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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 베짱이도서관 편』 지은이들 인터뷰_2

by 북드라망 2025. 9. 24.


『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 베짱이도서관 편』  지은이들 인터뷰_2

3. 누드 글쓰기는 ‘벗으면 벗어날 수 있다’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드 글쓰기를 통해 가장 크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김주란] ‘늑대의 붉은 장막’인 것 같아요. 책에는 다 못 썼지만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에서 읽고 크게 와닿았던 대목인데요, 사냥꾼이 늑대를 몰아갈 때 붉은 천을 걸어 둔대요. 늑대는 그걸 불길로 믿기 때문에 그 장막에서 멈추고 만답니다. 어릴 때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선생님이 될 자격이 없지 않나 생각했다고 제 글에 썼는데요, 그동안 금기를 주로 자신을 감시하고 판단하는 데 써 왔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집에 와서 옷을 벗을 때, 이렇게 편한데 답답했었네? 하고 새삼 느끼는 그런 기분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생각은 아닌데 암튼 되게 후련해졌어요.

[김지영] 저는 ‘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책에 나온 저의 명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비겁과다에 무관성 사주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비겁은 ‘나’ 혹은 나와 수평적으로 맺는 사회적 관계이고요. 관성은 조직, 공동체적 관계입니다. 저의 비겁은 ‘토(土)’ 오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겁이 강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힘이 강한데요. 토 오행이다 보니 나로 이루어진 세계가 훨씬 단단하고 무거워서 잘 변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태과한 비겁을 제어해 주는 관성이 없습니다. 관성은 세상을 중심으로 ‘나’를 바라보는 힘입니다. 이번 누드 글쓰기를 통해서 저는 세상을 정말 ‘나 중심’으로 해석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뭘 좋아하지?’ ‘나는 어떤 직무와 어울리지?’ 등등 깊은 고민을 할 때도 모든 것은 ‘나’에게로 시선이 꽂혀 있었죠. 이 질문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더 큰 세상 속에서 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타자가 우글거리는 관계(관성)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타자가 결국 나를 살린다니! 누드 글쓰기를 통해 기존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극하는 타자가 필요하다는 우주적 이치를 배우게 되었네요.(^^)

[박보경] <감이당>에 처음 공부하러 왔을 때가 떠오릅니다. 아침에 일어나 조금 움직이면 기력이 없어 다시 누워야 하고, 때마다 병원에서 수액과 비타민 주사를 맞으면서 2~3년을 지냈어요. 몸과 마음은 하나라고, 당연히 마음도 힘들었습니다. 내가 몸이 안 좋아진 게 나에게 일을 많이 주는 사람과 환경 때문이라 생각해서 아픈 내내 원망하고 탓하는 마음으로 속이 잠잠할 날이 없었네요.


그런데 누드 글쓰기를 쓰면서 나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게 됐어요. 내 팔자를 공부하고, 내가 어느 쪽으로 기운을 쓰고 있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살펴보니 제가 활동을 많이 하고, 사람들 관계에서 예민한 구석이 있었더라고요. 사주라는 도구로 풀어 보니까 이해되는 지점이 많이 보였어요. 내 모습을 보고 나니, 지나간 사건이 다시 재해석됐어요.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이 내 안에도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죄다 남 탓하면서 욕하고, 아니면 깽판 치고…. 그런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더라고요. 이불킥하고 싶은, 찌질한 내 모습. 그때 상황을 기억해서 내가 왜 그랬는지 쓰는 게 힘들었는데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쓰기 싫더라고요, 남 탓하면서 한 편으로는 내가 너무 싫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니 또 아무렇지 않게 되더라고요. 나를 이해하게 되고, 내가 바뀌면 된다는 힌트도 얻고! 기쁩니다.

