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의 두 얼굴
토용(문탁 네트워크)
문왕을 찾아라
유가 경전을 읽다보면 ‘요순우탕문무주공’을 자주 보게 된다. 처음에는 ‘태정태세문단세’도 아니고 “이건 또 뭐지?” 싶었다. 이것은 주자가 만들어놓은 도의 전승 계보이다. 그리고 『서경』의 주인공들이며, 주공을 제외하고 고대 성왕이라 칭송받는 사람들이다. ‘서경리뷰’는 요순시대를 거쳐 하나라와 상나라를 지나 이제 주나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나라를 정벌한 왕은 무왕이다. 그러나 그 전에 무왕의 길을 닦아 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무왕의 아버지 문왕이다. 주나라 건국에 문왕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문왕에 관한 언급은 유가 관련 책이라면 빠지지 않고 나온다. 더구나 『서경』은 요순과 하상주 삼대의 기록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문왕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나라 기록인 「주서」의 시작은 무왕부터이다. 무왕이 실제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를 건국한 왕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왕에 대한 기록은 「상서」 뒷부분에 있는 <서백감려西伯戡黎> 딱 한 편에 보인다. 그마저도 문왕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서백감려>는 ‘서백이 려를 쳐서 이겼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백은 문왕을 지칭한다. 상나라 때는 문왕을 서백이라 불렀고, 문왕은 후에 추존된 명칭이다. 편명을 보면 문왕이 려를 정벌하게 된 전후사정의 기록과 함께 문왕의 훈계 내용도 들어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우선 서백이라는 칭호를 보자. 상나라는 자신의 중심통치 지역을 벗어난 외곽의 다른 종족들과 관계를 맺고 교류를 했다. 이 정치체들을 방方이라 하고 그 지도자를 방백方伯이라고 불렀다. 주나라도 상나라 정벌 이전에는 주방으로서 서쪽에 있던 여러 방들 중 하나였다. 세력이 점차 커지자 문왕은 상나라로부터 서백의 칭호를 받는다. 서백은 ‘서쪽 지역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주나라가 서쪽에 있던 여러 방들을 대표하는 중심세력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귀방, 인방, 토방, 강방, 공방 등이 있었는데, 갑골문에는 공방에 대해 상나라가 빈번하게 군사원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강방은 상나라가 자주 제사에 인간희생으로 이용했던 전쟁포로였다. 이들 방 정치체들은 상나라와 밀접한 접촉을 하면서도 상나라의 군사 원정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상나라와 방은 관계가 유동적이어서 방이 상나라에 흡수되거나 상나라의 제후가 반기를 들고 방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서백은 상나라의 삼공이 된다. 삼공은 천자를 보좌하는 최고 관직이다. 그런데 당시 상나라의 천자는 폭군으로 유명한 주紂였다. 삼공 중 구후와 악후가 주왕의 포악함에 억울하게 죽자 서백이 이 소식을 듣고 몰래 탄식한 일이 있었다. 숭나라의 제후가 이를 알고 주왕에게 고자질을 하여 서백은 유리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자 신하 굉요 등이 미녀와 명마 및 기이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주왕에게 바치고 서백을 풀어달라 요청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서백은 낙수 서쪽의 땅을 바치고, 주왕은 활, 화살, 큰 도끼를 내려 주면서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려는 이렇게 얻은 자격으로 정벌하게 된 것이다.
<서백감려>는 문왕의 세력이 날로 강해질 것을 경계하는 상나라의 신하 조이祖伊의 간언이 주요 내용이다. 조이는 주나라의 덕이 날로 성해지는데, 즉 바꿔 말하면 주나라의 국력이 날로 강성해지는데 왕은 악행만 일삼고 있으니 이러다가 상나라는 망한다는 걱정을 늘어놓는다. “서백이 려를 이겼다. 하늘이 상나라의 운명을 끊을 것이다. 왕이 음탕하게 놀아서 천명이 끊긴 것이다. 민심은 하늘이 상나라에 엄한 벌을 내려주길 바라고, 새로운 왕이 오기를 기다린다.” 주왕에게 간언이 먹힐 리가 없다. 오히려 주왕은 “내게 천명이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큰소리친다. 조이는 상나라의 멸망을 예감한다.
