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하고, 기도하고, 작업하라! 연금술과 전이
정기재 (사이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해답도 있을 수 없다."
(카를 구스타프 융,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조성기 옮김, 김영사, p270)
깊은 절망에 빠지거나 고독에 빠졌을 때, 민담 속 주인공들은 모험을 떠난다. 모험은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고독한 주인공이 홀로 떨쳐 일어나는 영웅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다. 나는 어쩐 일인지 후자에 더 마음이 간다.
동화 속 공주나 왕자는 늘 어딘가에 갇혀 있다. 높은 탑, 야수가 되는 저주, 깊은 잠… 그들은 어두운 돌탑 안에 갇혀 스스로 문을 열 수 없다. 물론 지금 우리는 마법에 걸리거나 탑에 갇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끝없는 고독, 되풀이되는 상처, 갈 곳 잃은 자아. 저 라푼젤이 갇혀 있는 돌탑보다 더 높고 캄캄한 감옥이다.
만일 자력으로 문을 열고 나갈 힘이 남아 있다면 저 영웅처럼 홀로 자기 탐구에 나서도 좋겠다. 그런데 만약 안쪽에서 문을 찾을 수 없다면?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출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그럴 때 우리는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를 찾게 된다. 밖에서 문을 열어줄 사람, 고난의 모험을 함께할 누군가.
심리치료라는 여정도 이와 비슷하다. 자기를 옭아매고 있는 파괴적 감정, 관계의 파탄은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도반, 스승, 그리고 의사. 이때 스승이나 의사는 단순한 조언자가 아니다. 고립된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 함께 고난을 헤쳐 나갈 동반자다. 그만큼 의사와 환자가 맺는 심리적 관계가 중요한데,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전이(transference)’라는 말로 풀어 나간다.
전이는 환자가 의사와 심리적인 상호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이다. 환자는 정신적 해리를 극복하려면 의사와의 심리적인 관계를 필요로 한다. (카를 융,『정신요법의 기본 문제』,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솔, 2001, p113)
전이는 환자가 의사에게 심리적으로 연결되려는 시도다. 전이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환자가 의사와 대화할 준비가 됐다는 뜻이요, 치료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와 융은 모두 이 ‘전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관계 형식과 치유의 종착점은 달랐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진단할 것인가, 감응할 것인가
‘옮겨 오다’ 혹은 ‘이전하다’라는 뜻의 전이(Übertragung)를 심리학의 핵심 개념으로 도입한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에게 전이란, 어린 시절의 억압된 감정을 의사에게 옮겨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어린 시절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느꼈던 강렬한 결합욕망, 그 금지된 욕망이 의사에게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는 종종 의사를 아버지이면서 연인처럼 느낀다. 이건 굉장히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일이지만 치료 과정에서는 꼭 필요하다. 프로이트는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 일부러 유도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은 이 욕망을 불순하다고 여겨 무의식에 꽁꽁 숨겨 버렸고,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 다른 것들에 자기를 덧씌워 왔다. 그래서 필요한 건 그 본래 욕망을 눈치 채는 것이다. 투사가 일어나는 순간, 의사는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환자에게 하나하나 보여준다. 그러면 환자는 자기 욕망을 깨닫게 되고, 그동안 괴롭혀왔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치료는 보통 여기서 종료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전이는 억압된 욕망의 우회로이므로, 진단과 해석이 끝나고 나면 전이도 해소된다. 의사-환자 관계도 여기서 멈춤! 참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프로이트에게는 역전이도 금지된다. 역전이란 의사가 환자에게 느끼는 감정적 반응인데, 이것은 환자의 욕망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의사의 판단력도 흐리게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분석할 때, 환자를 긴 소파에 눕히고 자신은 그 뒤나 옆에 앉아 환자의 눈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감정적 동요, 역전이를 피하기 위해서다.
