일까? 바로 주공의 기도문이다. 주공은 무슨 일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드렸을까? 그리고 왜 상자에 넣어 봉인을 했을까? 어쨌든 드디어 <금등>에서 『서경』의 마지막 챕터인 「주서周書」의 주인공, 공자의 롤모델 주공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주공은 주나라 문물제도의 창시자로 중국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중국 문명은 그가 만든 기틀 위에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공은 요순우탕문무주공의 고대 성인 계보에서 성왕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성인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다. 그에 걸맞게 『서경』 「주서」에 있는 32편의 글 중 13편이 주공이 지었거나 주공과 관련된 글이다.

주공은 이름이 단旦으로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을 도와 상나라 정벌에 힘을 썼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공은 효성스러웠으며 성격이 돈후하고 어질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나서 무왕을 도와 나라의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주공은 노나라 제후로 봉해졌지만 가지 않고 도성에 남아 무왕을 보좌했다. 그리고 무왕이 일찍 죽자 어린 조카 성왕을 대신해 7년 동안 섭정했다.

 


  
주공의 기도, 성왕의 눈물
무왕이 상나라 정벌 2년 만에 중병을 앓게 된다. 신하 강태공과 동생 소공이 왕을 위해 점을 치겠다고 하지만 주공은 반대한다. 종묘에서 점을 치게 되면 공경 대신이 모두 참석하는 큰 의례가 된다. 이렇게 되면 무왕이 위중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민심이 동요할 수가 있다. 대신 주공은 특별히 따로 제단을 만들어 선왕들에게 기도를 드린다. “선왕들은 무왕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무왕 대신 저를 데려가십시오. 저는 선왕들에게 순종하며 재능이 많아 선왕들을 더 잘 모실 수 있습니다.” 주공의 근심은 상나라를 정벌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천하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무왕이 죽는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무왕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기도 이후 세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니 모두 길하다고 나왔다. 주공은 이 기도문을 금등 상자 안에 보관했고, 다음 날 무왕의 병이 나았다.

그러나 무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세상을 떠난다. 주공은 나이어린 성왕을 두고 제후들이 모반을 할까 걱정하여 나랏일을 도맡아 한다. 그러나 주공의 섭정에 대해 관숙 등 다른 형제들이 주공을 의심한다. 그들은 “주공은 성왕에게 이롭지 않은 존재”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성왕의 마음을 흔든다. 주공은 이런 모함을 피해 낙읍으로 가서 2년을 보낸다. 아마도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왕실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주공은 낙읍에 머무는 동안 ‘치효鴟鴞’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올빼미야 올빼미야 이미 내 새끼를 잡아갔으니 내 집을 부수지 말지어다. 사랑하고 독실히 하여 자식을 기르느라 매우 근심하였노라. (…) 내 깃이 모지라지며 내 꼬리가 망가졌는데도 내 둥지가 위태롭고 위태롭거늘 비바람이 뒤흔드는지라 내 울부짖는 소리를 급히 하노라.”


치효는 주 왕실의 적이다. 새끼는 성왕을, 비바람 속에 울부짖는 늙은 새는 주공 자신이다. 늙은 새는 둥지(주 왕실)을 위해 애쓰지만 원망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고 있음을 비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왕의 의심은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주나라에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가을 곡식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태풍이 불어 곡식이 쓰러지고 나무뿌리가 뽑힌다. 고대에는 보통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점을 쳤다. 성왕은 점을 치기 위해 금등 상자를 열었다가 우연히 무왕의 죽음을 대신하겠다는 주공의 기도문을 읽게 된다. 그제야 주공의 진심을 안 성왕은 눈물을 흘리며 오해를 푼다. 이후 성왕이 교외로 직접 나가 주공을 맞이하여 돌아오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쓰러진 곡식이 다시 일어서고, 마침내 풍년이 든다.

<금등>은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주공은 신하로서 무왕에 대한 극진한 충성심을 보여주고, 섭정자로서 겸손함과 성왕에 대한 진심을 드러낸다.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주공이 있을 뿐이다. 금등의 공개로 주공은 권력찬탈의 의심을 불식시킨다. <금등>은 어떤 정치적 언설 없이도 주공의 기도와 성왕의 눈물만으로 주공을 성인의 이미지로 만들고 있다. 주공의 정치적 위상을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주공의 강렬한 등장이다.


형제들의 반란을 진압하다
무왕은 정벌 후 상나라 근거지였던 곳에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의 아들 무경을 봉해주고 조상의 제사를 잇게 한다. 그리고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 곽숙을 그 주변 지역에 봉해주고 무경과 상나라 유민을 감시하게 했다. 이것이 삼감三監이다.

 

무왕이 정확하게 상나라 정벌 후 몇 년 만에 죽었는지는 모른다. 『사기』는 2년, 『회남자』는 3년이라고 하는 등 기록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무왕의 아들 성왕이 너무 어려서 주공이 섭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상나라 풍습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승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주공이 섭정을 하자 왕위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다. 특히 관숙은 주공의 형으로 자신이 왕위를 넘봤기 때문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공을 비방했다. 앞서 <금등>에서 성왕은 2년 만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범인들의 정체를 알게 된다. 성왕이 주공에 대한 오해를 풀고 호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는 말을 들은 관숙 등은 두려워하여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성왕은 주공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을 내린다.