<서백감려>의 내용은 간단하다. 몇 줄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주인공인 문왕은 직접 등장하지 않는데도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낸다. 문왕의 덕이 주왕의 악행과 대비되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천명의 주인이 바뀔 것을 보여주는 예고편 같다. 유가 경전인 『서경』의 흐름상 당연하다. 그럼에도 문왕의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없는 것은 좀 의아하다. 『서경』에 없는 문왕의 흔적을 찾아보자.

천명을 향한 삼대의 빌드업
주나라 역사에 대한 기록은 『사기』와 『시경』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시경』에는 주나라 초기 중요 인물과 사건에 대해 읊은 시가 많이 있다. 이를테면 시조 후직의 증손 공유가 빈땅으로 이주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 일과 문왕의 할아버지 고공단보가 기산 아래로 옮기는 과정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대부분 이들을 찬미하는 내용이다.
기원전 12세기 후반 고공단보가 빈을 떠나 기산 아래로 이주한 것은 융적의 침입 때문이었다. 융적은 재물을 주고 달래도 계속 쳐들어왔다. 고공단보는 융적이 원하는 것이 빈땅과 사람들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빈에 살던 백성들은 인인仁人을 놓쳐서는 안 된다며 고공단보를 따라갔고, 이웃나라 백성들도 고공단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왔다. 기산 아래는 상나라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었다. 따라서 주나라는 이때부터 동쪽의 상나라와 밀접한 접촉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고공단보는 후에 태왕으로 추존된다. 아내는 태강이고 세 아들 태백, 중옹, 계력을 낳았다. 그런데 고공단보는 손자인 창(문왕)이 태어날 때 성스러운 징조가 있었다며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문제는 창의 아버지 계력이 셋째 아들이었다는 것. 태백과 중옹은 고공단보의 심중을 헤아려 형만으로 달아남으로써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이에 주나라의 왕위는 계력(왕계로 추존)에서 문왕으로 전해진다.
공자는 태백에 대해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했으니 지극한 덕이 있다고 논평했다. 물론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있다. 태백이 양보한 것이 아니라 쫓겨났다는 설도 있고, 태백이 상나라 인신공양제사에 쓰일 포로를 잡는 것에 반대해서 떠났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또 태백과 중옹이 오 땅에 있었다는 것은 주나라가 남쪽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력차이가 나는 상나라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상나라와 비교적 관계가 적은 지역부터 공략했다는 것이다.
고공단보→계력→문왕 이렇게 삼대의 기간 동안 주나라는 착실하게 국력을 키워간다. 특히 주나라가 상나라의 대항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 바탕에는 문왕의 역할이 가장 컸다. 『사기』에 따르면 문왕은 “후덕하고 인자하며 나이 든 사람들을 공경하고 어린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다. 어진 사람에게는 예의로써 자신을 낮추었는데, 한낮에는 식사할 겨를도 없이 선비들을 대접했다.” 문왕의 덕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가 되었다. 고죽사람 백이, 숙제는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귀의했다. 문왕의 오른팔 강태공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서백이 선을 행한다는 명성에 제후들이 찾아와 공정한 판결을 청했을 정도였다.
문왕은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문왕이 정자와 연못을 만들 때 백성들이 자기 일처럼 여기고 달려와서 짓는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과장이 지나치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만큼 문왕이 백성들에게 어떤 왕인지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왕을 위한 일에 즐거워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문왕도 즐거울 수 있었다.
문왕은 우, 예를 복속하고 견융족, 밀수, 기국을 정벌한다. <서백감려>에서 조이가 간언을 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문왕은 약 50년간 재위에 있었다.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여 제후들 대부분이 주나라에 복속했다. 훗날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할 때 모여든 제후가 팔백 명이라고 한다. 모두 문왕이 만들어놓은 우호세력인 셈이다. 공자는 문왕에 대해 “천하를 삼분하여 그 둘을 소유하시고도 복종하여 은(상)나라를 섬겼으니 문왕의 덕은 지극한 덕이라 말할 만하다”며 칭송했다. 천하의 삼분의 이를 소유했다는 것은 이미 주나라가 충분히 상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뜻이다. 실제 문왕이 죽고 3년도 지나지 않아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했다. 갑자기 무왕 때 세력이 커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문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킬 힘이 있었음에도 좀 더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나라와 주나라의 세력은 문왕 때 역전되었고 그럼에도 문왕이 신하로 자처한 선택에 공자는 ‘지극한 덕’으로 찬사를 보낸 것이다.