융도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무의식에는 잊혀 졌거나 외면된 감정과 충동들이 우글거린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이 그처럼 왜소하고 찌그러진 것들뿐이라면 조금 슬픈 일이다. 덧붙여 묻자면, 우리가 그토록 결합하고자 열망하는 대상이 진짜 현실의 아버지인지도 의문이다. 꿈에서 환자들이 종종 아버지와 에로틱한 관계에 놓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꿈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건 곤란하다. 꿈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대개 노인이나, 거인, 혹은 초인처럼 신(神)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신(神)은 흔히 우리가 아는 외부의 인격신이 아니다. 이 신은, 내 안에 있는 더 큰 나, 즉 자기(Selbst)의 상징이다.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을 추동하는 내 안의 중심인 자기.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저 깊은 무의식의 중심인 자기가 아닐까? 지금 환자는 자기에게 이르는 길, 그 내면과 소통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이는 숨겨진 욕망의 투사가 아니라, 의사에게 보내는 구원 요청이다. 혼자서는 도무지 그 무의식과 대화할 수 없어서, 그 깊고 어두운 심연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래서 보내는 구원 요청 말이다.
여기서 전이에 대한 융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융에게 치료는 환자와 의사가 함께 하는 ‘외적 및 내적 성질의 모험(『인격과 전이』, p64)’이다. 그 어두운 무의식을 함께 탐험하는 동안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전우애 같은 깊은 유대감이 생긴다. 마음은 수도꼭지처럼 잠갔다 풀다 할 수 없기에 그렇다. 그래서 융은 역전이를 금하지 않는다. 아니 금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정신적 유대감은 일종의 전염이며 감응(感應)이라고 했다. 감(느끼고)하고 응(응답하기)하기! 이건 서로 쌍방이며 상호적이다. 융이 전이 대신에 상호적 관계를 뜻하는 ‘라포르(rapport)’라는 말을 종종 쓴 것도 그런 이유다.
의사의 심리적 상태는 전이에 의하여 변한다. (…) 그는 전염되고 환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이로써 환자와 의사 양쪽에서 마적(魔的)인 것을 지니고 있는 어둠과 직접 대결하게 된다. (카를 융, 『인격과 전이』,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솔, 2022, 『인격과 전이』, p189)
이처럼 진료실에서 의사와 환자의 심리는 서로 전염된다. 이 전염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무의식이 스며드는 심층적 장의 접촉이다. 융은 이런 전염으로부터 의사와 환자 사이에 ‘공동의 무의식’이 생기고, 이 공동의 무의식이 바로 치료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버섯은 서로 다른 두 종이 만나면 땅 밑에서 균사를 뻗어 네트워크를 만든다고 한다. 이때 버섯은 각자 별개의 존재이지만 땅속에서는 연결된다. 이런 경우 한쪽 버섯이 변화하면 다른 버섯도 변한다. 한쪽이 죽어 가면 다른 버섯이 양분을 나눠줄 수도 있다. 지금 이 둘이 여행해야 하는 것은 자그마치 무의식이다. 저 버섯처럼 서로를 의지해 어둠과 대결할 수밖에 없다.
연금술사와 돌, 그들의 공동작업장
이제 의사와 환자는 함께 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 모험은 어떻게 전개될까? 아무래도 심적으로 건강한 쪽은 의사이니, 의사가 진두지휘하고 환자는 그저 따라가는 걸까? 뜬금없다고 느끼겠지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융은 ‘전이’를 연금술에 비유한다. 그의 글, <전이의 심리학>은 아예 ‘연금술 입문’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연금술하면 마법사가 실험실에서 어떤 돌이나 수은 같은 것을 가지고 황금을 만들겠다고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음습하고 수상쩍은 이미지는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성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보니 다소 폄훼됐지만, 연금술사는 본래 화학자이자 의사이고 철학자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철학자이자 의사였던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유명한 연금술사이기도 했다. 이런 연금술사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준 사람이 융이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연금술서가 황금을 만드는 마법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변환과정’을 기록한 수행서이자 철학서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인격과 전이』, p209)
융은 연금술에 완전히 매료됐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융 저작집 9권 중에 거의 2권 가까운 분량이 연금술에 관한 것이다. 융은 연금술을 통해 핵심 개념인 ‘개성화’ 이론을 정리했다. 요컨대, 부패하고 썩은 ‘돌’이 고귀하고 빛나는 ‘신비의 돌’로 변화하는 과정은, 한 사람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한편, 융은 연금술사와 ‘돌(라피스)’이 맺는 특별한 내적관계에 주목한다. 연금술사들은 자신과 돌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금술사의 ‘심리’가 물질적인 ‘돌’과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과 질료 사이에는 가장 내적인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가 물질(materia)에서 기대하는 것과 같은 과정을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사물들은 그것과 유사한 것에 의해서 완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를 융,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p65)
와우, 놀랍다! 돌을 바꾸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돌과 닮아야 한다니. 지금 연금술사는 저 ‘검은 돌’이 ‘신비의 돌’이 되려면 먼저 연금술사의 마음부터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과 질료’ 사이가 비밀스럽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걸 오랫동안 미신이라고 불렀지만,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은 심리와 물리가 둘이 아님을 일찌감치 과학적으로 논증했다. 실제로 연금술사들은 작업을 하는 동안 금식하고, 명상하며, 연구했다. 자신의 심리가 이 실험의 중요한 일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다.