[박소영] 인연과 관계, 기대와 욕망을 ‘붙드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물론 다시 그 마음에 묶이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삶은 속박과 해방 사이에서 해방 쪽으로 길을 열어 가는 과정이겠지요. 저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어떨 땐 스스로도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에게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까요. 그전에는 나의 이런 성향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로 인해 크게 불편을 겪을 정도로의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으니까요. 
도서관을 운영하며 만나는 사람이 예전보다 몇 곱절 늘어나니 달랐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며 마음과 감정을 쓸 일이 많아지니, 사람을 향하는 나의 태도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그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기보다 이면에 담긴 나의 이상이 결과적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무언가를 함께 이루어가는 과정이 좋아 신나게 일을 벌였습니다. 마음을 묻고 고민을 함께 나누며 갈등을 풀어가는 일에도 에너지를 많이 쏟았고요. 완급 조절을 못하고 감정이 가는대로 행동한 시간들의 부작용은 한참 뒤 한꺼번에 나타났습니다. 
살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몸의 습관, 생활 습관을 돌아보며 운동을 계획하거나 잘 먹고 잘 자기를 실천하는 등 그때그때 일상의 패턴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습관의 산물인 마음과 감정, 생각이 흐르는 통로를 살피는 일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질문이 없었던 것이지요. 


사주명리를 공부하고 누드 글쓰기를 하며 제가 감정을 어떻게 쓰고 사는지에 관해 처음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내가 타고난 여덟 글자가 가진 각각의 기호를 해석해보며 감정의 속도가 빠른 이유를,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을 때 나의 행동에 담긴 욕망을 내 나름의 논리로 분석해 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 결과 다른 어떤 외부 환경이나 누구의 탓이 아닌, 나의 기대와 욕심이 생명으로부터 나를 소외시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감정이 가는대로 곧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내 마음과 욕망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감정에 힘이 들어가 있다면 결과에 관해 붙드는 마음, 내 뜻대로 되었으면 싶은 욕심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물론 그러고도 습관을 누르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튀어나가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오랜 세월 몸에 새겨진 통로가 아닌, 내 안에 새 길을 내는 과정이니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규범과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라서 그것 또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더라고요. 익숙하고 편한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의 힘이 그만큼 세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붙드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비우고, 스스로에게 매몰되지 않는 시간들이 축적된다면 어느 순간 경계가 사라진 ‘열린 나’로,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연대감으로, 세상의 숱한 존재들과 공명하며 생명의 근원에 닿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이경화] 처음 누드 글쓰기 주제를 정할 때 떠오르는 일이 있었는데 사실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한편 지금이 아니면 영영 풀어 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혼자서는 더 쉽게 도망갈 테니까요. 옆에서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하자는 생각으로 나를 밀어 넣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떤 상황에 대해 ‘나는 피해자이고 상대는 가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들춰보지 못했던 시간들을 들추기 시작하면서 내 머리나 가슴이 정리되기 전에 나의 몸이 먼저 아팠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 혀에 문제가 생겨 미각을 잃었었습니다. 나의 생각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몸과 연결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왕초보명리를 공부한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책임감으로 겨우겨우 글을 마칠 수가 있었는데 글을 마치고 난 뒤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가해자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은 더 이상 가해자가 아니었고, 나도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나의 사주와 함께 나를 계속 보고 또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당했던 일을 끝없이 쏟아냈어요. 당연히 원망과 함께 두려운 마음이 가득 차올랐고 그러면서 몸이 상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속 그와의 오랜 갈등상황을 살펴보니 어리석은 내가 보였습니다. 탐진치 중 치가 제일 무섭다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랬어요. 그리고 그렇게 어리석은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던 여러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불편한데도 참으면서 나는 괜찮다고 상황을 합리화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아직 생각보다 몸이 먼저 참고 있지만 괜찮다고 합리화하지는 않게 되었어요. 
누드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들춰보기 두려웠던 과거를 스스로 꺼내지 못했을 거예요. 평생을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그곳에 있는 줄 알면서도 외면하면서 살았겠지요. 누드 글쓰기 덕분에 내 안에서 꺼내어 흘러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4. 이 책을 읽어야 할 뿐 아니라, 누드 글쓰기를 꼭 써 보아야 할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요?
[김주란] 그야 지금 여기에 접속하고 계시는 누구나죠. <감이당> 홈페이지를 눈팅하시는 분, 명리에 관심 있으신 분, 운명에 대해 얘기 듣거나 하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 등등. 지금 이 얘기가 가닿는 범위 안에 계신 분들은 다 그럴 인연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그 인연을 흘려보내시는 분도 있고, 마음 일어나는 곳으로 따라 오시는 분도 계시는데요, 이건 찐 경험에서 우러나와 드리는 말씀인데 이거 보시는 분들, 누드 글쓰기는 진짜 꼭 한번 해보세요! 


