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보다 더 작고 큰 것보다 더 큰, 자기
정기재 (사이재)
“고유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파라켈수스)”
(카를 융,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정신요법의 기본 문제』, 솔, 2001, 80쪽)
에스토니아 민담에 등장하는 이 소녀는 하찮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처지다. 의지가지 하나 없는 고아인 데다가 계모 밑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바느질을 해야 겨우 매질을 면하는 고단한 신세. 의붓딸의 처지를 알고 교묘하게 파고드는 하녀의 심술은 덤이다. 그러나 단정하고 순종적인 이 소녀는 그 모든 상황을 무던히 견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녀가 더 이상 집에 머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던 실패가 샘물에 떨어지고만 것이다. 이제 소녀는 갈림길에 선다. 계모에게 맞아 죽느냐, 아니면 물에 빠져 죽느냐··· 이 절박한 순간 소녀가 믿을 건 오로지 ‘자기’ 뿐이다.
자아 그리고 자기
누구에게나 인생의 변곡점이 될 만한 위기를 맞는다. 그럴 때마다 듣게 되는 충고는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충고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믿어야 할 자기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가장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건 흔히 ‘나’라고 부르는 ‘자아(ego)’다. ‘자아’는 지각하고 이해하는 ‘의식’의 중심이다. 무의식이 보이지 않는 미지(未知) 세계를 의미한다면, 의식은 보이는 앎의 세계를 담당한다. 그래서 ‘자아’에 의지하게 되면 합리적 사고, 혹은 보편의 기준을 따르게 된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거나, 법을 따지거나, 확률을 계산하거나. 소녀의 경우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계모에게 맞아 죽는 확률이 높을까, 익사할 확률이 높을까? 남들은 보통 어떻게 하나? 아무래도 이런 경우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매를 맞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폭력과 체념의 익숙한 일상.
이번에는 다른 자기를 상상해 보자. 융의 핵심 개념인 ‘자기(Selbst)’로 말이다. 자기! 흔하디흔한 보통명사 같지만 이 ‘자기’의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개념적으로 자기는 무의식적 정신 전체의 중심이다. 알려진 대로 ‘의식’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라면 ‘무의식’은 바다다. 자아가 섬의 중심이라면 자기는 바다의 중심이란 얘기다. 문제는 융이 생각하는 이 무의식의 스케일이다. 융은 무의식의 바다에는 태곳적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는 보편의 정신적 씨앗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게 바로 ‘자기’다. 놀라운 건 그 씨앗의 정체다. 융은 이 씨앗이 ‘우주적 질서의 원리’, 즉 전통적으로는 ‘신’이라고 부르던 것들이라고 말한다. 신이 내 마음 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잡고서 “형성, 변환, 그리고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카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옮김,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김영사, 356쪽)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내 마음의 ‘신’이라니. 그동안 숱하게 내 안에 불성(佛性)이 있고 그리스도 있다고 들어왔지만 실제로 이런 건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자기(Selbst) 자신이라 부른 것은 내 속에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아트만과 도(道)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적 전체성입니다··· ‘자기(Selbst)’란 결코 신 대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마 신적인 자비를 간직한 그릇일지 모릅니다. (카를 융,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인간과 문화』, 솔, 2021, 145쪽)
융은 이 ‘자기’를 인도의 아트만, 동양의 도(道)와 같다고 말한다. 이 ‘자기’를 서양에서는 ‘신’이라고 하고, 민간에서는 ‘수호령’,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너무 진부하다고? 좋다. 변환과 창조를 추동하는 ‘생명력’이라고 하자. 뭐라고 부르던 내 안에 태곳적부터 유전되어 온 신의 그릇, 신의 씨앗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좁디좁은 ‘의식’과 ‘이성’에 의지하던 나에게 ‘자기’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마냥 좋아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 내면의 중심인 ‘자기’를 잊고 살았다는 사실, 그래서 도무지 신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로지 ‘의식’만 애지중지 과대평가하면서 ‘무의식’은 미신이라고 홀대해 온 결과다. 신의 씨앗이 있는 바다는 버려두고 좁다란 섬에 자신을 유폐해 온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쩨쩨하고 하찮아져 버렸다. ‘신의 아들’로서의 품격을 잃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아등바등하는 왜소한 인간이 돼버린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찌해야 이 참을 수 없는 왜소함을 넘어 무의식을 포함하는 ‘인격의 전체성’이라는 자기실현을 할 수 있을까? 융은 ‘자아’는 길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자기’를 찾아 떠나는 모험의 길을 말이다. 융은 이 모험을 ‘자기실현’ 혹은 ‘개성화 과정’이라고 불렀다.
