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붙고 싶은 마음
광장과 동물
방에 홀로 있음에도 혼자가 아니다. 바닥을 쓸고 닦다 보면 작은 생명체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바닥을 기어 이동하거나 벽과 천장에 머물거나 날갯짓을 하며 허공을 가로지른다. 나는 그들을 박멸하거나 퇴치하는 대신 집 밖으로 내보낸다. 파리채 대신 작은 망으로 그들을 채집한다. 죽이는 것보다는 내쫓는 것이 나으니까. 생명을 죽이지 않으려는 윤리적 행동 이후에도 찝찝한 마음이 남는다. 바깥으로 내모는 인간과 내몰리는 비인간 사이의 힘의 불균형이 남는다. 인간(안)과 비인간(밖) 사이에 그어진 경계가 남는다.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인문약방 연재를 시작하며 여러 활동에 연루되었다. 도살장 앞을 찾아가 비질 활동을 하고, 서울역 광장에서 살처분 반대 퍼포먼스에 참여했다. 죽어가는 동물들을 목격하고 증언하며,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정동을 마주하고, 표현했다.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찾아와 활동을 멈춘 이후에도, 다른 누군가는 계속 활동을 이어갔다.
12.3 비상 계엄이 터지고,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 활동가들도 구호를 외쳤다.
동물사회도 외친다!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발화되는 '멧돼지', '개돼지' 같은 동물혐오 표현을 규탄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비인간도 배제당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동물들의 행진! 탄핵너머, 공생과 연대로 새 세상을!
민주주의의 외연을 확장하고 '국민'의 지위를 심문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이크를 쥔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는 빼고, 누구는 나중에! 이런 식의 민주주의는 가짜 아닙니까? 누구는 돈이 안 되니까, 누구는 표가 안 되니까. 이런 식의 가짜 민주주의 뒤집으러 오셨지 않았습니다?
광장에 다녀온 누군가는 이렇게 적었다.
깃발이 아주 많았다. 기상천외한 깃발들을 많이 봤지만 갈 곳이 없었다. 죽어가고 있는 돼지들, 감금되어 있는 비국민, 정신병자, 삶이 철거당하는 성노동자, 한국을 반대하는 '반국가세력'을 환영할만한 곳이 없었다.[1]
그리고 누군가는 동물들의 보금자리(sanctuary)를 지키며 목소리를 냈다.
감금되고 결박되어 광장에조차 갈 수 없는 삶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겨누고 있는 총구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국민을 향한 폭력'이 아닌, '모든 생명에 대한 폭력' 에 저항할 때, 혐오를 동력으로 나아가는 체제를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2]
바닥에 붙고 싶은 마음
<살처분폐지연대>에서 기획한 송년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살아가고 있었던’ 비인간 동물을 전시와 퍼포먼스로 함께 기억하는 애도제였다.
"우리는 연말을 맞아 폭력적이고 종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죽어간 비인간동물을 위해 애도하고자 합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이 거리를 채운 12월,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멈추지도 드러나지도 않는 죽음에 대해 애도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감각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애도이기도 합니다. (...) 한 해 동안 가려져 온 비인간 피해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며 함께 한 해를 돌아봅시다. 이 애도가 일으키는 것이 무기력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겠지만 그 끝에 '그러므로'로 시작되는 새로운 의지가 생기고 그것과 함께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3]
애도제 당일 아침, 사고 소식이 들렸다. "무안공항 항공기 추락... 탑승자 28명 사망" 심장이 요동쳤다. 뉴스를 확인할 때마다 사망한 인원이 계속 늘어났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로 애도제에 참여했다. 전시장에는 내가 다녀온 비질 현장의 사진도 보였다. 이 세상에 없는 닭이 트럭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코너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돼지 농가의 화재 현장을 담은 영상이 나왔다. 감금틀에 몸이 낀 채로 타 죽은 돼지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희음님이 쓴 '돼지와 돼지와 돼지와 돼지'라는 글을 읽었다.
"나는 돼지다. 돼지 옆의 돼지다. 돼지 옆의 돼지 옆의 돼지 옆의 돼지 옆의 돼지다. 웃는 돼지, 우는 돼지, 소리 지르는 돼지, 사랑을 하는 돼지, 장난을 치는 돼지, 발을 헛디디는 돼지, 우정을 나누는 돼지, 같이 달리는 돼지, 상상을 하는 돼지, 치마를 입은 돼지, (...) 옮겨지지 않는 돼지, 던져지지 않는 돼지, 매달리지 않는 돼지, 벗겨지지 않는 돼지, 분할돼지 않는 돼지, 냉동되지 않는 돼지, 수출되지 않는 돼지, 가열되지 않는 돼지, 소화되지 않는 돼지, 끝까지 살다가 죽는 돼지, 죽어서 느리게 흙이 되는 돼지, 돼지 옆에서, 돼지 옆의 돼지 옆의 돼지 옆의 돼지 옆의 돼지 옆에서 느리게 느리게,"[4]
대규모 닭 농가를 방문한 기린님의 글을 읽었다.
