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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융

[내가 만난 융] 어서 와, 마나-인격은 처음이지?

by 북드라망 2025. 11. 12.

어서 와, 마나-인격은 처음이지?

서 윤 (사이재)

  

모습을 바꾸어가며 나는 무서운 힘을 행사한다
FaustⅡ, 5막 4장 中


융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도장 깨기’를 하며 무의식적 형상들의 영역을 지나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주 더디게 중요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듯한데 내 경험을 토대로 참여하고 있지 않다 보니, 뜬구름을 잡는 듯 미로를 헤매는 듯 막막한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직은 출구도 보이지 않고 실타래를 몰래 건네준 ‘아리아드네’도 없지만, 미로 속에서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나(Mana)는 움직이는 거야
돌이켜 보면, 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 형상의 가설이 동양의 음양(陰陽)과 맥을 같이 하는 개념이라는 걸 이해했을 때, 어렵사리 문턱 하나를 넘은 느낌을 받았었다. 종잡을 수 없어 책을 덮게 된다는 ‘깔딱 고개’는 넘은 거라 여겨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웬걸,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무의식의 계위(階位)에서 아니마는 단지 최하위의 단계로 여러 가능한 모습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을 극복하면 또 다른 집단적 형상이 배열되어 이제는 이것이 그 마나(Mana)를 넘겨받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실제적인 면에서 적잖이 중요하다. (『인격과 전이』, C.G.융, 융 저작 번역 위원회, 솔, 2004, 146쪽)


우린 언제 무력감을 느끼는가. 원치 않는 기분이나 정서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책임하고 무례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타인과의 관계가 망가지는 걸 어쩌지 못할 때, 그런데도 나를 그렇게 교란하는 힘에 홀딱 반한 나머지 찬탄하면서 끌려 다닐 때,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무력감이 밀려든다.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는 아니마의 이런 변덕스럽고 부정적인 경향성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또 다른 집단적 형상이 배열될 거란다.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건지, 다만 힘의 강도가 달라지는 건지 혼란스럽다.

다행히 “마나를 넘겨받는다”는 표현에서, 퇴행이 아닌 다음 단계일 거라는 실마리를 잡았다. 융에 따르면 무의식적 형상들, 즉 그림자나 아니마/아니무스 자기(Self)는 빙의(사로잡힘)를 일으킬 수 있는 자율적 콤플렉스의 마나를 지녔다. 신성한 주술적 힘을 남태평양 일대에서는 마나라 일컫는데, 원주민들은 인간의 힘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것이라 인식했다.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각인된 것이다. 실제 빙의(憑依)를 일으켰다면, 모든 통찰과 이성을 거역하면서 마나가 의식적 삶의 장애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융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노도와 같은 시간을 어떻게 관통했는지 떠올려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융의 내면에서 말을 걸어온 아니마는 마술적인 앎과 힘으로 무장한 무의식의 대변자였다. 융은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승리에 천착하지 않았다. 두 세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의식의 일방적 태도를 전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꿈이나 환상으로 드러나는 무의식의 언어는 자아의 능동성을 요구한다. 요컨대 적극적 의지와 역량으로 꿈이나 환상에서도 태도를 바꾸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흔히 망상으로 치부하는 꿈이나 환상에서 태도를 바꾸라는 요구가, 헛소리 같고 무에 그리 중요한지 의아할 것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적극적 상상’이라 규정한 환상에의 능동적 참여가, 심리적 안정으로 이어진다고 융은 증언한다.

아니마가 직관적 성질의 심리학적 관계 기능으로 변환된다는 건, 바로 이런 상태를 의미한다. 또 다른 집단적 형상이 배열되어 아니마의 마나를 넘겨받았다면, 융이 터득한 이 균형 감각과 방향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 아니마가 마나를 상실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원시적 관념에서는 아니마를 다스린 자가 그 마나를 획득한다고 보았다. 융이 아니마와 대화하며 균형을 잃지 않으려 분투했다는 건, 지속적으로 아니마와 대결해 온 사람이 의식의 자아라는 뜻이다. 미루어보건대 “자아가 마나를 넘겨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의 자아는 마나-인격이 된다.”(같은 책, 145쪽) 하지만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이 배열되어, 자아가 몹시 골치 아플 거라는 경험적 뉘앙스를 풍긴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 따라가 보자.


