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재상, 군주의 통치 파트너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법과 상식을 초월한 오만한 자의 망상이 빚어낸 일이었다. 대통령의 망상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한 가지 요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극우 유튜브를 거론한다. 대통령이 그런거 볼 시간에 동서양 정치철학에 관한 고전을 좀 읽었더라면.... 꿈이 너무 큰가? 하긴 유튜브 말고 술에도 빠져 있었으니 이걸 바라는 것조차 사치겠지. 문득 지난번에 썼던 폭군 걸, 주가 생각난다. 그들이 망한 이유 중엔 ‘술’도 있었다. 
탄핵 이후의 정치권을 보면 더 한숨이 나온다. 뭐 하나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 없이 ‘네 탓’ 하기만 바쁘다. 적어도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라면 한쪽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쓸데없는 유튜브 말고 『맹자』나 『서경』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고리타분하고 현실과 맞지도 않는 고대 정치철학서를 읽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정치에 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사유의 원형을 고대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서경』에서는 통치자의 덕목으로 가장 먼저 덕을 손꼽는다. 내면의 덕을 외적인 덕행으로 펼쳐내는 것이 바로 정치였다. 『서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통치자의 덕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지겨울 정도로 간언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왕 주변의 가장 가까운 신하들이었다. 만약 대통령 주변에서 꾸준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관료가 있었더라면 즉 주나라 말기 목숨 걸고 폭군에 맞서 간언을 하던 미자, 비간 같은 그런 관료가 한 두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계엄이라는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 관료제에서는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국무총리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또한 너무 큰 꿈인가? 
현대 정치는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 고대 정치처럼 군주 한 사람의 품성으로 나라의 존망이 좌지우지되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고대 정치가 반드시 군주 한 사람만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군주 옆에는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서 제대로 군주노릇을 하도록 보좌하는 신하가 있었다. 모든 관리들의 우두머리이자 군주의 정치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재상이 있었다. 순은 농사짓고 고기 잡다가 요에게 등용되어 28년 동안 일을 하다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순에게 선양받은 우도 순의 신하였다. 이런 전설상의 임금들이 아니더라도 역대 훌륭한 통치자라고 일컬어지는 성군 옆에는 현신이 항상 존재했다. 춘추전국시대 유가는 군주와 현신이 함께 다스리는 통치체제를 주장했는데, 그런 생각의 원형을 『서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치를 둘러싼 성군과 현신의 브로맨스, 그 주인공인 탕(湯)과 이윤(伊尹), 무정(武丁)과 부열(傅說)을 만나보자.

요리사 이윤 재상이 되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요, 순 시대의 이야기 「우서」, 하나라 이야기 「하서」, 상나라 시대를 다룬 「상서」, 그리고 마지막 주나라 기록인 「주서」이다. 이 중 「상서」에는 총 17편의 기록이 있다. 탕의 하 정벌에 관한 기록이 3편, 이윤과 관련된 기록이 5편, 반경이 은으로의 천도를 다룬 이야기 3편, 그리고 무정과 부열의 대화록 3편, 그 외 3편이다. 고대 국가이니만큼 기록의 한계가 있다고는 하나 「상서」의 절반이 이윤과 부열이라는 재상의 이야기이다.
상은 기원전 1554년 하를 정벌했다. 상을 건국한 탕은 이 모든 일을 이윤과 함께 했다. 즉 이윤은 개국공신이자 탕의 정치멘토였다. 이윤에 관한 일은 <이훈伊訓> <태갑太甲>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보인다. <이훈>은 이윤의 훈계라는 뜻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태갑을 훈계하는 내용이다. <태갑>은 태갑을 교육시키고 징벌한 내용이고, <함유일덕>은 이윤이 태갑과 이별하면서 전하는 당부의 말이다. 
그렇다면 이윤은 탕과 어떻게 만났을까? 이윤의 발탁과정은 기록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보통은 이윤을 유신씨의 딸이 시집을 올 때 데려온 요리사였다고 말한다. 좀 자세한 기록은 『맹자』에 보이는데 이윤을 은거중인 현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요순의 도를 즐기고 있던 이윤. 그는 의리에 맞지 않고 도가 아니면 천하를 녹봉으로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으며, 지푸라기 하나도 남에게 주거나 받지 않았다. 탕이 이러한 소문을 듣고 세 번이나 예물을 보내어 마침내 초빙에 성공했다. 