특히! 제 나이또래 분들에겐 권하고 싶습니다. 인생을 리셋해야 할 갱년기에 필수 과정으로 넣고 싶은 심정입니다. 갱년기를 지나고 계신 분들! 제발 지나치지 마시고 오세용. 

[김지영] 지금 풀리지 않는 일이 있는 분들, 과거의 사건들로 인해 여전히 힘든 분들, 인생이 왜 괴로운지 알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고, 누드 글쓰기를 직접 써 보시길 추천드려요. 철학관, 사주 카페, 온라인 사주 상담, 심지어 ChatGPT를 이용해서 사주 진단을 받고 난 다음엔 결국 어떻게 할까요?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 나오면 결국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런 뒤에는 ‘역시 사주명리는 미신이야’로 결론을 내려 버리죠. 그럴 바에는 내가 직접 쓰면서 나를 진단해 보는 겁니다. 


이 책을 쓴 5명의 사주 스토리를 본인의 사주와 비교해 보면 더욱 재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간이 똑같은 사람, 월지가 동일한 사람, 나와 육친의 배치가 비슷한 사람, 오행의 개수가 비슷한 사람 등. 독자의 사주와 저자들의 사주를 비교해 가면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으면 더욱 재밌을 거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제 막 사주명리를 배웠는데, 도대체 이 사주명리를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거예요. 제가 그 산증인입니다(^^) 저도 사주명리 기초만 떼고 첫 사주명리 강의가 끝나자마자 누드 글쓰기를 쓰게 됐거든요. 베짱이도서관 편 이전에 출간된 『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를 보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운명의 스토리를 읽다 보면, 여러분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올 겁니다. 이건 제가 100% 확신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다 각자의 휘황찬란한 인생 스토리가 있으며, 그것을 세상에 나누고 싶은 욕망이 있거든요. 심지어 글쓰기 실력(?)이 그렇게 요구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시면 ‘어? 나도 쓸 수 있겠는데?’라는 용기를 얻으실 겁니다.(^^) 오히려 누드 글쓰기는 자신의 번뇌와 패턴을 더 깊이 고민할수록, 문제를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재밌어집니다. 진솔하게 내 운명과 마주하고 싶은 분들, 내 이야기를 세상에 흘려보내고 싶은 분들은 꼭 써 보시길 바랍니다!

[박보경] 사주를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꼭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는 게 지긋지긋하신 분, 변화하고 싶은 분, 지금 괴로운 분이라면 꼭 읽고 쓰는 경험을 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누드 글쓰기는 고도의 지성(?)이나 깊고 심오한 철학이 필요한 글쓰기가 아닙니다. 자기 역사를 천천히 되짚어보고, 사람들과 같이 나누는 글쓰기입니다. 물론, 자기를 적나라하게 벗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쓸 때마다 “내 찌질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라고 비명을 지르며 썼지만, 막상 쓰고 나니 그만큼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기사 하나를 읽었는데 한 유명 카드사에서 발표한 2025년 올해 소비 트렌드 다섯 가지 중 하나가 ‘셀프디깅’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self)을 ‘깊이 판다(digging)’는 말인데요. 자기를 탐구하고, 탐구한 내용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행위까지를 뜻합니다. ‘자신’을 ‘디깅’하고 나누는 게 트렌드가 된 시대이기도 하죠.


