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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 베짱이도서관 편』 지은이들 인터뷰_1

by 북드라망 2025. 9. 23.

『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 베짱이도서관 편』 지은이들 인터뷰_1

 

1. ‘누드 글쓰기’와 ‘베짱이도서관’은 일반 독자들에겐 생소한 키워드일 듯합니다. ‘누드 글쓰기’는 무엇인지, ‘베짱이도서관’은 어떤 곳인지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누드 글쓰기란… 김주란·김지영·박보경이 함께 답합니다]
‘누드 글쓰기’란 책 제목은 <감이당>의 강의 프로그램에서 따온 것입니다. 누드 글쓰기는 <감이당>의 사주명리 수업들 중 하이라이트이자 필연적 수순이지요. ‘누드’와 ‘글쓰기’의 결합이라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의 조합이지요? 이름대로 자기를 홀딱 벗기는 글쓰기입니다. 벗겨서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겁니다. 무엇을? 내 인생의 ‘번뇌’와 번뇌가 만들어 낸 좌충우돌 ‘사건’들을요. 우리는 자신에게 벌어진 각각의 사건들이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잘 들여다보면 내가 겪었던 사건들에는 묘한 패턴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성과 헤어지는 패턴, 친구와 싸우는 포인트, 조직에서 사건을 겪는 패턴, 돈과의 인연 등등. 이 사건과 저 사건, 이 번뇌와 저 번뇌가 동일한 나의 생각과 욕망의 패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패턴들을 ‘까발리는’ 글쓰기가 누드 글쓰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제대로 ‘벗기’ 위해 먼저 사주명리를 공부하고, 자신의 사주팔자를 분석합니다. 처음 글을 쓸 때에는 사주명리가 정말 내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며 시작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사주명리의 기호를 가지고 삶에 고질이 된 자기 기질과 욕망, 즉 자신의 번뇌를 술술 풀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누드 글쓰기는 ‘번뇌의 커밍아웃’입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꽁꽁 감추고 있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것이지요. 핵심은 이야기를 풀어서 사람들과 나누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과 다 같이 나누다 보면 나만 ‘찌질’하거나 팔자가 ‘사나운 게’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제각각의 이유로 모두가 찌질하기 때문에 서로 위로를 받습니다. 또 자기를 홀가분하게 벗겨 내는 만큼 존재는 더 가벼워지고요. 

[베짱이 도서관은… 박소영·이경화가 함께 답합니다]
베짱이도서관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사립도서관입니다. “마산 사투리를 쓰는 재미있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이경화가 말했습니다) 박소영이 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마을에 공간을 얻어 서재의 책들로 시작하게 되었고, 2013년 11월 8일 문을 열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도서관 이름을 베짱이라 지었는데 두고두고 이름 덕을 보고 있습니다. 국가 지원은 받지 않고 자발적인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때그때 계절과 사람, 상황에 따라 자연스러운 활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베짱이도서관을 후원해 주는 분들은 ‘개미 친구’라고 불러요. 물론 도서관 이용은 후원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아이들은 공공도서관에서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책을 보기도 하고요. 또, 행사나 모임을 기획하고 꾸릴 때는 언제나 친구들과 과정을 함께합니다. 일이 아닌 삶에, 결과가 아닌 과정에 중심을 두고서요. 그래서 행사 당일만큼이나 모두가 같이 준비하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어요.^^