『여씨춘추』는 이윤의 탄생부터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수伊水가에 살던 이윤의 어머니가 임신중이었는데 꿈에 나타난 신의 말을 듣지 않아 속이 빈 뽕나무로 변하게 된다. 유신씨의 여자가 뽕을 따다가 속이 비어있는 뽕나무에서 갓난아이를 얻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이윤이었다. 성장한 이윤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탕이 유신씨에게 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한다. 이에 탕이 유신씨의 딸과 결혼하면서 이윤이 시종으로 따라왔다. 『맹자』를 제외하고는 이윤을 요리사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어느 책이든 이윤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탕이 적극적으로 발탁해서 재상으로 등용했다는 것은 공통이다. 
태갑은 탕의 손자다. 탕 사후 탕의 두 아들 외병과 중임이 뒤를 이었으나 둘 다 몇 년 만에 죽자 이윤은 탕의 장손인 태갑을 왕위에 올린다. 이윤은 태갑의 즉위 초 탕을 제사지낼 때 백관과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신임 천자에게 훈계를 한다. 그 내용은 탕의 덕치를 계승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라 걸이 선왕의 법도를 따르지 않아 하늘의 재앙을 받았으므로 태갑은 이를 경계로 삼아 천명을 잃어버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제후들과 관리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신임 왕에게 훈계의 말을 할 정도이니 이윤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태갑은 이윤의 훈계와는 반대로 행동했다. 이윤은 탕을 욕되게 하지 말라며 타일렀으나 효과가 없자 태갑을 내쫓는다. 탕의 묘가 있는 동땅에 궁을 짓고 살게 하면서 조부의 덕을 되새겨 잘못을 뉘우치게 했다. 3년 뒤 태갑이 바뀌자 이윤은 태갑을 다시 불러들이고 지속적으로 교육시켰다. 이윤이 물러날 때까지 강조한 것은 두 가지였다. “탕을 본받아라.” “천명은 영구불변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덕을 닦아야만 군주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다.” 
  
현신이 성군을 만든다 
<열명說命>은 상 21대 왕 무정과 재상 부열의 대화록이다. 부열은 무정을 도와서 쇠락해가던 상을 부흥시킨 일등공신으로 지혜가 뛰어나고 덕행이 탁월하여 이윤이 재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열의 발탁과정은 잘 짜여진 한 편의 각본 같다. 연출자는 물론 무정이다. 무정은 즉위 후 3년 동안 정사는 내각이 주관하게 하고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답답해하자 무정은 꿈에 상제가 자신에게 어진 신하를 보내주었다며 꿈에 본 것을 근거로 초상화를 그려서 그 사람을 찾게 했다. 어떤 사람이 부암의 건축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을 찾았는데 그가 바로 부열이었다. 무정은 그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을 대신해 정사를 주관하게 했다. 
『서경』의 스토리는 이렇게 간단하다. 그러나 그 이면을 생각하면 무정이 정치적으로 자신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가 보인다. 상나라의 왕위는 정치적 역량이 가장 강한 두 종족이 번갈아가면서 맡았다는 학설도 있다. 여기에 근거해서 생각하면 무정은 선대왕과 다른 그룹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부열을 재상으로 만드는 스토리는 이런 과정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상의 부흥을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했을 것이고, 무정은 그 일을 함께 할 든든한 지원군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무정은 부열이라는 사람을 미리 점찍어놓고 꿈의 신탁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무정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 3년은 왕권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탐색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논어』에는 무정이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의미를 묻는 제자의 질문이 있다. 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어찌 반드시 고종만 그러했겠는가! 옛 사람은 모두 그렇게 하였다. 군주가 죽으면 백관들은 삼년간 총재에게 명을 받아 자신의 직무를 처리했다.” 옛 역사에 정통한 공자였기에 A그룹에서 왕이 나오면 B그룹에서 재상을 맡았다고 하는 상나라 제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A그룹의 왕이 죽더라도 B그룹의 재상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국정운영은 가능했다. A, B그룹 모두 왕을 배출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통치력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왕의 직접 통치가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왕 혼자 하는 정치가 아닌 재상과 함께 다스려왔음을 공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열명>에는 일관되게 재상의 역할을 강조하는 부열의 말이 많다.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럽게 된다.” “임금이 비록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어도 누룩이 없으면 술이 되지 않고 소금이 없으면 간을 맞출 수 없듯이 임금도 현인의 보좌가 없으면 덕을 이룰 수 없다.” “팔다리가 있어야 사람이 되듯 어진 신하가 있어야 성군이 된다.” 신하를 팔다리(고굉)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에서 흔하게 썼던 말인 듯하다. 「우서」에도 순이 “신하는 바로 짐의 다리와 팔과 귀와 눈의 역할을 하니”라는 말을 한다. 아예 신하 대신 ‘고굉’이라고 쓴 곳도 있다. 후대에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를 가리키는 고굉지신股肱之臣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함께 하는 정치 
건국 초 나라를 안정화시키는데 공을 세운 이윤과 흔들리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데 힘을 쓴 부열의 이야기는 춘추전국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이윤과 부열이 여러 책들에서 언급이 된 것으로 볼 때 이들의 고사는 『서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덧붙여지며 구전되어 왔을 것이다. 여기서 이윤, 부열 고사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이 둘의 출신과 발탁과정 그리고 그들이 세운 업적에서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통치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고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까? 
