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인가, 나락行 급행열차인가 ─ 아니마/아니무스
서 윤 (사이재)
그림자와의 대면이 도제徒弟의 작품이라면,
아니마와의 대면은 장인匠人의 작품이다. 『원형과 무의식』, C.G.융, 솔, 139쪽.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 곁에서 영감을 주는 존재가, 뮤즈라 불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부 예술가들의 삶에서만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뻔한 삶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시도를 하도록 고무하고, 그리하여 무언가를 낳도록 자극하는 존재가 바로 뮤즈 아니던가. 그렇다면 평범한 나도 영감을 주는 존재를 향한 갈망과 부득이한 사로잡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며 엮이는 그런 관계들을 극화(劇化)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누구나 경험할 법한 이런 기운이 가진 힘에 하필 뮤즈라는 신화적인 이름을 붙인 이유는 뭘까? 여전히 신화적 맥락이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일까?
생의 전환기, 예술이 말을 걸어왔다
고대 그리스어 무사이Μουσαι의 영어식 명칭이 뮤즈Muse인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음악과 시를 관장하는 아홉 명의 여신을 지칭한다. 예술가들의 활동에 영감을 주고, 창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고대인들은 어떤 힘의 결합이 예술과 음악의 여신들을 낳았다고 상상했던 걸까?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는 므네모시네가 제우스와 9일 동안 사랑을 나누고 시와 음악의 요정들인 9명의 뮤즈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므네모시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의인화한 신이다. 즉 제우스신과 ‘기억’ 여신이 결합해서 학문과 예술, 즉 문명을 낳았다는 뜻이다. 흔한 말로 제우스에게는 므네모시네(기억)가 뮤즈였을 테고, 므네모시네에게는 제우스가 뮤즈였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번개로 상징되는 힘이 무의식적 기억을 자극해 무언가를 낳았고, 이는 서로 다른 두 힘의 결합을 상징한다.
여기서 융(Carl Gustav Jung)은 영감을 주는 이런 존재들이, 창의적인 열정뿐 아니라 파멸에 이르게 하는 매혹까지 지녔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잠재된 내면의 열정을 촉발하는 그 낯선 힘은 “의식의 발명품이 아니고 무의식의 자동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형체 없이 천변만화하는 경향성인지라, 꿈이나 신화의 상징을 토대로 신중하게 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게 융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경험적인 심리학의 영역에서 설명하기 위해 채택한 가설적 명칭이, 바로 <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다.
그런데 막상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융은 깊이 회의했다. 환자가 스스로 꿈이나 환상의 이미지를 이해하도록 돕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무의식과의 대면을 학문적인 실험으로 이해하고 그 결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소위 돕는 자인 자신이, 별로 쓸모도 없는 몇 가지 이론적인 편견들만으로 환자들을 대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융의 나이 마흔 즈음의 일이었다.
이때 내 안에 어떤 소리가 있었다. “이것은 예술이에요.” 나는 매우 놀랐다. 나의 환상이 예술과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내가 아닌 어떤 하나의 인격을 이루었고, 그것이 자신만의 고유한 견해를 말로 표현하는가 보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C.G.융,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 339쪽)
노도(怒濤)와 같은 무의식의 엄습이었다. 융은 1913년 프로이트와의 결별 후 꽤 오랫동안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방향상실’의 상태를 경험했노라 고백한다. 혼란 속에서 자신의 아니마를 발견한 것인데, 이제 막 중년의 삶으로 진입한 시기였다. 융은 자신의 자아Ego나 페르소나Persona와 관련해서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길 원했기 때문에, 이 내면의 소리는 다른 차원의 인격 발달을 위한 무의식의 숙명적 요구라고 여겼던 것 같다. 남성인 융의 마음속에 있는 여성적 에너지가, 말하자면 예술의 이름으로 인격화되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융은 그 부름에 응답했다.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환상에 저항감을 느꼈지만, 그럴수록 터무니없어 보이는 환상을 붙잡아 그 이미지를 인식하려는 시도를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 없다고 융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재real하지만 직접 관찰될 수 없는 ‘무엇’에 대해 <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라는 과학적 가설을 세우고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낯선 힘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의심하고 기록하는 과학자로서의 일상을 끝끝내 붙잡고 있었다. 남성의 현실적 삶에서 방치된 채 무의식화된 여성적 힘이 너무 생경해서, 융 자신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취와 명예를 위한 삶에 몰두했던 에너지는 변환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건 이토록 낯설고 이질적인 힘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짜릿하게 끌리는 타자, 그 정체와 목적은 뭘까? 세이렌에게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 돛대에 몸을 결박하고 버텼던 오디세우스처럼, ‘정신줄’을 꽉 붙잡으라고 융은 말하는 걸까? 도대체 아니마/아니무스가 어떤 모습으로 내 삶에 등장해 도발하기에?