버려진 의붓딸, 샘물에 뛰어들다
융에 따르면, 신화나 민담에 등장하는 어린이의 모험담은 대부분 이런 ‘자기실현’ 혹은 ‘개성화 과정’을 보여준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아이가 온갖 역경 끝에 영웅이 된다는 서사는, 서툴고 편협한 ‘자아’가 무의식의 ‘자기’를 만나 자신만의 고유한 인격으로 거듭난다는 ‘자기실현’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에스토니아의 민담도 그러하다.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막다른 길에 내몰린 소녀는 결국 실패를 찾기 위해 샘물에 뛰어든다. 천만다행히도 소녀는 익사하는 대신 마법의 나라에 도착한다. 이제 소녀의 미션은 실패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암소, 숫양, 사과나무의 소원을 차례로 들어준 소녀. 그녀는 마지막으로 지저분하고 병든 노인을 만난다. 이 병든 노인의 요구는 오로지 하나다.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겨달라는 것! 소녀는 노인을 정성껏 씻겨주고 그 대가로 온갖 금은보화를 얻어서 집으로 귀향한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스토리 같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시작부터 그렇다.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샘물에 뛰어드니 처음부터 아찔하다. 자기실현의 길이 꼭 이렇게까지 아찔해야 하나? 아찔해야 한다. 자기실현은 기존의 자아를 조금 손보고 땜질하는 보수 작업이 아니다. ‘자기’라는 신을 만나 전 인격을 변환하는 재탄생의 여정이다. 그러려면 ‘자아’는 자신이 아는 것, 가진 것, 익숙한 것을 깡그리 버려야 한다. 양손 가득 낡은 것을 그러쥐고는 새로운 만남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죽기보다 힘들다.
우리의 의붓딸은 계모의 학대에도 좀처럼 집을 떠나지 못했다. 일상적 폭력을 참고 견딜지언정 감히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융은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중독’이라고 했다. 중독은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무기력한 상태를 말한다. 스스로는 어떠한 변화도 꾀할 수 없는 변용 능력의 상실! 지금 의붓딸은 폭력적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 스스로는 도저히 집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낭떠러지 끝에서 등을 세차게 떠밀리는 것이 구원이 된다. 소녀가 샘물에 뛰어드는 이 극한 상황은 신의 축복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융은 이렇게 주인공이 극한에 내몰려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버려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버리는 게 아니다. 버려지는 것이다. 그만큼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기존의 가치체계를 떠난다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버려짐’은 신의 축복이다. 수많은 영웅담이 버려짐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의붓딸의 등을 떠민 것은 신일 터, 그는 누구일까? 유력한 용의자는 저 더럽고 병든 노인이다. 여러모로 노인이 소녀를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노인은 융이 말한 내 안의 신이요, 모험을 추동하는 ‘자기’이다. 원래 어린이(소녀)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창조한다는 측면에서 ‘자기’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어린이가 모험을 떠나는 경우에는 구도가 조금 바뀐다. 이런 경우 어린이는 종종 노인과 커플로 등장하는데, 어린이는 이제 막 자기실현을 시작한 작고 볼품없는 ‘자아’이고, 노인은 그 어린이를 유혹하고 인도하는 ‘자기’가 된다.
요컨대, 지금 불쌍한 의붓딸을 곤궁과 절망에 빠뜨린 것은 저 노인이란 얘기다. 세상 참 불공평한 줄은 알았지만, 신이 이러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신이 마냥 선하고 인자할 것이라는 생각은 참 순진하다. 피터팬의 수호신 팅커벨은 말썽 많은 트러블메이커였고, 나무꾼의 수호신 산신령은 도끼를 집어 삼켰다.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어떠한가? 절망에 빠진 파우스트를 그 좁디좁은 서재에서 탈출시킨 건 천사가 아니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였다. 융은 말한다.
‘어린이’는 자립하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서는 성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버림받음은 부수적인 현상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카를 융,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원형과 무의식』, 솔, 2015, 258쪽)
신의 구원은 재앙으로 시작된다. 사실 그래야 맞다. 구원은 외부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변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천국이라 해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펼쳐지는 삶의 패턴은 똑같다. 그래서 변화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데서 시작한다. 불완전해야 낙차가 생기고, 그 낙차가 운동과 변화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언제나 우리를 끊임없이 불완전하게 한다. 늘 서툴고 보잘것없는 어린이로 만든다.