시험대에 오른 자아, 마나-인격으로의 팽창
자아가 마나-인격이 되었다는 건,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미지의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다만 이 상태가 아니마를 극복한 건지, 또 다른 무의식적 형상과 뒤섞여 버린 것인지는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 사실 아니마 현상을 일으키는 무의식적 내용이 충분히 의식화된 후 뒤따르는 상태는, 팽창(inflation)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무의식의 형상들과 마나-인격과의 변별점을 ‘인격’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비상한 영향력인 마나는, 아니마/아니무스에도 속했던 힘이 옮겨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이 말했던 것처럼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의 중심엔 자아가 있다. 무의식은 인간적-인격적인 것 너머에 놓인 여러 자연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만 우리의 의식만이 ‘인격적’이라고 단언한 것도 자아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무의식에 대해 인격을 대하듯 말하는 것은 ‘나에게 복수하는 나의 위(胃)’라 하느니 차라리 ‘모욕 받은 신들의 복수’에 관해 언급하는 게 더 낫다고 여겨서이다. 아마 산 넘어 산처럼 도래한 마나-인격의 단계는, 인격의 성장을 위해 자아의 역량을 시험하는 과정이라 판단된다.

 

원형(元型, Archetyp)에 의한 빙의는 인간을 단지 집단적인 모습, 일종의 가면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가면 뒤에서 인간적인 것은 더 이상 발전될 수 없고 점점 더 위축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나-인격의 주요 특성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 위험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가면이 되는 것에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이 그 가면을 쓸 때 그 가면에 빠지게 될 위험이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는 그런 뜻에서 같은 것이다. (같은 책, 154쪽)



만약 자아가 성공적으로 아니마를 극복했다면, 즉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관계 기능으로 변환되었다면 정말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이고, 그렇다면 그 영향력이 두루 미칠 것이다. 가령, 자기 내면의 깊고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걷고, 스스로 음양이 공존하는 존재로서 세상 만물과 감응한다면, 위대한 구루(산스크리트어: गुरु)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이 위대해졌노라 방방곡곡에 외쳐도 다른 이들에게는 그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왜일까? 신성한 힘인 마나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아의 현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마나-인격은 더 큰 힘을 소유한 동성(同性)의 집단적 무의식의 상(像)과 뒤섞여 버렸을 것이다. 매혹적인 아니마 요소와 대결해 온 남자들의 경우 영웅, 추장,⸱마술사,⸱성인 같은 강력한 남성 원형이 마나를 가져갔다는 뜻이다. 스스로 영웅을 자처하거나, 영웅의 추종자로 전락하는 전형적인 의식의 팽창이다. 만약 아니무스 요소와 대결해 온 여성이라면, 태모(太母)나 대자대비한 여성 원형과의 동일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팽창의 문제로 미끄러진 걸까. 그리고 아니마와의 대결에서처럼 마나-인격을 또한 의식화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나-인격의 해소, 나에게로 가는 길
자아의 성장을 저해하는 마나-인격으로의 팽창은, 의식의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날카로운 분리와 대립은, 거의 언제나 의식적 태도의 현저한 일방성 때문에 생긴다.”(같은책, 135쪽) 앞서 상기하자고 했던 융의 경험을 다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중요한 건 승리가 아니다. 남성적 집단 형상인 마나-인격이 자아를 사로잡은 건, 자아가 아나마의 보상적 시그널에 응답한 게 아니라, 힘의 승리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융은 이를 간섭이라 표현했다. 자아의 모든 간섭은 무의식의 간섭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힘은 힘에 대항하게 되어 있다. 진정한 대결은 자아를 마나-인격의 원형과 분리하고 의식화하는 것이다.

마나-인격의 원형을 구축하고 있는 내용의 의식화는 남성에게는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여성에 있어서는 어머니로부터의 해방과 그와 함께 처음으로 지각되는 자신의 개성을 의미한다. (같은 책, 156쪽)


마나-인격의 해소를 위해서는, 이 원형이 어째서 보편적인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미지로 드러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분리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소위 부성‧모성 이마고(imago)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 어떤 사람의 삶에서는 스승이나 사제 혹은 의사가 부모 같은 역할을 하면서 자아의 성장을 저해하기도 한다. 지혜롭고 자애롭고 추앙받는 그 힘에 동화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서, 왜 굳이 분리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안주한다면, 가혹하게 들리겠지만 소아기의 인격 수준에 멈춘 채 부질없이 늙어가게 된다.

그렇기에 통과의례에서처럼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견디고 얻은 해방감은, 정신적 아들‧딸로의 재탄생이라 인식된다. 이에 대해 융은 ‘처음으로 지각되는 자신의 개성’이라 했고, ‘가장 위대한 정신적 의미를 가진 변환의 신비’라고도 했다. 비로소 의존과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나를 찾는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인격의 성장을 위한 여정에서 가장 넘어서기 어려운 벽이 신뢰와 친밀함에 기반한 관계라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성장의 변곡점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끄는 건, 다름 아닌 의존이라는 걸 아프게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라 했다. 분명히 어떤 목표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순수한 자연의 과정이라 한편으로는 의도가 없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잠재적인 지향성을 가졌다. 융이 언급한 그 ‘잠재적 지향성’의 측면에 신뢰를 보내며 주목해 보자. 무의식의 형상이 더 이상 빙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제 누가 또는 무엇이 마나가 되는가?