도서관을 함께 지키는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매달 10일, 도서관 소식지인 <베짱이 편지>를 발행합니다. 한 달 사이 도서관의 다채로운 풍경이나 뜻깊은 일, 다녀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담아 후원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작업이지요. 도서관 문을 여닫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합니다. 1월과 2월은 행사를 잡지 않고 숨 고르는 달로 삼으며,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일주일 동안 도서관 방학을 합니다. 도서관의 일상을 지탱해 주는 중심 활동은 책모임입니다. 베짱이도서관이 지금껏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책모임을 주춧돌 삼아 고민하는 힘을 기르고 존중과 연대를 실천하는 이웃들이 차츰차츰 늘어났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모임뿐 아니라 같이 밥도 먹고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 각종 행사 기획 회의, 노래/연주 연습 등도 당연히 도서관에서 이루어지고요. 그리고 무엇이든 나누는 베짱이도서관은 세월호 참사, 메르스, 코로나, 이태원 참사, 계엄 등 혼자라면 감당하기 어렵거나 외면했을 시대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탄핵 때는 마을에서 집회를 하기도 했고, 올해 5월에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304 낭독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큰 사회 문제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고민이나 비슷하게 겪고 있는 아이들 문제, 갱년기 문제 등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누며 소소한 삶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책 모두가 주인인 곳. 함께 먹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읽는 곳, 작년부터는 <감이당>과 만나 함께 공부하는 곳이라는 타이틀이 추가되었네요. 


2. 보통 사주는 철학관에서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엔 챗GPT도 사주를 봐 준다고 하고요. 그런데 이렇게 직접 명리를 공부하고, 힘들게 ‘쓰기’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주란] 글쎄요, 아직은 챗GPT가 사주를 잘 못 푼다더라고요. 하지만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면 금세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챗GPT가 발전하면 뭐하나요? 달라져야 할 건 자신이잖아요. 자신에 대해 사유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건 챗GPT가 아니라 나 자신이죠. 사주를 공부하고 글을 쓰는 시간의 의미는 단지 어떤 해답을 얻고자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답에 이르는 과정을 충분히 겪는 데 있을 거예요. 게다가 누드 글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공부해 온 친구들과 같이 나누는 것이거든요. 글 쓰는 건 물론 괴롭지만^^ 친구들과 웃고 울면서 나누는 가운데 얻는 풍요로운 경험은 어디서도 얻기 힘들 거예요. 

[김지영] 맞아요. 질문해 주신 것처럼 쓰는 건 참 힘듭니다. 특히 사주명리 왕초보자들은 누드 글쓰기를 쓰면서도 ‘내가 잘 해석한 게 맞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저절로 사주 전문가에게 내 팔자의 해석을 맡겨버리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지죠.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사주명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스스로 분석했다가 엉망으로 해석하면 어떡하냐고요? 상관없습니다. 사주명리학은 물리학이나 수학 공식처럼 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맞고 안 맞고’의 척도를 쓰면 사주명리학의 스펙트럼은 한없이 좁아집니다. 답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공부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내 사주 명식을 이렇게도 해석해 보고, 저렇게도 돌려 보면서 다양하게 해석해 보는 것이 사주명리의 재미라고 볼 수 있어요. 


사주팔자가 완벽하게 동일한 사람이라도 살아온 삶의 거죽은 각자 다 다릅니다. 하지만 또 자세히 살펴보면 커다란 운명의 흐름을 같이 타고 있는 것도 보이죠. 그래서 본인이 해야 합니다. 커다란 운명의 지도에서 나는 어떤 리듬으로 살아왔는지 본인이 봐야 하는 거예요.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하니 애매할 것 같지만, 나의 구체적인 삶과 일상에 착 붙여서 해석하면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내 삶과 일상에 부착해 보기 위해서는 ‘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을 거칠게 살기 때문이에요. 일상에서는 내 행위와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쓰기 위해서는 관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사주를 잘 보려면 써야 하고, 잘 쓰려면 번뇌와 일상 속 내 마음을 잘 봐야 합니다. 


인생에서의 사건, 번뇌들을 사주와 연결하여 쓰려면 일단 나는 그 사건에서 빠져나와서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자리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거죠. 그러면 어느 순간 나는 정말 그 사건에서 쑤-욱 벗어나 있습니다.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거죠. 과거를 다르게 해석하면, 현재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속이 답답하시다면, 기존과 다르게 살고 싶다면, 어떤 사건이 내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면 누드 글쓰기를 써 보시길 강추합니다!