1mm, 그 불순종의 힘
샘물 깊이 가라앉은 소녀는 이제 마법의 세계에 도착한다. 여기서 ‘마법’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마법, 기적, 신비는 그 맥락이 같다. 기존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을 때, 이성의 사고로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마법’, ‘기적’, ‘신비’라는 말로 퉁친다. 지금 소녀는 일상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세계에 들어섰다. 말이 좋아 신비하고 아름다운 ‘마법’의 세계이지, 이곳은 인간과 동물의 서열조차 뒤집힌 카오스의 세계다. 이제 소녀는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배워야 한다. 기꺼이 암소와 숫양, 그리고 사과나무의 언어를 배우고 머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생각만큼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자칫 어둠에 잡아먹혀 돌아오는 길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두려운 일이다.
융 또한 저 의붓딸처럼 깊은 샘물에 빠진 적이 있다. 스승과 같던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기반을 잃은 직후였다. 당시 융은 압도적으로 밀려드는 기괴한 환상에 시달린다. 날마다 공포와 혼돈의 꿈을 꾸었고, 죽은 자들의 환영을 보았다. 융은 그 몇 년 동안의 경험을 ‘저승’에 비유하는데, 그 당시 자신은 이승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해야 했다고 말한다.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앞의 책, 346쪽)
무의식의 세계는 압도적인 힘으로 엄습한다. 혼돈과 공포로 자칫 이승의 언어를 잃어버릴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하다. 이럴 때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이 ‘의식’이고 ‘자아’다.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자아를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건 큰일 날 소리다. 자아는 우리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방향타이기에, 자아가 없으면 상황과 맥락에 따른 주체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융은 단언한다. “자아가 의식의 세계에 닻을 확실히 내리고 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칼 구스타프 융, 김세영·정면진 옮김, 『아이온』, 부글books, 48쪽)
그건 우리의 의붓딸도 마찬가지다. 의붓딸은 절체절명의 순간 무의식에 길을 물어야 했다. 하지만 영웅은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고, 인격은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반드시 의식, 자아가 정신줄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정신줄을 잡지 못한다면? 의붓딸은 이제 계모 대신 무의식의 노예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붓딸은 어떻게 노인의 노예가 되지 않고 보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까? 의붓딸과 노인의 대화를 들어보자.
노인: 아름다운 아가씨, 아름다운 아가씨! 날 좀 씻겨줘. 이렇게 지저분하게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군 그래.
소녀: 난로는 무엇으로 지펴야 하죠?
노인: 나무못과 까마귀 똥을 모아서 그것으로 불을 지피렴.
그러나 그녀는 덤불을 가져와서 물었다.
소녀: 어디서 목욕물을 길어 와야 해요?
노인: 곡식 건조장 아래에 흰 암말이 있는데, 목욕통 안에다 소변을 보게 하렴!
그러나 소녀는 깨끗한 물을 길어 온다.
소녀: 목욕솔은 어디서 구하나요?
노인: 흰 암말의 꼬리털을 잘라서 그걸로 목욕솔을 만들렴!
그러나 그녀는 자작나무 잔가지로 목욕솔을 만든다.
소녀: 비누는 어디서 구하나요?
노인: 목욕실의 돌 하나를 집어서 그걸로 문질러 닦지 뭐!
그러나 그녀는 마을에서 비누를 가져와서 그것으로 노인을 씻긴다.
(『원형과 무의식』, 앞의 책, 297쪽, 편집)
둘의 대화를 보면 의붓딸은 노인의 명을 아주 조금씩 어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노인은 오줌물을 받으라고 하지만 소녀는 멀리서 깨끗한 물을 길어 온다. 노인은 돌이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소녀는 마을까지 내려가 비누를 구해온다. 소녀는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의식적 판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소녀는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되 땅으로부터 1mm의 간격을 둔다. 융은 이 순간을 ‘불순종’이라고 불렀다. 지금 소녀에게 마지막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불순종의 능력이다. 여기서 불순종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강렬한 힘 앞에서 잠시 멈칫하는 주저함, 그 주저함 끝에 자기 주관을 따를 수 있는 ‘윤리적 능력’이다. 이것은 무의식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결단할 수 있는 주체, 하찮은 ‘자아’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민담에는 ‘불순종을 유발하기 위한’ 수많은 ‘금지’와 ‘시험’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반드시 ‘불순종’한 뒤라야만 마법에 걸린 공주와 왕자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금지만큼 주의를 끄는 것도 없다. 그것은 불순종을 유발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공주는 초월 세계로부터 인간 세상으로 옮겨져야 했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악령과 인간적 불순종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원형과 무의식』, 앞의 책, 312-313쪽)
씻기기를 열망하는 신
이 불순종이라는 윤리는 신의 입장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만일 의붓딸이 노인의 말에 순종했다면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분명 노인은 꼬질꼬질한 병든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노인이 소녀를 꾀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인은 소녀가 나타나 자신을 씻겨주길, 그래서 어두운 혼돈 속에서 구원해 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이런! 신이 고작 하찮은 소녀 따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 신은 씻기기를, 그래서 빛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융은 이 원리를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의 말을 인용해 설명한다. 파라켈수스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자연의 빛’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이 빛은 인간의 내면에 잠겨 있어서 어둡고 탁해져 있다. 이 빛에 대한 파라켈수스의 설명은 이렇다.