연금술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아예 이 실험의 주인공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저 ‘검디 검은 돌’이라고 선언한다. 유명한 연금술서인 『장미원 Rosarium』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니 분명한 것은 현자의 스승은 현자의 돌(라피스)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아무리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자발적으로 행한다고 말하더라도 현자는 돌의 스승이 아니고 오히려 머슴이다.” (『인격과 전이』, p344)
연금술사는 말한다.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머슴이요, 돌을 다루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고. 우리는 연금술사는 주체요 돌은 객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대단한 오해다. 돌은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연금술사는 그 재료가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자이다.
이 말을 전이로 옮기면 이렇다. 지금 이 진료실의 주인공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환자는 비록 검고 혼탁한 혼합물이지만, 그 내면에는 스스로 신비한 돌이 될 잠재성이 숨어 있다. 지금 환자가 배워야 하는 것은 내면의 자기(selbst)와 소통하는 방법이지, 의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융의 독특한 ‘전이’의 철학을 볼 수 있다. 융에게 의사는 진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체험하는 사람이다. 표준화된 병명으로 이름표를 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와 함께 길을 내는 동반자다. 그래서 그는 모든 치료의 과정을 환자와 함께하는 ‘하나의 개척 작업’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틀에 박힌 공식 치료 절차’를 밟을 수 없는, 그래서 매번 환자와 새로운 길을 내야 하는 개척.
그런데 이 길은 어렵고 험한 길이다. 융은 처음 환자의 무의식을 마주할 때, 몹시 ‘힘들고도 괴롭다’고 고백한다. 연금술사들이 ‘불 속에서 불도롱뇽이 되어 스스로 달구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듯, 의사도 환자의 무의식에 압도되고 사로잡힌다. 그 순간 의사는 유혹에 빠진다. 차라리 의사라는 권위, 그 페르소나 뒤에 숨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융에게 의사는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다. 그 길은 환자의 길이기도 하지만, 결국 의사 자신의 변환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연금술사는 신을 모시듯 돌(라피스)의 변화에 주위를 기울인다. ‘연구하고, 명상하고, 땀 흘리고, 일하고, 끓’인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융은 의사에게 스스로 분석을 받고 마음을 점검하도록 요구한다. 돌의 변화에 연금술사의 마음이 연동되듯, 환자의 변화에는 의사의 변화가 포함된다. 의사 역시, 감응하고, 기도하고, 작업해야 한다.
전이, ‘나ich’와 ‘너du’의 신비한 혼례
융의 치료과정은 어딘가 예술가를 닮았다. 흔히 말하듯,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재료 안에 숨어 있던 작품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가 그저 수동적인 매개자라는 뜻은 아니다. 만일 ‘그’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그’ 작품 역시 지금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도 이와 같다. 진료실 안에서 둘은 함께 감응하고, 함께 변한다. 이 특별한 관계를 연금술에서는 ‘신성한 결혼’에 비유한다.
연금술사들이 말하는 신성혼과 신비의 혼례 같은 ‘융합’은 (…) 한편으로는 정신치료 과정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의 전이의 핵심적 의미와 일치한다. (『인격과 전이』, p354)
연금술에는 상징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왕과 여왕’, ‘신성한 결혼’은 핵심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섞이고, 분리되고, 다시 결합되는 과정을 ‘결혼’에 비유한다. 그런데 융은 의사와 환자, 나와 너라는 인간관계 속에서도 이런 결혼 관계가 맺어진다고 말한다. 결혼이라니, 어딘가 좀 과한 거 아닌가? 하지만 흥분하기 전에, 이건 어디까지나 상징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여기서 ‘결혼’은 로맨스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상징은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 덧씌우는 게 아니다. 그럼 연금술에서 말하는 이 ‘신비한 결혼’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게 환자와 의사의 ‘전이’에는 어떻게 적용될까?
