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의 '출몰'과 새로운 '우리'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2023).
새벽이생추어리 비질 활동가.
문탁네트워크 공부방, 인문약방 킨사이다 멤버.
오래 머무르고 많이 이동하는 일상을 실험합니다.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혈투로만 그려지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낯선 존재와의 ‘얽힘’을 ‘감염(병원성 미생물이 사람이나 동물, 식물의 조직, 체액, 표면에 정착하여 증식하는 일)’이라고만 명명하는 의학적 진단은 어딘가 불충분해 보였다."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박쥐와 낙타가 ‘나쁜 자연’을 전파한 용의자로 소환되었다. 우한 사람들과 동양인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바이러스의 박멸을 외쳤다. 마스크는 필수품이 되었다.
격리 중에 식물들이 새롭게 보였다. 당시에 에코섹슈얼(자연을 관능적이고 섹시하게 바라보는 사람, 자연 사물과 성행위를 나누는 사람)과 관련된 기사를 읽다가 혹시 나도? 하는 호기심에 방 안에 있는 식물들을 가까이 응시했다. 잎을 만지고 입술을 대보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내가 사는 원룸에도 식물이 있다. 이사 오기 전부터 키운 몬스테라와 디시디아, 집들이 선물로 받은 아비스, 동네 꽃집을 지날 때 사들고 온 작은 다육식물들과 아이비, 작은 올리브 나무. 나는 에코섹슈얼은 아니지만 잎과 흙을 만지고 냄새를 맡다 보면 무언가 오고 가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어쩔 땐 식물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저들과 친족을 맺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나 코로나 시국은 잠잠해졌고 방에 있는 식물들은 대부분 시들어 죽었다. (살아남은 몇몇은 좋은 곳으로 입양을 보냈다.) 어떤 존재의 '출몰'이 '방역', '백신', '격리', '박멸' 등의 제도화된 언어로 재구성되는 동안, 누군가의 '신체'는 인간적이지 않은 존재들과 마주치는 '접촉면'으로 재조직되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피부 안팎을 훑고 지나갈 때 몸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불안과 초조, 기쁨과 경의를 오가며 감정이 널뛰었다. 인간 몸과 비인간 자연들 사이의 상호연결, 상호교환, 그리고 이동을 탐구하는 스테이시 앨러이모는 "인간을 넘어서는 세계와 인간 사이의 물질적 상호연결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특히 관심 또는 경이의 주체로서 사람 또는 사물과 관련되는 사물의 상황이나 상태"(옥스퍼드 영어 사전)라는 물질matter(또는 문제theh matter)의 관용적 정의에 잠복한 윤리학을 환기시킬 수 있다."[1]라고 썼다.
스테이시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 사이의 접촉 지대에 주목한다. 인간을 넘어서는 세계와 맞물리는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란 개념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이 궁극적으로 '환경'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 지점으로부터 강력한 윤리적, 정치적 가능성이 부상한다고 말한다. 비인간 자연을 관심 또는 경이의 주체로 생각할 때 바이러스와 식물 각각은 인간과 어떻게 맞물릴까? 비인간 자연을 적대, 또는 호혜 관계로 규정하기 전에, 분리될 수 없는 '우리'로 전제하면 어떤 윤리적, 정치적 가능성이 펼쳐질까?
동물의 행위력
바이러스와 식물이 인간 너머의 관계를, 그리고 새로운 '우리'를 상상하게 했다면, 비인간 세계로 나를 가차없이 끌어당긴 건 동물이었다.
구조된 동물들이 거주하는 새벽이생추어리에는 두 명의 돼지가 산다. 그들은 각각 '식용동물'로, '실험동물'로 태어났지만 탈출과 이주를 거쳐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다. 나는 구조된 동물을 돌보는 선량한 인간 봉사자로 그들을 만났지만, 돼지들은 '인간'과 '동물'로 구획된 범주를 가차 없이 찢고 흔들었다. 나는 300킬로그램이 넘고 엄니가 날카롭게 자란 돼지가 나를 향해 돌진해올 때 포식자에게 쫓겨 도망치는 동물이 되었다. 내가 돼지의 똥을 줍느라 진흙탕을 밟고 풀숲을 헤치는 동안, 돼지는 어슬렁 어슬렁 산책을 하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인간성과 동물성의 경계가 교란된 생추어리에는 '도망치고 풀숲을 헤치는 인간'과 '산책하고 사색하는 돼지'가 한데 공존했다.
돼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고양이가 종종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양이의 행동을 주시했다. 크게 경계하지 않는 것 같으면 서서히 자세를 낮췄다. 그럼 고양이 또한 나를 유심히 살폈다. 어느날 한 명의 고양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와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았다. 나를 보았다 다른 곳을 보다가 했다. 신경을 쓰는 둥 마는 둥, 그러다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찰칵! 촬영 버튼을 눌렀다. 그때 찍은 사진을 내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였고 서로의 언어도 몰랐지만 무언가를 함께 했다. 우리는 '사진을 찍는 인간과 포즈를 취하는 고양이'라는 작품(상호응답)을 공동 창작했다!