"수천 명의 두 눈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어요. 수많은 눈들에 압도당해 바로 문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손과 발이 벌벌 떨렸어요.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좁은 케이지에 감금된 채, 나의 바로 위층 케이지에 사는 닭들의 똥과 오줌을 얼굴에 그대로 맞는 꿈을 꿉니다. (...) 나는 살고 싶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마음에 맞게 자신을 꾸릴 수 있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축축한 맨땅을 밟은 채로 눈송이와 빗방울의 리듬감을 맨살로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햇빛을 즐기거나 피할 수 있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갇히거나 죽임당하지 않은 채로 물결 또는 바람과 나란히 몸 맞추어 나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생명을 사고 팔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5]
중간 중간 뉴스를 확인했다. 사망자는 급격히 늘었는데 생존자는 두 명에 머물러 있었다. 탑승객이 가족과 마지막으로 주고 받은 문자를 읽었다. 끝내 닿지 않은 마지막 메세지를 읽었다. 전문가들은 사고 원인을 여러 각도로 추정했다. 누군가는 버드 스트라이크로 인한 엔진 고장을 거론했다. 엔진 쪽에서 불꽃이 튀는 비행기 영상을 보았다. 사라진 새들이, 평소처럼 날갯짓을 하다가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새들이 그려졌다.
저녁에는 퍼포먼스 공연이 이어졌다. 첫 순서로 세원님과 몰라님의 108배 퍼포먼스가 있었다. 도살장 비질에서 했던 애도 행위를 무대에서 재현하는 퍼포먼스였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세원님은 애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할 때 무기력해지는 마음을 고백했다. 그럴 때 땅바닥에 납작 붙고 싶어진다고 했다. 공연 중에 누구든 나와서 같이 절을 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도살장 앞에서 같이 절을 했던 동료가 내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도 무대에 올라 같이 절을 했다. 잠시 후에 또 한 사람이 올라와 같이 절을 했다. 나는 관객석 너머 어두운 배경 어딘가를 향해 절을 했다. 눈을 감고 절을 했다.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절을 했다. 비질을 처음 다녀온 날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이렇게 적었다.
"비질 현장을 벗어났지만 그날 입은 옷에서는 여전히 돼지들의 냄새가 났다. 태연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내 몸에 기록된 돼지들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은 자를 돌볼 수 있는 세계가 있을까. 어딘가에선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 새로운 미래를 함께 도모할 수 있을까. 나는 비질과 돌봄 사이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있는 취약한 존재들과 함께, 앞으로 어떤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6]
트럭에 실려온 돼지들, 소들, 닭들이 떠올랐다. 화재로 타 죽은 동물들이 떠올랐다. 살처분되는 동물들이 떠올랐다. 비행기에서 승객이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끝내 닿지 않은 문자가 떠올랐다. 알지 못하는 유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저 살아가고 있었던 많은 존재들이 떠올랐다. 생추어리의 동물들이 떠올랐다. 새벽과 잔디가 떠올랐다.
한없이 바닥에 붙고 싶은 마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계속 절을 했다.
방명록[7]
"애도제를 하고 또 나가면 너무 쉽게 마주치는 죽음들, 감금된 몸들. 그 앞에서 흔들리겠습니다. 그 앞에서 무너지겠습니다. 그 앞에서 애도하겠습니다."
"아는 죽음. 모르는 죽음. 모든 죽음을 애도합니다. 다시 만납시다."
[1] 달연. https://www.instagram.com/p/DDUWSluyGxp/
[2] 새벽이생추어리. https://www.instagram.com/p/DDjGc18p6ip/
[3] 살처분폐지연대. https://www.instagram.com/p/DD8mWKtvIJc/?img_index=1
[4] 희음, <돼지와 돼지와 돼지와 돼지>의 일부.
[5] 기린, <나는 살고 싶습니다>의 일부.
[6] 경덕,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9회.
[7] 애도제 방명록 쪽지 중.
애경 제주항공 참사로 희생된 모든 생명들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부족한 글에 응답해주신 선생님들, 활동가들께 감사드립니다.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돼지만나러갑니다] 퀴어 동물의 섹스, 그리고 돌봄 (0) | 2025.04.09 |
---|---|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3편 - 동물 부고(訃告) (2) | 2025.03.19 |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2편 - 초코의 수술 (1) | 2025.02.12 |
[돼지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1편 - 지구에 살 자격 (0) | 2025.01.15 |
[돼지 만나러 갑니다] 멧돼지의 '출몰'과 새로운 '우리' (1) | 2024.10.23 |
[돼지 만나러 갑니다] 안녕, 돼지들 (0) | 2024.09.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