“자연의 빛은 성령에 의해 점화된 빛으로서훌륭히 점화되었기에 꺼지지 않는다··· 그것은 불타기를 갈망하며 오래 불탈수록 더욱더 많이, 더 크게 빛나는 그런 종류의 빛이다··· 자연의 빛 또한 점화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가지고 있다. (파라켈수스)” (『원형과 무의식』, 앞의 책, 56쪽)
지금 신의 요구를 보면 참 얼토당토하지 않다. 이건 신이 소녀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신 또한 지금 어둠에 싸여, 즉 무의식의 혼돈으로 인해 그 지혜로움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지금 신은 자기 스스로를 씻길 힘도, 그런 지혜와 언어도 갖지 못했다. 제아무리 빛나는 보석도 어둠에 싸여 있으면 그저 하찮은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빛이 무엇인가? 자그마치 신이고 생명력이다. 신은 끊임없이 빛나고자 하고 생명은 쉼 없이 창조하고자 한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신은 간절히 ‘내’가 찾아오기를, 그래서 ‘자기’를 빛나게 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인간의 인격적 성숙은 ‘자기’의 일방적 이끎으로도, ‘자아’의 의지적 안간힘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의 전체성은 바로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이 하나로 합일”(『원형과 무의식』, 앞의 책, 266쪽)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나를 이끌고, 나는 신을 찾아야 한다. 나는 무의식의 병들고 더러운 신을 구원해야 하고, 신은 현실 세계의 왜소하고 하찮은 나를 인도해야 한다. 그래서 융의 자기실현은 신과 나, 자기와 자아의 쌍방구원이다. 융이 이 길을 ‘자기실현’과 ‘개성화 과정’으로 구분해 부른 것도 그래서다. 내면의 자기가 자아를 끌어당긴다는 측면에서는 ‘자기실현’이지만, 자아가 그 자기를 찾아간다는 측면에서는 ‘개성화과정’ 이다.
자기실현을 하려는 충동과 강박은 자연의 법칙이므로 비록 처음에 그 힘이 보잘 것 없고 있을법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당해낼 수 없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아트만은 ‘작은 것보다 더 작고 큰 것보다 더 크다’에 필적한다. ‘자기(Selbst)’는 개인적 현상으로서는 ‘그 어느 것보다 작지만’ 세상과 가치로서는 ‘그 어느 것보다 크다.’ (『원형과 무의식』, 앞의 책, 261쪽)
의붓딸은 빛나는 보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자기’를 품고 돌아온 것이다. 지금 돌아온 소녀는 예전의 그 소녀가 아니다.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현실에서 자기 윤리를 지킬 줄 아는 현자다. 자기는 나의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 작다. 하지만 그 하찮음은 더 큰 자기로 가는 입구다. 그 여정을 통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크게 된 자기를 우리는 신이라, 영웅이라, 현자라 부른다.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저 민담 속 하녀 이야기를 해야겠다. 의붓딸을 괴롭히던 바로 그 하녀 말이다. 하녀는 의붓딸이 가져온 금은보화가 부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실패를 샘물에 던지고 뛰어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실패는 신에게 가는 길을 안내하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이 여정이 하녀의 것이 아니기에 길 안내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하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붓딸을 모방하며 모험을 계속한다. 그러나 남의 길을 따라가는 하녀가 정성과 성의를 다할 리 없다. 하녀는 의붓딸과 똑같은 미션을 받지만 건성건성 흉내만 낸다. 그 결과 노인은 더 더러워졌고 하녀는 보물대신 재앙만 잔뜩 안고 돌아온다.
개성화란 의식과 무의식, 나와 신 사이에서 자기만의 고유함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이름도 ‘자기’이고 ‘개성화’다. 하여 자기실현은 누군가를 무조건 모방하는 방식으로는 갈 수 없다. 그리스도, 부처님의 길이라도 그렇다. 자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원형이지만, 그 이해와 실현은 고유한 나의 길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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