그렇게 본다면, 사주명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선조들이 사용했던 대표적인 ‘셀프디깅 툴’이자, 나를 탐구할 수 있는 최고의 툴입니다. 저는 사주를 배우고 난 이후부터 어떤 유형검사도 하지 않는데요. 일단 시시할뿐더러, 사주명리의 기본기를 익히고 나면 나에게 필요한 색깔(퍼스널 컬러), 관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애착유형), T인지 J인지(MBTI), 신체 특징 및 병증(DNA) 등 모든 걸 사주를 통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누드 글쓰기는 이 모든 해석의 총집합이죠. 한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탐구했는지 적나라하게 나오니까죠. 자기를 찐하게 탐구하고 싶은 분, 사람들과 진솔하게 나누고 싶은 분, 이전과는 다른 셀프디깅을 하고 싶은 분이라면 누드 글쓰기를 강추합니다!

[박소영] 헛헛하고 공허한 마음, 내적 혼란이 자주 찾아오는 분들이 계시다면 책을 읽고, 또 누드 글쓰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생각과 구체적 삶이 어긋날 때 사람은 괴롭기 마련입니다. 자연이 무한 반복 속에서도 경쾌한 변주로 생기와 활기를 잃지 않듯 자연의 일부인 사람의 몸과 마음도 머무름 없이 흐르고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 생명과 자연의 이치일 것입니다. 기운이 어딘가 막히고 정체되어 있으니 내 생명을 더 이상 소외시키지 말라고 보내는 몸의 신호가 바로 통증이 아닐까요?  


간극과 괴리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알아차리려면 일상 속에서 습관적으로 자주 하는 말과 행동, 그 안에 담긴 나의 욕망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욕망의 현장과 대면하는 일은 나의 이기심과 나약함, 한계와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선 여러 각도의 질문이 중요하니까 혼자보다 여럿이 같이 하고, 정리된 생각을 글쓰기로 구체화해 보면 더욱 좋겠지요. 함께 쓰는 글은 힘이 셉니다. 타인의 시선과 생각을 온갖 감정이 들끓는 내 안으로 들이는 것은 내가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제어해주지요. 욕망의 회로를 바꿔보기 위해 고민하는 도반들과 질문을 주고받고, 같이 글을 쓰는 누드 글쓰기 과정 속에서 저는 각자의 아픔과 상처를 서로가 조금씩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과 달리 혼자만의 고민, 나만의 상처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어요. 상관없는 것 같아도 우리는 모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을 겪느냐보다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묻는 것이 두려워지면 삶은 생기를 잃습니다. 오랜 고민과 상처, 아픔을 햇볕에 드러내고 바람에 말리는 과정의 질문이 없으면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해도 문제로부터의 해방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우니까요.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을 대하는 나의 관념을 바꾸면 됩니다. 자유를 주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마주하고, ‘이상적인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의 간극을 줄인다면 고유의 본성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공부를 삶에 녹여 문제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인 누드 글쓰기를 통해 온전한 나의 힘으로 일상의 질서와 규율을 새롭게 만드는 경험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경화] 누구나 저마다 고난을 안고 겪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모두가 써 봐도 좋겠지만 저처럼 내 안에 불편한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사람, 계속 반복되는 불편한 지점이 있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나는 외면한 채 혹은 가슴 속에 담아 두고 그대로 언젠가 조용히 사라지길 기대해도 그것은 순간순간 올라와 나의 결정이나 상황에 영향을 줍니다. 저의 경우 누드 글쓰기를 통해 안에서 꺼내 밖으로 흐르게 했던 한 번의 경험은 다른 불편함이 생겼을 때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처음엔 습관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외면하려고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주할 수 있었어요. 한 번 맛본 해방감이 큰 힘이자 길이 되어 주었습니다. 