[박보경] 사주는 굳이 따지면 ‘보는’ 건 맞습니다. 본인의 생년월일을 봐야 운명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철학관에서 사주를 봐 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챗GPT도 내 사주를 풀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데이터를 해석할 뿐입니다. 또 누군가에게 ‘자기 삶을 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건, 자기는 수동적인 상태로 계속 놓아 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사주를 볼까요? ‘이전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 ‘내가 지긋지긋하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등 핵심은 지금과는 다르게 변화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명리학을 직접 공부하다 보면 내가 겪은 사건과 역사를 통해서 내 습관과 패턴, 기질, 욕망, 신체성을 구체적으로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분석하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꼭 해야 할 작업은 ‘쓰는’ 것입니다. 뒤죽박죽 꼬여있는 무형의 생각은 유형의 물질로 드러내야 명료하게 볼 수 있습니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 나를 명료하게 보는 도구로 글쓰기보다 더 확실한 건 없기 때문이죠.

[박소영] 명리를 공부하기 전에는 저도 보통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운 특별한 영역이라 여겼습니다. 직접 공부를 해보니 동양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통계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의 일부인 나는 어떤 자연 재료를 품고 태어났는지, 내가 가진 8개의 기호를 하나하나 살피고 의미를 추론해보며 배우고 익히는 일은 어려우면서도 재밌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삶의 서사를 가장 잘 아는 내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내 운명의 전체 지도를 펼쳐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방향을 그려보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나를 둘러싼 관계와 상황이 바뀌어도 살다 보면 늘 비슷한 지점에서 넘어지고 막히곤 하잖아요. 고민을 화두 삼아 공부를 도구 삼아 그 지점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나름의 이유를 찾아 해결점까지 나아가는 누드 글쓰기는 사고의 이동, 시선의 확장을 가져왔습니다. 외부에 내 운명의 해석을 맡기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만 남을 뿐인데 그것으로는 신체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지요.


글쓰기는 내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집중과 몰입으로 나와 마주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표현을 찾아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가다듬으며 이리저리 궁굴려보는 과정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발견과 전환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성찰의 시간으로 키워진 생각 근력은 거센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뿌리처럼, 시련 속에서도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줍니다. 정직한 자기발견,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핵심에 다가가는 연습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힘을 기르는 누드 글쓰기는 잃어버린 몸의 감각을 되살리고 생명력을 깨울 것입니다. 

[이경화] 내 사주를 보는 것은 말 그대로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는 일 같아요.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요. 그저 내가 원하는 답이나 좋은 것만 얘기해 주길 기대하는 마음, 어떤 일의 선택을 스스로 찾으려 하지 않고 내 선택에 대한 면죄부를 두려는 마음도 있는 것 아닐까요? 


내가 내 사주를 공부하는 것은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보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신금이구나. 아, 그래서 이런 성격을 갖게 됐구나. 내가 이런 뜨거운 온도를 갖고 있구나. 그래서 신금이지만 이렇게 잘 웃는 반면 건강의 문제가 염증으로 나타났구나. 관성이 많아 나를 극하는 기운이 많으니 내가 힘든 게 너무 당연했겠네.’ 하며 팔자를 하나하나씩 파고 들어가며 나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정도로도 사주명리 공부에 만족을 했는데 왕초보명리수업 후에 3페이지의 누드 글쓰기를 해야만 했어요. 좋다고 하니까 하긴 했지만^^ 글쓰기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글쓰기 자체로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주명리만 해석하는 것과 그것을 나와 연결 지어 글을 쓰는 건 정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냥 해석만 했을 때는 알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를 절로 이해하게 되었어요. 혼자 일기처럼 썼다면 그저 자기연민으로 빠질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내 글을 공개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더 깊게 나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이해하니 자연스레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방향도 생겼어요. 방향이 생기고 나니 사소한 일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순간 감정에 휩싸이며 여전히 흔들리지만 방향이 있으니 이내 돌아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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