왕과 여왕의 결혼을 이해하려면 연금술 과정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게 좀 까다롭고 복잡하다. 연금술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더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융이 나누어 정리한 3단계를 따라가 보자.
첫 번째 단계는 흑화(黑化), 니그레도(nigredo) 단계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검은 것보다 더 검은, 검디검은 상태다. 여러 가지 원소들이 어지럽게 섞여 유독성 증기를 내뿜는, 부패하고 혼란스러운 물질이다. 이건 환자와 의사 사이에 전이가 막 일어난 단계와 닮아있다. 상대에게 내 억압된 욕망을 투사하는 바로 그 단계 말이다. 이때 환자가 상대에게 보는 건 ‘너’라는 타자가 아니라 내 욕망이다. ‘나’와 ‘너’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진정한 관계가 불가능하다. ‘너’가 있어야 관계도 생기는데, 모든 이에게 자기 욕망만 투사하고 있기에 ‘너’가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단계는 백화(白化) 알베도(albedo) 단계다. 하얗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지럽게 섞여 있던 것들이 씻기고 정화된다. 이때 연금술사는 불을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혼탁한 것들을 분리해 낸다. 전이에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덧씌웠던 자기 욕망을 걷어내고, 의사가 나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순간은 ‘관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다. 상대가 내 욕망의 거울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타자’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제껏 온통 나뿐이던 세상에 비로소 타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타자는 나와 같지 않다.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알베도 단계에서는 그 다름과 이해되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진정한 대화는 이 알베도 단계에서 시작한다. 대화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며 함께 변해가는 연금술의 비법이다. 융이 프로이트와 다르게 환자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한 것도 그래서다.
다음은 세 번째 단계인 적화(赤化) 루베도(rubedo)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연금술사는 증류기의 뚜껑을 열고, 신비의 돌을 꺼낸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신비한 돌은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이 아니다. 묘하게 하나같기도 하고, 둘 같기도 하다. 마치 자웅동체처럼 괴이하다. 연금술은 이것을 ‘대극의 합일’이라 부르고 연금술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남과 여, 불과 물, 태양과 달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껴안은 상태. 이건 마치 몸의 왼쪽은 여신이고 오른쪽은 남신인 인도의 신과 같다. 이들은 둘이면서 하나다. 하나로 연결돼 있지만 자기의 고유함, 그 다름은 결코 잃지 않는다. 연금술이 말하는 ‘신비한 결혼’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둘이 그렇게 다른 채로 공존하는 것이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그것을 ‘신비한 혼례’라고 불렀을까. 신비한 혼례는 둘이 하나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끝까지 타자인 채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변형이다. 나와 다른 타자와 함께 할 때만 가능한 변형.
왕자 공주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신비한 결혼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라푼젤 이야기를 다시 보자. 처음엔 라푼젤이 왕자에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탑에서 꺼내준 것도 모험에 앞장섰던 것도 왕자다. 그런데 중간에 반전이 생긴다. 저주에 걸린 왕자가 눈이 멀고, 이번에는 라푼젤이 그를 구한다. 모험을 하면서 공주는 점점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더 이상 구원받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구원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게 바로 융이 말한 신성한 결혼의 핵심이다. 서로 단단한 자기가 되어야만 진짜 ‘결혼’도 할 수 있다. 왕자와 공주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것도 그래서다. 두 사람이 오래오래 함께하려면, 서로 단단하게 자기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오래오래 변치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그리고 변화는 서로의 다름에서 비롯된다.
융은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자신도 함께 변했고 그만큼 성숙해졌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그의 환자 중 몇몇은 나중에 제자가 되어 분석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이는 그 자체로 자연스런 현상으로 결코 의사의 진료 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관찰된다.”(『인격과 전이』, p232) 그렇다. 전이는 상담실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도, 가족과도, 어느 낯선 누구와도 전이하고 변형된다. 전이의 심리학은, ‘너’와 ‘나’가 서로의 구원이 되는 관계의 연금술이다.
남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결코 전체성을 갖지 못한다….
전체성은 나Ich와 너Du의 합성으로 이루어진다. (『인격과 전이』,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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