원형(元型, Archetyp)으로서의 아니마/아니무스
사실 아니마는 ‘아니마 원형’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니무스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니마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의학 지식의 경계표 밖에 존재하는 보편적‧인간적 경험이자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 현상에 아니마라는 이름을 부여했을 따름이다. 요컨대 무수한 원형(元型, Archetyp) 중 하나일 뿐이라는 뜻이다.
심적心的 존재는 오직 의식될 수 있는 내용이 있음으로 해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한에서만 무의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은 주로 이른바 정감이 강조된 콤플렉스인데, 이것은 정신생활 가운데에서 개인적으로 친숙한 내용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은 소위 원형元型들 die Archetypen이다. (『원형과 무의식』, C.G.융, 융 저작 번역 위원회, 솔, 2002, 106쪽)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무의식은 우리에게 잊히고 억압된 내용의 저장고일 뿐이라서 개인적인 성질만을 띤다. 하지만 융의 생각은 좀 다르다. 표층의 개인적 무의식은, 태어날 때부터 선재하는 더 깊은 층의 토대 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심연의 집단적 무의식은, 모든 개인에게 어디에서나 똑같은 내용과 행동 양식을 제공한다. 바로 신화나 민담에서 캐릭터의 서사로 표현되는 원형들처럼 말이다. ‘집단적’이라는 표현을 통해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여 뮤즈(무사이 여신) 또한 인류 보편의 고태적인 원형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적 현상인 원형은 개인의 의식에 맞춰 형태를 바꾼다. 즉 무의식의 내용이 원형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의식화되고 지각되면서 그때그때 변형된다는 뜻이다. ‘원형元型’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아직 의식의 가공을 받지 않은 어떤 형식Form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신화학적 연구에서는 ‘주제Motive’라 부르고, 원시인 심리학에서는 레브 브릴이 언급한 ‘집단표상(集團表象)’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듯 다른 학문의 영역에서도 인정되고 명명된 개념이 바로 ‘원형’이다. 융이 골방에서 혼자 궁리해 낸 상상 속 관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다. “집단적 무의식은 선재하는 틀들 즉 원형들로 이루어지며, 그것들은 단지 이차적으로 의식될 수 있고 의식 내용에 뚜렷한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같은책, 167쪽)
가령, 아니마 원형이 누군가의 꿈에서는 교활한 인어로 등장할 수도 있고 테레사 수녀나 관음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무스 원형이라면 저 태초의 아담 같은 형상에서부터 위기 때마다 짠~ 등장하는 온갖 히어로들, 혹은 뇌가 섹시한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인격의 발달 정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따라서 묘한 양가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매혹적일수록 내심 유혹당하고 싶은 충동이 나도 모르게 일어날 테니 말이다. 이런 무의식적 힘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불확실한 경향성을 좀 구체화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경질적이고 무기력한 남성의 아니마
‘변덕이 죽 끓듯 하다’는 말은 까탈스러운 여성의 기분을 표현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실제 진득한 죽이나 묵을 쑤기 위해 불 앞에서 저어 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이 너무 찰떡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전분기 가득한 액체가 끓을 때는 폭폭 기포가 터지면서 끓는데, 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서 얼굴이며 손이며 데기 일쑤다. 기분이라는 게 딱 이렇기도 하거니와,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 예민한 사람 곁에서 얼쩡거리면, 된서리를 맞는 수가 있다.
아니마anima는 남성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지극히 여성스럽고 감정적인 심리 경향이 인격화한 것이다. 말하자면 변덕이 죽을 끓듯 하는 ‘기분’을 인격화한 형상이 바로 아니마라는 말이다. 실제 어떤 형체가 아니라 에너지일 뿐인데, 이 기운을 어떻게든 인격화하려고 시도했다는 건, 다룰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대응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마는 스스로에 대해 중세의 비의서(秘儀書)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나는 들꽃이며 골짜기의 백합, 사랑과 공포와 지식과 거룩한 희망의 어머니……. 나는 어떤 요소와 어떤 요소를 화합케 하는 중개자, 따뜻한 것을 차갑게 하고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하며, 마른 것을 습하게 하고 습한 것을 말리고,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한다……. 나는 사제에게는 율법이요, 예언자에게는 언어이며, 현자에게는 분별이다. 나는 생을 앗아가고 생을 부여할 것이오, 나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인간과 상징』, C.G.융 외,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12, 289쪽)
막연한 느낌이나 기분, 예견적인 육감,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 신경질적인 짜증 등이 남성 특유의 감수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상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은 이런 느낌을 조용히 억압하거나 무시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라 여겼던 이런 ‘기분’이 삶에 불쑥 끼어들면, 아연실색 당황하고 만다. “어떤 요소와 어떤 요소를 화합케 하는 중개자”가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내적 세계로의 안내자이기도 한 아니마는, 대대待對하는(짝이 되어 의지하는) 것들 사이를 중개하는 힘이다. 무의식화 되었기에, 마치 완벽한 타자인 듯 여겨지는 내면의 힘을 통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친절하고 무해(無害)한 에너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융의 경험에 의하면 아니마의 말은 대개 ‘유혹하는 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교활함’을 지녔다. 즉 남성 안에서 생겨난 어떤 여인(아니마)이 그 남성의 생각에 간섭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번뜩이는 영감을 주는 뮤즈로 관계 맺게 될 수도 있고, 남성들을 권태와 무기력이라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여성들은 어떨까? 과연 이런 경험에서 자유로울까?