 



중(中)’을 지향하는 개성화(individuation)
자아가 힘에 대한 어떤 요구도 주장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비상한 영향력인 마나는 의식적이며 무의식인 어떤 것, 아니면 의식적이지도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어떤 것의 소유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융의 해석이다. 가장 고귀한 곳부터 가장 누추한 데까지 이르는 ‘작은 것보다 더 작고 큰 것보다 더 큰’ 어떤 것 말이다.

이 어떤 것이란 우리가 구하던 인격의 ‘중앙점’, 대극 사이의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 또는 대극을 융합하는 것 또는 갈등의 결과, 에너지론적 긴장의 성과, 인격의 생성, 가장 개인적으로 전진하는 한 걸음, 다음 단계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48쪽)


‘어떤 것’은 말하자면 지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잠재적 중심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융은 이 중심을 자기(das Selbst)라 불렀는데, 인식 불가능한 본체를 표현하는 구조이자 심리학적 개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무서운 힘일 수도 있는 마나가 잠재적 중심인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아득한 시간 이래 경험을 통해 집단적 원형으로 형성된 마나-인격이, 다른 차원의 성숙한 단계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무의식적으로 다른 개체와 섞인다는 건, 개체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며 개별화가 안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힘든 과정을 차근차근 다 밟고서 자아가 집단성의 뒤얽힘에서 마침내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다시 말해 자기(Selbst)를 의식화하는 ‘개성화’된 상태를 융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자아가 허용하지 않는 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만약 자아가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 어떤 것도 방해하며 그 사이에 끼어 들 수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에게 초인의 의연함 또는 완전한 지혜의 우월함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위치가 보장될 것이다. (같은 책, 152쪽)

마치 동양의 성인들이 도달한 경지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융이 ‘자기’라 불렀던 인격의 중앙점은 상황과 변수에 부응하며 이동하는 ‘중’의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생각해 보면, 의식의 중심인 자아가 무의식과 대면하고 동화되는 과정은, 사로잡힐 위험을 동반하긴 해도 의식이 무의식과 서서히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중’의 시의적절한 움직임 같은 것인데, 가령 이런 것이다.

내 방 안에서의 중심과 집안 전체에서의 중심 그리고 마을 혹은 나라의 중심은 매번 달라지기 마련이다. 방에 표시해 놓은 중심점만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면, ‘중’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와 개인적 무의식 사이의 중심과 더 깊이 확장된 집단적 무의식과 자아 사이의 중심도 다를 수밖에 없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게 정상이다. 융이 말한 잠재적 중심도 고정된 한 점이 아니라, 그야말로 ‘중’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융은 ‘개성화’ 과정에 대해 ‘가장 개인적으로 전진하는 한 걸음’이라 묘사했다. 자아가 아니마 형상이나 마나-인격 형상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지향하는 건, 장소가 아니라 상태인 것이다. 형체가 없기에 물질이나 색깔 등의 상징을 통해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시도는 동‧서양 공통인 것 같다. 명말 청초의 학자 왕부지는 ‘중’을 상징하는 황색에 대해 “노랑이라는 색깔은 흰색에 가까우면서도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지는 않고, 붉은색에 가까우면서도 혼을 빼놓을 정도로 농염하지는 않으며, 푸른색‧검은색과 함께 있어도 서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아니마의 힘과 마나-인격이 가진 힘의 경향성을 떠올려 보라. 눈부시고 혼을 빼놓을 만큼 농염하고 다른 색의 존재감을 방해하며 사로잡지 않는가 말이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 그리고 개체와 타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이 어떤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지, 융은 ‘개성화’ 과정을 통해 그리고 동양에서는 ‘중’의 사유를 통해 전하는 것 같다.

나는 아니마와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그런 감정을 갖게 되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오늘날 내게는 그 관념들이 직접 의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무의식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나의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C.G.융,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 343쪽)

 

감정이라 표현한 아니마라는 ‘중개자’가 더는 필요하지 않은 인격으로 융은 ‘개성화’되었지만, 난 여전히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간절한 사람이다. 아마도 내겐 융의 철학이 그리고 동양 사유와의 횡단이, 어둠 속을 더듬으며 나아가게 하는 실타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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