비인간과의 만남이 호혜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론 적대하고 공격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돼지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다가가면 몸통 박치기로 크게 다칠 수 있다. 고양이의 심기를 잘 살피지 않으면 냥냥 펀치를 맞거나 손등에 발톱 자국이 남을 수 있다. (물론 같이 사진도 찍을 수 없다.) 인류학자 전의령은 이렇게 썼다.
"인류학과 여타 사회과학에서 행위력이라는 개념은 행위자actor가 행사하는 능력 또는 힘으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데, 여기서 비인간은 오랫동안 행위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기술, 의료, 환경, 동물, 심지어 기업과 시장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최근의 인문사회 연구는 비인간의 행위력을 진지하게 고려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이성과 의도, 자율성을 전제로 하는 근대 인간주의적humanist 행위자, 행위력 개념에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한다." 『전의령, 동물 너머, 22쪽』
전의령은 인간의 질서 속에서 순응하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지 않는 동물의 행위력에 주목한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행위자로서 동물들을 재조명한다. ‘영리한 한스’Kluger Hans[2]를 인간과 동물의 상호학습으로 재해석한 벵시안 데스프레Vinciane Despret, "암컷 쥐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넓은 우리를 설치해 짝짓기에 능동적인 수컷과 수동적인 암컷이라는 고정관념을 깨트린 마사 맥클린톡Matha McClintock, 22마리 양에게 매일 23그릇의 밥을 제공함으로써 양들도 정치적 협상을 벌이는 존재임을 보여준 델마 로웰Thelma Rowell의 연구,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서로에게 길들여지면서" 상호 이해를 구축한 동물행동학자 이렌느 페퍼버그Irene Pepperberg와 앵무새 알렉스Alex의 대화 등”은 “주체-대상을 넘어서는 인간-동물 관계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3]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식물과 접촉하고, 돼지와 고양이의 행위력을 실감하면서 "종 안에 갖혀 사는 근대적 인간의 곤경"에 대해 생각했다. "이성과 의도, 자율성을 전제로 하는 인간 행위자", 그리고 진보와 성장, 복지로 완성되는 유럽 중심의 선형적 인간 서사는 기후 위기와 펜데믹 등 각종 재난 상황들에 의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비인간 타자들에 의해 붕괴하고 있다. '성장 담론'으로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어떤 이들은 잘 가꾸어진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도래한 '세계의 끝'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회피하거나 초월하는 대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고안한다. 누군가는 세상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목소리를 내고[4], 누군가는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위한 서사를 기획한다.[5] 스스로를 전문 부랑자, 히치하이커, 사회 부적응자로 소개하는 누군가는 폭력이 난무하고 동물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사회에 적응하길 거부한다.[6] ‘탈인간 선언’을 외치는 누군가는 인간 종 중심주의를 넘어 새로운 우리를 발명하고자 한다.[7] 그리고 누군가는 탈출과 이주를 감행한 돼지와 함께 다종의 돌봄 공동체를 개척한다.[8]
새로운 ‘우리’
이 글을 쓰며 멧돼지 소식이 궁금해 기사를 찾아보았다. 뭐라고 검색해야 할까. 검색창에 '도봉구 멧돼지'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런 뉴스를 발견했다.
“도봉구청은 엽사 등과 함께 현장에 출동해 인근을 배회하던 멧돼지 6마리를 3시간여에 걸쳐 차례로 포획한 뒤 사살했습니다. 도봉구청 관계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인명피해는 없다"면서 "사살한 멧돼지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 검사를 의뢰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서울 도봉구 놀이터에 멧돼지 출몰…6마리 사살, MBC뉴스, 2024-02-16>
안전안내문자와 뉴스에서 포착된 동물은 ‘주민의 안전을 해치고 인명피해를 낼 수 있는 위험한 몸'으로만 재현된다. 사진 속에 나란히 누워있는 돼지 시체들이 보였다. 이런 물음들이 이어졌다.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연결, 경이의 주체로서 멧돼지를 재현할 수 있을까? 동물의 삶과 죽음을 관리하는 생명정치(죽음정치)의 작동 방식을 포착할 수 있을까? 포획과 사살, 아프리카돼지열병 검사로 이어지는 관료적 절차를 교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서든 '출몰'하는 동물들과의 접촉면에서, 인간-동물 ‘얽힘’의 현장 속에서 강력한 윤리적, 정치적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멧돼지를 인간 너머의 친족으로, 새로운 ‘우리’로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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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테이시 앨러이모,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그린비, 18쪽
[2] 영리한 한스 (독일어 : der Kluge Hans ; c. 1895 – c. 1916)는 산술 및 기타 지적 작업을 수행했다고 주장되는 말이다. 1907년 공식적인 조사 후 심리학자 오스카 풍스트(Oskar Pfungst)는 말이 실제로 이러한 정신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조련사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데스프레는 ‘인간이 동물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에 기초한 풍스트의 해석을 ‘인간과 동물의 상호학습’으로 재해석한다.
[3] 전의령, 『동물 너머』, 돌베개, 46쪽
[4] 루아이우통 크레나키, 박이대승·박수경 옮김,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 오월의봄
[5] 손희정,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메멘토
[6] 이하루, 『사회적응 거부선언』, 온다프레스
[7] 김한민, 『탈인간 선언』, 한겨레출판
[8] 향기·은영·섬나리,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호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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