설교하면서 화내는 여성의 아니무스
동양에서는 여성적인 힘을 ‘음陰’이라는 개념어로 표현하는데, 드러난 것과 은미(隱微)한 것은 빛과 그림자처럼 동시적이라고 가르친다. 즉 ‘음陰’으로 드러나더라도 ‘양陽’의 힘 또한 내재하며 틈이랄 게 없다는 뜻이다. 미루어 보건대 여성의 내면에도 남성적 경향성인 아니무스animus가 작동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니무스가 남성들의 아니마처럼 에로틱한 공상이나 ‘기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아니무스는 거룩한 신념에 대한 ‘의견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거칠고 무례하게 설교하려 들거나, 난폭하고 격정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여성과 대면할 때가 있다. 이때 바로 그 여성의 남성성이 부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아니무스가 바로 이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아니무스가 무의식을 통해 속살일 때마다 곧잘, ‘사람은……’이라든지, ‘그들은……’이라든지 ‘누구나 다……’하는 식의 말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 이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반드시……’, ‘해야 하는 법이야’하는 식의 단정적인 의미가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과 상징』, C.G.융 외,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12, 296~297쪽)
한 번씩 사람을 질리게 만들던 직장 상사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장광설이 언뜻 들으면 다 맞는 말 같고, 심지어 멋있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주의해서 듣다 보면, 늘 핵심에서 벗어난 이런저런 ‘의견들’을 짜깁기해 지치지도 않고 늘어놓는다는 걸 눈치 챘다. 소통과 교감은 안중에 없고, 무조건 말로 상대를 제압해야 직성이 풀리는 불통의 아이콘이었다. 업계에서는 나름 성공한 여성이었다. 놀랍게도 여성들 속에 감추어진 힘은 이렇게나 차갑고 고집스러워서 접근하기 힘든 속성을 지녔다. 내 의견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는 것이다. 여성은 자아나 페르소나에서는 관계 지향적이고 수용적이지만, 성격의 다른 면이 부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막무가내로 거칠고 엄격하다.
그렇다 해도 융에 따르면, 긍정적인 아니무스는 여성의 의식에 신중한 심사숙고와 보다 성숙한 인식 능력을 부여한다. 긍정적인 아니마가 남성의 의식에 부드러운 관계 맺기의 통찰을 불어넣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아니마anima가 통합을 통해 남성의 의식에서 에로스가 되듯, 잠재적인 아니무스animus의 힘을 여성이 통합할 수만 있다면, 영성마저 느껴지는 로고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에 의식적인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일상을 송두리째 내동댕이칠 만큼 사로잡힐 수도 있기에, 융은 특별한 에티튜드를 요구한다.
장인의 에티튜드를 장착하라!
무조건적인 긍정과 따름! 통합적인 인격을 지향하는 분석심리학에도 지난한 수행 같은 이런 태도가 요구될 때가 있다. 주로 동성(同姓)의 타자에게 투사되는 그림자와의 대면이 그러하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를 제2의 인격으로 통합해야 했던 숙명이 이에 비견되곤 한다. 파우스트는 자신을 고매하고 이성적인 철학자로 규정하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음란하고 저열하고 충동적인 악마로 타자화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한다는 건, 적당히 수용할 수 있을 법한 요소만을 골라 마지못해 인정하는 게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를 나의 또 다른 인격으로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자아Ego의 분별에 의한 저항을 배제하는 수용을 융은 ‘도제徒弟의 작품’이라 했다.
