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융 마음의 갈피를 잡자(2)
– 정신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하여
지산씨 (사이재)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
요즈음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과 그의 강연이 화제다. 작금의 시국과 맞물려 우리 모두는 또다시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강의 소설과 강연이 한층 더 저릿하게 다가온다. 그 어느 때도 아닌 바로 지금 한강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의식의 신호이자 경고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의 끝에서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찾고 있다고. 역사적이고 국가적 폭력인 5·18과 4·3, 인간의 근원적 폭력인 먹고 먹히는 싸움, 여기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그리고 ‘이런 세계를 껴안을 수 있는가’란 양극의 질문이 충돌했다고 한다.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소년이 온다』, 『작별은 없다』, 『채식주의자』 등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년이 온다』를 시작할 때의 질문은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였다. 그런데 작품을 쓰면서 질문이 바뀌고 답도 바뀌었다. 한강은 계엄군이 쳐들어오는 최후까지 광주 시청을 지킨 한 야학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하나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의 절규, 이 시점에서 한강의 질문과 답은 뒤바뀌게 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고 있다.’는 답으로.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열다섯 살 동호, 그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죽은 자들을 지키기 위해 5·18의 광주 시청에 남아 죽임을 당한다. 이 작품은 살고 싶었으나 살 수 없었던 소년, 우리 안의 파괴될 수 없는 것을 지켜낸 그 연약한 ‘사람들’의 실재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인간종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가를 보여주는 이 찰나의 역설 속에서 삶을 선택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얻는다.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다리를 건너려면 죽은 자의 도움이 필요했[하]다.’ 그리고 ‘애도를 종결하지 않기로, 작별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그렇기에 ‘살아내야 한다고.’
인간의 근원적 폭력과 국가 폭력을 이야기하는 한강 소설은 절묘하고도 신이하게 때에 맞추어 우리들에게 강력한 면역성과 민첩성을 키워주었다. 더불어 작년 천삼백만 여의 관객을 모았던 영화 <서울의 봄>도 빼놓을 수 없다. 융을 빌어 말하자면, 소설·영화의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 되는 ‘동시성’을 우리는 직접 목도한 것이다. 오, 소름!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걸 인정하고 재빨리 그 마음에 대응해야 한다. 감염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단련이 필요하다. 정말 12·12 계엄의 참혹함과 5·18 광주와 4·3 제주의 죽은 자들이 오늘의 산 자들을 구한 것이다. 과거와 죽은 자를 기억함으로써, 그들과 작별하지 않음으로써, 계엄의 폭력과 탄압에 감염되지 않는 동시에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면역계를 활성화시킨 것이다.
또 한 번 느끼는 건, 우리 스스로 우리의 현실을 알기란 얼마나 힘든가? 사건이 터져야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인식한다. 조짐을 읽고 방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체감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파괴적인 위협과 강력한 고통 앞에서만 이를 이겨낼 고귀한 힘이 솟아남을 실감나게 깨닫는 요즈음이다. 인간종에 대한 절망과 희망은 동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망적인 한편에서 희망이 솟아나고 희망적인 한편에서 절망이 솟아나니 말이다. 삶의 역동은 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생명의 빛’을 포기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의 탐구, 감염되지 않기 위해
융은 인간들의 ‘정신병’을 탐구하는 속에서 한강과 같은 생각에 도달했다. ‘인간이[나는] 어떻게 이토록 저열하고 공격적인가? 동시에 인간은[나는] 어떻게 이토록 신성하고 자비로운가?’ 진실로 한강과 융의 고민은 방향이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기 시대를 인식하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융은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진단했다. 과학과 기술 교육은 최첨단인데 영적 퇴행과 정신 분열은 심화되고, 위생과 번영을 누리는데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분열적 상황. 그리하여 ‘합리적인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 국가들은 감옥보다는 정신병원처럼 되는 경향을 보인다.’ 집단 히스테리가 일어나고 이를 치유한답시고 국가는 ‘자유를 폐지하고 탄압한다.’(칼 융 지음, 김세영·정명진 옮김, 『아이온』, 부글북스, 248쪽)