『중용』에서는 문왕을 무우자無憂者, 근심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문왕의 아버지는 계력이고 아들은 무왕인데 아버지와 아들 덕분에 근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왕조를 세울 기초공사를 했고, 아들은 왕조를 열었다. 문왕은 그 사이에서 전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한 셈이다. 문왕에 우호적인 제후들은 ‘서백이 천명을 받은 군주’라고 말했으니 무왕의 정벌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문왕이었다. 결국 주나라의 건국은 고공단보, 계력, 문왕 삼대가 덕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문왕의 ‘결심’이 『역경』에?
중국 고대사를 다룬 역사책에서 문왕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다. 역사적 사료로 가치가 있는 문헌이나 유물, 유적이 충분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문왕에 대한 일은 『사기』를 비롯한 유가 관련 저작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의 필터로 해석하는 문왕이 실제 역사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유가 관련 대부분의 저작들은 전국시대 말에서 한나라 초기에 정리가 되었다. 『서경』만 하더라도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문왕과 상나라 주왕의 이야기도 전해지는 과정에서 후세 사람에 의해 가공되거나 없던 내용도 들어갔을 것이다.
유가 경전에 나오는 문왕 말고 다른 시각에서 쓴 것은 없을까 찾던 중에 『상나라 정벌』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하‧상‧주의 역사를 서술한 책인데, 그 중 상나라 정벌과 연관되어 탄생한 『역경易經』 부분이 흥미로웠다. 『역경』은 운명을 예측하는 점서인 동시에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탐색하는 가장 오래된 유가 경전 중 하나이다. 『역경』의 역사에서 문왕은 중요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문왕이 괘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문왕은 복희씨가 그린 8괘를 중첩시켜 64괘로 만들고 거기에 괘사를 붙였다. 효사는 문왕이 지었다고도 하고 주공이 지었다고도 한다.
문왕은 왜 64괘를 만들고 괘사를 지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상나라 인신공양제사에 반기를 든 문왕의 ‘결심’에서 찾는다. 저자는 우선 갑골문과 고고학 유물을 토대로 광범위하게 행해진 상나라 인신공양제사의 흔적을 파헤친다. 주나라는 제사에 사용될 인간희생을 제공하며 상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애당초 고공단보의 이주에는 상나라의 은혜가 있었고, 이 때문에 주나라는 상나라의 속국이 되어 협조했다. 주나라가 한 일은 주로 주변 산지의 강족을 잡아 상나라의 제사에 쓰일 인간희생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왕의 장남이 제사의 희생양이 되는 사건이 생긴다. 문왕과 그의 아들들이 장남과 형의 인육을 먹어야만 했던 참담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문왕은 주왕의 폭정과 상나라의 인신공양제사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더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유리의 감옥에서 문왕은 상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64괘를 만들어 연구하기 시작한다. 문왕은 인간 세상의 일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상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64괘의 효로 사물의 인과관계를 연구했다. 효의 서로 다른 조합에 의해 바뀌는 규칙에 따라 정벌의 시기와 성공을 예측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 연구 결과를 상나라에 들키지 않게 은밀히 기록해야 했기에 괘사가 난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이 소설 같지만 흥미롭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갑골문과 유적, 문헌 등을 종합해서 연구한 합리적 추론임을 강조한다. 음... 과연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전문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 입장이 아니다. 그렇지만 말도 안 되는 허풍이라고 넘겨짚기에는 또 개연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주나라 초기 비어있는 역사를 저자 나름대로 재구성해서 채워 넣은 하나의 가설로 보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중국 학계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많이 궁금하다.
文王在上 문왕이 위에 계시어
於昭于天 아, 하늘에 밝게 계시니
周雖舊邦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其命維新 천명은 새롭도다
(『시경』 「대아」 <문왕>)
과연 어떤 모습이 진짜 문왕일까? 저자의 주장은 공자의 문왕에 대한 평가와 배치된다. 문왕은 지극한 덕으로 천명을 받아 아들이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주나라를 건국할 수 있게 했다. 상나라 정벌을 위해 64괘를 연구하고 피로 물든 복수의 전쟁을 계획한 문왕의 모습은, 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문왕은 게임체인저였을지도 모른다. 상제를 최고신으로 숭배하며 인신공양의 제사문화가 중심이었던 상나라와는 달리 도덕적 관념을 바탕으로 한 문명질서를 구축한 주나라 문화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이다. 문왕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건국한 주나라는 상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통치이념을 만들어낸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홍범洪範>에 있다. 따라서 다음 편은 <홍범>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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