도제의 과정을 착실히 밟았다면, 이어지는 무의식의 여정에서 대면하게 되는 에너지가 바로 앞서 다루었던 아니마/아니무스다. 자신의 꿈이나 환상 속 이성에게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매혹적인 현실의 이성에게 투사된 모습으로 대면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둘 다 경험하기도 한다. 범람하는 무의식적인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이미지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이 시기를 관통하기 위해 요구되는 건, 더 이상 조건 없는 순응이 아니다. 선택과 집중! 인식해야 할 바를 파악하기 위해 신중하게 갈고닦는 ‘장인匠人’의 에티튜드다.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성을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C.G.융,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 342쪽)
융은 ‘아니마 원형’의 말이 ‘칼로 접시를 긁는 것’처럼 기분을 언짢게 했다고 회고한다. 무의식과의 대면은 이런 부정적 감정을 극복한 ‘허공으로의 하강’ 같은 것이었다고 말이다. 누구보다 간절히 현실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융이었다. 궁여지책, ‘무의식적 표현’을 이해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융이 택한 건, 편지의 형식을 빌린 성실한 글쓰기였다. 융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더 이상 실험적으로 진행할 수 없을 때는 현상을 기술’한다. 따라서 신화학적으로 대화하고 기술(記述)하는 방식은, 의식의 문턱 아래 펄펄 살아 있는 것들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함이다. 단 무의식적 힘에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으려면, ‘장인匠人’과도 같은 신중한 실험을 통해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린 ‘마치 자신의 구원이라도 되는 양 예속을 욕망’하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니마라는 개념으로 요약되는 경험적 실체는 무의식에 대단히 극적인 어떤 내용물을 만들어낸다. 이 내용물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이 개념의 살아 있는 성격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극劇적이고 신화학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쪽을 더 선호한다. 극적이고 신화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경우, 표현력이 더욱 풍부해질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과학적 용어보다 훨씬 더 정확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온』, C.G.융, 김세영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12, 30쪽)
신화적 서사는 무의식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의 메커니즘을 표현해 준다. 세이렌과 오디세우스 신화를 다시 떠올려 보자. 치명적인 생명력으로 상대를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세이렌의 힘은, 알다시피 신화적 상상력이다. 즉 내 안에서 요동치는 무의식의 범람을 ‘추상적인 과학적 용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방도가 없으니, 폭풍우 치는 바다의 세이렌으로 인격화한 것이다.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신, 감정 속에 숨은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인격화해서 대응하려는 상징적 시도라 할 수 있다. 과학(의식)과 예술(무의식)의 원만한 교류는 차원 높은 인격의 발달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이를 위해 신화는 그야말로 교량 역할을 하는 셈이다. 융에 의하면 음양이 혼재된 카오스와도 같은 생명력은, 그게 선이든 악이든, 陽적 힘이든 陰적 힘이든, 한쪽으로 치우친 상태를 어떤 식으로든 보상한다. 왜냐하면 무의식에 있는 모든 힘은 외부로 드러나고 싶어 하고,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는 ‘자기Selbst’ 실현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성과 여성의 유전적 형질을 모두 갖는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자기 안에 내재하는 이성異姓의 힘을 의식하고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장인匠人’일 것이다. 장인의 에티튜드를 장착한 사람만이 타자에게 투사된 왜곡된 에너지를 회수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타자를 수용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말하자면 이성과의 성숙한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타자로 인해 인생이 뒤죽박죽될 때마다 남 탓을 하고 싶겠지만, 사실 뮤즈는 죄가 없다. 뮤즈와 더불어 생명력 넘치는 삶을 지속할지,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나무처럼 현실적 삶에서 고립되어 갈지는, 무의식적 힘을 대하는 태도와 인식 능력에 달렸다. 아니마/아니무스는 그 짜릿한 이끌림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귀한 안내자임을 기억하자.
반쪽이가 된 우리는 각각 옛날의 온전했던 한 인간의 부절(符節)입니다.
Each of us when seperated is but indenture of man (아리스토파네스, 『향연Symposion』 中)
'내가 만난 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만난 융] 작은 것보다 더 작고 큰 것보다 더 큰, 자기 (2) | 2025.06.05 |
---|---|
[내가 만난 융]마음의 갈피를 잡자(2)– 정신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하여 (0) | 2025.05.08 |
[내가 만난 융] 마음의 갈피를 잡자! (1) (0) | 2025.04.03 |
[내가 만난 융] 내 안의 타자들, 콤플렉스와 함께 사는 법 (1) | 2025.03.05 |
[내가 만난 융] MBTI보다 재미있는 융의 심리유형 Ⅱ (0) | 2025.02.04 |
[내가 만난 융] MBTI보다 더 재미있는 융의 심리유형 Ⅰ (0) | 2025.0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