“소란스런 삶이 야기되는 붕괴의 순간, 인간은 최후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강요된, 스스로의 능력 포기다.”(『원형과 무의식』, 143쪽) 이 최후의 심연, 저절로 강요된 자발적 능력 포기를 융은 집단무의식이라 불렀다. 삶이 기울어질 때 의식은 자아를 내세우기보다는 저 깊은 집단무의식의 상징에 호응하고, 그 소리를 수용한다. 한강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또는 인간의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탐구했던 ‘과거’와 ‘죽은 자’는 융에 있어서는 ‘집단무의식’과 ‘원형’이었다. ‘과거’와 ‘죽은 자’가 현재를 돕고 산 자를 구하듯, ‘집단무의식’과 ‘원형’ 또한 그렇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융은 정신병을 앓는 환자들의 꿈과 환상을 분석한 결과,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층에서 집단무의식과 고태의 잔재를 찾아냈다. 다른 시공에서 살면서 서로 접촉한 흔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라 명명한 형식이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집단무의식과 그 내용인 원형은 선험적이고 집단적이며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인간 정신이다. 즉 나이면서도 타자이고, 현재하면서도 저 시원으로부터의 과거가 담긴 정신이다. 그런데 이 원형은 선하고 밝으면서도 동시에 악하고 어두운 그림자로 상징된다. 이렇게 볼 때 현명함과 어리석음, 선함과 악함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삶은 어리석으며 동시에 의미깊다.(『원형과 무의식』, 143쪽) 나는 신성하기도 하지만 매우 저열하기도 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그렇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상대로 혹은 세계를 상대로 나쁜 것은 항상 저들이라고 주장한다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다. 융이 든 예처럼, 서구 세계는 자기들의 악덕은 보지 않고, 오로지 공산 세계만을 악덕이라 적대하면서 핵무기 비축과 경제적 ‘경쟁’만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공산 세계의 악덕이 해결되지 않는다. 윤리적, 정신적인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다. 우리 세계에도, 나 자신에게도 파괴적인 악덕이 존재하며 언제든 튀어나올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도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타자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야만, 좁다랗고 자잘한 소견에서 벗어나 그에 대처하는 너른 시야를 배울 수 있다. 서구 세계가 핵무기 비축과 경제적 경쟁에서 해방될 수 있는 여지는 스스로의 악덕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스스로의 악덕은 보지 않고 남 탓만 하는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작금의 폭력성과 적대감은 사라질 것이다. 자기 본성의 그늘진 측면을 인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윤리적, 정신적 감염에 대한 면역이 가능해진다.(『인간과 상징』, 125쪽)
여의도와 광화문, 웃으면서 강력하게,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집회의 현장을 이끄는, MZ 세대들은 남다른 면역력을 보여주고 있다. MZ들은 저항하면서 동시에 마음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집회를 축제처럼 즐기고, 광장엔 유머와 풍자가 넘쳐나고, 오가는 선물 속에 세대 간의 벽이 간단히 무너지는,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총부리도 돌리고, 경찰의 방어선도 열어 제치는 비폭력의 운동. 선이라는 환상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악이라는 동굴에도 잡아 먹히지 않으면서, 자만도 차별도 원망도 혐오도 없이 스스로가 윤리의 주체가 되고, 세상의 뿌리가 되는 것. 인간정신을 탐구하는 이유는 이것일 터.
융이 보기에 “인간은 그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깨어났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 어떤 것도 무엇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원형과 무의식』, 143쪽) 집단무의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다만 필요할 때[자아,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할 뿐이다. 혹은 고귀하게 혹은 미천하게, 혹은 선하게 혹은 악하게, 혹은 귀하게 혹은 하찮게. 인간 마음의 불가사의함, 그것을 인정하는 자만이 의미를 생성한다.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다. 한강의 말을 변주하여 융에게 적용한다면, 신성과 악마성, 존귀함과 비천함, 어둠과 밝음의 그 사이에서 이 불가능한 허공의 다리를 건너려면 집단무의식[의 탐험]이 필요하다.
정신의 지도, 마음의 경로!
우리는 “참을 수 없이 첨예화한 나-너의 관계”(『원형과 무의식』, 111쪽) 속에서 살아간다. 타자와 관계 맺을 줄 모를 뿐더러, 나와도 관계할 줄 모른다. 그래서 융은 내 마음과 연결된 모든 것과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정신의 지도’를 그렸다. 융의 이 작업은 방대하면서도 치밀하다. 여기에서는 개괄적인 스케치로 정신의 구조를 정리하려 한다.
먼저 개념 정리부터 시작하자. 의식도 무의식도 정신이라 하고 마음이라 하는데, 정신은 무엇이고 마음은 무엇인가?
정신(Psyche)은 몸과 마음(심혼, Seele/Soul) 사이, 즉 물질과 영(Geist/Spirit) 사이에 존재하며, 정신의 과정은 영과 본능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영혼의 지도』, 151쪽)
우주라는 세계는 물질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은 영과 짝하고, 몸은 마음과 짝한다. 영은 정신적인 것으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 예를 들어 영성, 성령을 가리킨다. 영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물질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지만 물질과는 다른 정신에너지이다. 그렇다면 혼은 영과 어떻게 다른가? 혼은 육체와 결합된 영이지만 영성이라 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영은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 신이나 귀령 같은 영적 에너지이다. 그러나 혼은 육체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혼, 심혼, 마음은 지각과 감정을 포함한 정신 작용이기 때문이다. 융은 심혼, 마음을 정신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주관적[무의식의] 정신이라 일컫기도 한다. 어느 것을 지칭하든 심혼은 내면세계를 가리키는 용어로 영, 영성의 의미와는 다르다.