<대고大誥>는 주공이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가기 전 각국의 제후와 대신들에게 발표한 글이다. 처음 제후들은 반란군 토벌에 반대했다. “전쟁은 어렵고 중대한 일이며, 백성들이 안정하지 못한 원인은 천자가 정치를 잘못해서이다.” 무왕의 아들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해서 화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공은 삼감의 반란을 왜 정벌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근거를 밝혀 그들을 설득한다. 주공은 천명으로 돌파한다. “정벌은 곧 천명이며 천명은 어길 수 없다. 나는 무왕이 도모하시던 일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점조차 길하다.” <대고>의 내용은 꽤 긴 편인데 그만큼 엄중한 상황에 반대 여론이 많았음을 반증한다. 주나라 건국 초, 나라의 기틀은 튼튼하지 못했고 상나라의 잔존세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더군다나 거기에 주 왕실의 형제들이 앞장서 모반을 했으니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정벌을 반대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주공은 무경,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귀양을 보냈다. 상나라 현인 미자를 송 땅에 봉해주어 무경 대신 탕임금의 제사를 받들게 했고, 위 땅에 동생 강숙을 봉해 주었다. 이로써 상나라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곳을 주나라가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이 또한 주나라를 반석에 올려놓기 위한 주공의 노력과 역할이 부각된 사건이었다.

주공의 반란 정벌에 대해서는 그 시기에 대해 이견이 많다. 『서경』의 순서대로 하면 반란 정벌은 유언비어를 피해 낙읍에서 거주하던 주공이 돌아온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한나라 학자 공안국은 관숙 등이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하러 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서경』의 주석자 채침은 주공의 동생들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주공이 대번에 군대를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정벌을 청했어도 성왕이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주공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주공이 상나라 세력권이었던 동쪽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후에야 주나라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낙읍 건설과 주공의 진심
무왕은 상나라 정벌 후 낙읍(현 낙양)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다. 기존의 수도 호경은 서쪽에 있기 때문에 동쪽 중원의 제후국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선 새로운 도시가 필요했다. 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주공은 낙읍에 호경을 뒷받침할 행정수도 성주成周를 건설한다. 미리 새로운 도읍지를 둘러 본 주공은 낙읍의 위치에 만족했다. 성왕이 천하의 중앙에 자리한 낙읍에서 천명을 잃지 않도록 나라를 잘 다스리기를 희망했다. 이에 낙읍이 완성된 후 주공은 성왕에게 천도를 제안하고 자신은 자리에서 물러나 쉬겠다는 뜻을 밝힌다. 섭정자의 지위에서 내려와 성왕에게 왕권을 완전히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왕은 낙읍에서 제사만 지내고 다시 호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주공은 남겨서 낙읍을 다스리게 한다.

성왕은 왜 천도를 거부했을까? 사실 천도는 쉽지 않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 때문에 왕 혼자만의 결심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상나라 왕 반경도 수해 때문에 도읍을 은殷으로 옮기려 할 때 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성왕의 경우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호경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버리고 새 도읍으로의 이주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왕 자신이 더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질적 최고 권력자였던 주공이 만든 낙읍에, 자신의 지지기반이 없는 곳에 성왕이 이주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읍은 주공의 정치적 근거지이다. 성왕은 주공을 낙읍에 남도록 명하면서 문왕과 무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다스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동쪽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주공이 민심을 두텁게 얻었음을 의미한다. 성왕이 낙읍에서 정치를 한다면 주공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왕은 그나마 자신의 권력기반이 있는 호경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 여겼지 않았을까? 아울러 주공을 낙읍에 있게 함으로써 주공 세력과의 단절도 도모했을 것이다.

<낙고洛誥>는 주공과 성왕의 권력투쟁을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유가경전에서 보이는 정치의 이상적 형태는 ‘성인 군주와 어진 재상’이다. 그러나 성왕과 주공의 관계는 다르다. 주공은 재상이 아니라 섭정자였다. 대개 주공의 섭정에 대해 총재의 자리에서 백관을 통솔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주공은 어린 성왕에게서 정권을 빼앗아도 이상하지 않은 최고 권력자였다. 심지어 왕의 숙부였다. 조선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2000년 전 고대 국가에서 섭정자가 권력을 뺏기는 훨씬 쉬웠을 것이다. 주공이 단지 섭정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왕노릇을 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순자는 주공이 천자 자리에 올랐다가 성왕에게 돌려주었다고 말한다. 천자의 자리는 섭정을 할 수 없고, 정세 변화에 따라 주공이 왕이 되었다가 다시 신하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나는 『서경』을 읽기 전 주공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아무리 공자가 포장을 잘했어도 왕노릇 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주공이 찬탈의 기회도 엿보았지 않았을까 의심도 했다. 그러나 『서경』에서 만난 주공은 섭정자의 위치에서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다지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주공은 봉건이라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구축하고 온갖 사회제도를 정비했다. 후대 중국 정치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주례』가 주공의 저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실제 주공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만큼 주공이 끼친 영향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을 한탄할 정도로 주공을 흠모하고 그의 도를 추종했다. 맹자 또한 주공을 성인이라고 칭송했다. 나 역시 지금은 공자와 맹자의 눈으로 주공을 본다. 다른 사람들도 『서경』을 읽는다면 주공의 성인다운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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