여러 책들에서 이윤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묵자는 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이윤에게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비자는 이윤을 충신으로 평가했으며, 순자도 성신聖臣이라고 했다. 묵자와 순자 모두 어진이를 숭상하는 상현尙賢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묵자는 상현이 정치의 근본이라 했고, 순자는 유능한 재상을 뽑는 일이 군주의 중요한 직분이라고 말한다. 
『맹자』에는 이윤에 관련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맹자도 기본입장은 존현사능尊賢使能이다. 즉 현자를 높이고 재능이 있는 자에게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맹자는 군주를 보필하는 관료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관료의 자임론自任論으로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이윤이다. 이윤은 “누구를 섬긴들 군주가 아니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는가. 군주를 요순과 같은 군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며 탕에게 왔다. 이러한 이윤을 두고 맹자는 ‘성지임자聖之任者(자임한 성인)’로 평가했다. 
개국공신에다가 탕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고 거기에 관료로서의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진 이윤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확대했다. 그 절정을 천자 태갑을 추방했다가 다시 돌아오게 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왕을 바로잡기 위해 추방까지 감행한 것은 이윤 정도의 권력과 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맹자의 제자 공손추는 이렇게 질문한다. “현자가 남의 신하가 되어 그 군주가 어질지 못하면 진실로 추방할 수 있는 것입니까?” 맹자의 대답은 “이윤의 뜻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이윤의 뜻이 없으면 찬탈이다.” 탕이 죽은 후 이윤은 어렵게 얻은 천명을 잃어버릴까 근심했다. 오직 상의 번영을 위해 이윤이 해야 했던 일은 불초한 태갑을 잘 가르치고 훈계하여 천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윤은 찬탈의 비방을 무릅쓰고 3년의 시간을 기다렸다. 비록 이윤이 천자를 추방시킬 정도로 재상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지만, 민심은 그것을 찬탈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요순의 군주와 요순의 백성을 만들겠다는 자임의 신념으로 가능했다.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 대부분은 현자를 등용하여 함께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탕 사후 불안정한 왕위계승은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이윤의 사례에서 보듯 현상賢相이 불초한 후계자인 태갑을 안정적으로 계승할 수 있게 했다. 능력이 좀 떨어져도 걸, 주 같은 폭군만 아니라면 그리고 어진 재상이 있다면 나라는 크게 흔들림 없이 존속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분열과 폭력의 정치 속에서 안정을 위해 내놓은 대안이 왕과 재상의 공치共治였다. 선양은 전설 속의 아름다운 유산이 된지 오래고 탕과 무왕처럼 천명을 받았다며 정벌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믿을 것은 왕을 보필할 능력 있는 재상 뿐. 공치는 아마도 그 훌륭한 해결방법이었을 것이다. 후대 유가경전을 읽은 사대부는 요순의 천하를 만들겠다는 소임을 가졌다. 현상이 성군을 만든다는 포부는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것이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왕도정치를 꿈꿨다. 대통령 탄핵에 이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던 국무총리까지 탄핵을 하는 사태를 보며 이윤과 부열의 이야기가 더 씁쓸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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