융이 언급하는 정신을 다시 정리해보자. 정신은 중간에 위치해 있는 현상이며 그 과정은 무게에 따라 아래 위로 움직이는 저울처럼 행동한다. 정신은 때론 본능에 근접해 있어서 그 영향 아래 있게 되고, 또 때론 영이 지배력을 갖고 본능의 과정을 동화시키는 반대편에서 움직인다.(『영혼의 지도』, 151-152쪽) 즉 정신은 아래에서 오는 에너지(충동)와 위에서 오는 에너지(영성)로 구성된다. 영성에서부터 혼으로 들어오는 상징이 있고, 충동으로부터 들어오는 상징이 있다. 그러나 정신은 충동 그 자체도, 영 그 자체도 아니다. 정신은 생리적인 본능(열등부)에도 경계치를 지니며, 영성(우등부)에도 경계치를 갖는다. 말하자면 충동과 영이 정신화를 거쳐 정신이 된 것이다.
융은 인간의 정신을 다시 구분한다. 의식과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의식은 자각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 의식의 중심에는 자아가 자리하고 있다. 의식이란 세계 주변이나 의식 내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고 인지하는 상태를 말한다.(『영혼의 지도』, 28쪽) 자아는 의식의 주체이며, 내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자아와 의식은 인식 가능한 것이기에 표층이라 부른다. 의식에 대해 무의식은 우리가 모르는 모든 정신이다. 그래서 심층이라 부른다. 작동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언제 드러날지 모르며,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심층이라 한다. 심층은 공간적 깊이가 아니라 모름의 깊이, 내밀함의 깊이, 잠재성이다.
의식의 바로 아래 혹은 바깥에 이 모르는 정신이 놓이는데, 이것은 콤플렉스와 같은 개인무의식이다. 한 사람의 특별한 삶의 역사에서 생성되며,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개인무의식은 정신적 외상이나 의식의 억압으로 인해 ‘모르게 된’ 정신이다. 이 개인무의식은 의식을 쉽게 동요시키는 정신이다. 개인무의식 아래, 혹은 정신의 가장 깊이에 집단무의식이 작동한다. 집단무의식은 경험 이전의 정신으로 유전적이고 집단적이며 경험을 만드는 정신이다. 그 무의식의 내용은 원형이다. 원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자연의 선물이다. 본능을 부여받듯, 인간은 조상에게서 받은 많은 정신의 기본 계획 혹은 정신의 공통 형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사람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의식 상태로 태어난다.’(『영혼의 지도』, 132쪽) 개인무의식에서 집단무의식에 이르면 그 모름이, 그 이해할 수 없음이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융이 그려낸 마음의 지도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의식의 입구[개인무의식]에서 집단무의식이라는 더 깊은 내면으로 내려가 정신의 전체성이자 대극의 통합성인 ‘자기’와 만나는 과정이 펼쳐진다. 자아의 양극성인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거쳐, 그 아래로 들어서면 내면의 타자이자 집단무의식의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만나고, 더 깊숙이 진입하면 정신의 전체성이자 대극의 통합인 ‘자기’를 만나게 된다.
이와 같이 융이 그려낸 정신의 구조는 복잡하지만 매우 질서정연하다. 정신에 매우 정교한 형식을 부여하여 체계화하고 있다. 또한 마음을 구획짓고 마음으로 진입하는 단계별 경로를 만들어 정신의 작동과정에 차서를 부여했다. 융은 믿었다. 인간의 정신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가 있으며, 따라야 하는 경로가 있음을. “모든 혼돈 속에 질서가 있으며 모든 무질서에는 은밀한 질서가, 모든 자의성에는 항구적 법칙이 있다”(『원형과 무의식』, 143쪽)
그 길은 언제나 분리의 마음에서 출발하여 전체성과 통합의 마음을 향해 뻗어 있다. 그 전체성은 신성이요 창조성인 영성(Geist)이다. 고대에는 인간을 초월해 있는 하늘의 빛이요 신이요 귀령으로 외부에서 인간에게 엄습하는 정신이었다. 그러나 지성이 영성의 왕좌를 차지하자 모든 영성(Geist)은 불타는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내려온 정신은 무거워지고 그것은 물이 되어 심혼(Seele)의 바닥에 이르렀다.(『원형과 무의식』, 122쪽) 이제 인간은 심혼의 바닥, 어둠의 물로 들어가 ‘영성’과 조우해야 한다. 이 영성이 자기 원형이다. 정신이 방향을 잃거나 정신계가 파편화되는 위험에 직면했을 때, 자기 원형은 정신을 연합하여 삶의 방향을 새롭게 창조하라며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반짝거리며 스스로를 현시한다. 정신의 지도를 자상하고도 진입하기 쉽게 그려낸 융은 이렇게 말한다. ‘네 가슴 속에 네 운명의 별이 있다.’(『원형과 무의식』, 118쪽) 내 마음의 파편화와 이 세계의 파편화를 치유하는 건, 네 안에 있다. 바깥에서 찾지 말라. 떠넘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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