 혼자는 어렵더라도 함께 누드 글쓰기를 하면 그것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중요한 건 일기처럼 혼자가 아니라 함께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써도 나의 마음을 확인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꺼내는 게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순환이 생명의 원동력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꽁꽁 묶어 두려니 얼마나 더 많은 마음에너지가 들까요. 꺼내서 흐르게 한다. 그게 생명의 방향과도 맞으니 누드 글쓰기는 양생의 차원에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5. 끝으로 “나에게 누드 글쓰기란?”에 대한 답을 주시고, 간단한 이유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주란] 누드 글쓰기란, 자기만의 길 찾기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각양각색의 사주를 갖고 태어났잖아요? 그러니 저마다의 길은 스스로 찾아야죠. 다른 사람의 목소리 대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누드 글쓰기라고 답하겠습니다.

[김지영] 저에게 누드 글쓰기란 ‘변비 탈출’이었습니다(좀 더럽나요^^). 몸에서 오랫동안 묵직하게 자리 잡던 번뇌들이 신체를 쑤욱 빠져나가 시원했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 잦은 이직, 아버지와의 관계, 사건들로 인한 불안 등’ 꽤 오래 저를 괴롭히던 번뇌들을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서도 정확한 이유에 대해 무지하니 불안감만 쌓였었는데요. 저의 욕망과 행위의 습관을 사주명리학과 연결해서 바라보니 이 문제들이 바로 가벼워지더라고요. 


누드 글쓰기는 단단히 뭉쳐서 무거워진 나의 번뇌를 세상에 흘려보내게 합니다. 번뇌를 흘려보내며 나도 다른 몸이 되지만, 번뇌도 다른 시공간을 접촉하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의 시공간과 만나겠죠? 번뇌가 저를 힘들게도 했지만, 결국 누군가의 시공간과 접속하게 만들어 주니 번뇌가 꼭 나쁘다고만 볼 수도 없겠네요.

[박보경] 나에게 누드 글쓰기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뗏목’입니다. 제가 누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장이 있으면 뗏목과 노는 꼭 써먹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표현은 고미숙 선생님이 『나의 운명사용설명서』에서 쓰신 말인데요. 책에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려면 뗏목이 필요하고, 사주명리학은 힘차고 역동적인 뗏목이 되어줄 거”라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 책을 읽다 이 문장을 발견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살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깜깜할 때가 많았는데요. 사주명리를 공부할 땐, 인생 지도를 하나 손에 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만물은 어떻게 존재하는지. 인간(존재)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 지혜를 명리공부를 통해 배웠습니다. 깜깜한 인생, 되는 대로 살기만 했는데 덕분에 세상이 조금은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누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해서 힘차고 역동적으로 탐험할 수 있었습니다. 뗏목에 올라타 노를 저으며 신나게 인생길을 항해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순간부터 괴로웠던 순간까지! 내 습관, 기질, 나아가 욕망, 신체성까지 하나씩 탐험했습니다. 항해가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땐 또 잠시 뗏목 위에서 쉬었다가, 목 좀 축이고, 다시 항해를 떠났습니다. 글쓰기라는 뗏목이 있었기에 힘차고 역동적으로 항해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박소영] 출구. 내 어둠이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빛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정직한 직면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임을 누드 글쓰기를 통해 배웠습니다. 삶과 글이 서로를 돕고 기르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요. 누드 글쓰기는 어떤 출구로 나가는 게 좋을지를 내가 찾는 과정입니다. 일상에 발붙이는 공부와 글쓰기로 과거의 습관들을 바꾸고 모르던 세계에 눈을 뜬다면 다른 ‘나’의 가능성이 열리고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경화] 자유. 너무나 불편한 마음을 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내 안에 있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던 일을 꺼내어 흘러갈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제 인생의 키워드가 자유였거든요. 이런 게 자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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