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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적 삶의 방식‘우리에게 달린 것과 달리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by 북드라망 2025. 10. 31.

스토아적 삶의 방식
‘우리에게 달린 것과 달리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정승연(『세미나책』 저자)

 

우리가 자유를 행사하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다. 운명과 사건의 거대한 흐름 한가운데 탈취할 수 없는 자율의 섬이 있다. 우리에게 달린 것은 우리 영혼의 행위다. 그 행위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니까. 어떤 것을 판단하느냐 마느냐, 어떤 식으로 판단하느냐는 우리 하기에 달렸다. 무엇을 욕망하느냐 마느냐, 어떤 것을 원하느냐 아니냐는 우리 하기에 달렸다. 반대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픽테토스는 육신, 부, 명예, 높은 직위가 그런 것이라고 보는데)은 자연 일반의 흐름에 달려 있다. 육신은 대체로 우리 의지로 움직일 수 있지만 육신의 생로병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고, 쾌감이나 고통도 꼭 우리 의지대로 되지는 않는다.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성공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 피에르 아도,이세진 옮김, 『명상록 수업』, 그린비출판사, 120쪽

 


피에르 아도의 『명상록 수업』은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중심으로 스토아 철학 전반을 해설하는 책이다. 스토아 철학은 대체로 자연학, 윤릭학, 논리학의 상호 연관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이야기되곤 하지만, 나는 위에 옮겨 놓은 문장이 스토아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섭리에 따라 세계가 순환한다는 것, 그러한 사태를 정합적 논리로 설명한다는 것은 모두 한가지 목표를 향한다. 그것은 ‘잘 살기 위해 무엇을 훈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삶’으로 답하는 것이다. 


사는 동안 우리는 결국엔 겪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들과 만나게 된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나의 질병, 어그러진 관계, 예기치 못한 사고 등등.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괴로움들이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결부된 금전욕,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가족에 대한 미움, 사그라들지 않은 식욕과 성욕, 이미 지나가버린 나쁜 일을 잊지 못하는 집착 등등. 앞의 것과 뒤의 것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스토아주의자라면, 이렇게 답한다. ‘앞의 것은 너에게 달리지 않은 것이고, 뒤의 것은 너에게 달린 것이다’. 


요컨대 ‘뒤의 것’들은 ‘탈취할 수 없는 자율의 섬’에 관련된 것들이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자율’의 잘못된 이용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렇게 간단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면,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로부터 발생하는 ‘괴로움’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자들은 ‘수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수련’의 요체는 인간의 필멸성, 필연적인 신체의 손상, 내가 어쩔 수 없는 타자의 자유, 인간적 지혜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계를 긍정하면서 운명을 수용’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수련’ 속에서 인간은 겸손해진다. 그렇게 ‘겸손’해진 인간, 자신의 ‘한계와 운명’을 긍정하는 인간에 가까워질수록, 괴로움을 유발하는 두 번째 묶음은 자연히 해결된다. 집착과 욕심이 생겨나는 이유는, 자신이 한계와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고 믿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의 이와 같은 ‘인생관’은 언뜻 보기에 일종의 ‘정신 승리’로 보이기도 한다.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성공을 달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맹수처럼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의지의 인간이 훨씬 진취적이고, 소위 ‘주체적’으로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잘 사는 삶’에 대한 스토아적 해법은 무기력해 보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진취적이고, 주체적’이라고 하는 그 삶이 어쩐지 스토아적 삶보다 쉬워 보인다. 그러니까, 그런 삶은 어떻게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그런 삶이고, 그렇기 때문에 딱히 세상과 불화할 일이 없다. 다들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고, 모두 피하는 것을 나도 피하면 된다. 반대로 스토아적 삶은 다르다. 대세를 거슬러 남들이 원는 것-부와 명예-을 원하지 말아야 하고, 남들이 원하지 않는 것-자발적 가난, 소박한 생활, 지혜-를 원해야 한다. 모두가 ‘투자’할 때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 모두가 싫어하는 어떤 이를 혼자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통상적 욕망과 다른 욕망을 갖고서 사는 건 그 자체로 ‘저항’일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스토아 철학’ 단순한 ‘금욕주의’, ‘정신승리’, ‘생활 철학’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한 것처럼 스토아적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사는 건 어렵다. 스토아 철학은 그렇게 사는 사람을 ‘현자’라고 하는데, ‘현자’는 단순히 말해 인간의 조건에서 신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쩐지 요즘의 세계를 보면 ‘현자’되기가 ‘부자’되기 보다는 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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