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적 성숙과 서구적 성숙
동아시아 사람들은 동아시아적으로 어른이 되고, 서구 사람들은 서구적으로 어른이 됩니다. 사회집단마다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그리 특별할 게 없습니다. (......) 제가 동아시아인이라 그런지 저는 동아시아적 성숙 쪽에 더 끌립니다. (......)
서구 사회는 인간의 성숙에 있어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을 중요시합니다. ‘진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 원래의 나’라는 것을 인격의 핵심에 두는데, 여러 가지 외부 조건이 진정한 자아를 만나고 발현시키는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경우,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주인공이 스승을 만나 수행하면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 이러한 작품[귀멸의 칼날, 나루토, 헌터X헌터, 주술회전 등] 속의 주인공은 사제 관계를 통해 연속적으로 자기 쇄신을 하며 하루하루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갑니다. 저는 이것이 동아시아의 전형적인 성숙 모델이 아닐까 합니다. 즉, 동아시아에서 성숙은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반면, 서구에서 성숙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거죠. 다시금 강조하지만, 어느 쪽이 좋다거나 어느 쪽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치다 다쓰루, 「한국어판 서문」, 『용기론』, 박동섭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5, 8~11쪽)
우치다 다쓰루 선생은 『용기론: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에서 ‘용기’를 ‘정직, 친절’과 연관지으며, ‘성숙’의 문제로 다룬다. 선생은 “정직과 친절이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며, 이 책에서 그 생각을 언어화해 보겠다고 한다(이 책에서 말하는 정직은 “사람이 지성적, 감성적으로 성숙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며, ‘자신만의 목소리로’ “정형화된 문구에 잠식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은 대체로 친절하다’며 경험적으로 그럴 것 같지 않냐고 우치다 선생은 묻는다. 그러면서 선생이 ‘친절’의 가장 원초적 형태로 드는 것은 『맹자』에 나오는 ‘측은지심’이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면 누구나 즉시 돕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몇 살인지 얼마나 덩치가 큰지 등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아이니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는 상태를 아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한다. 측은지심은 심사숙고 끝에 발동하는 것이 아니며, “생각 없이 몸을 움직여야 측은지심”이라고. 또한 “남이 만든 정형화된 문구를 빌리지 않고 스스로 체득하고 깨달음을 얻은 것만 말한다. 그것을 친절이라고 한다”는 『창랑시화』의 설명이 친절이라는 말에 가장 적절한 용례라고 생각했던 일본의 한학자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말을 인용한다. “옛 뜻에서는 친절이 정직과 상당히 가까운 개념”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직’과 ‘용기’는 ‘손해’라는 말과, ‘친절’은 ‘서비스’라는 말이 겹쳐져 떠오른다. 딱 겹쳐진 그만큼, 우리에게 ‘성숙’은, ‘어른’이 되어 가는 일은 멀어진 게 아닐까. 분명한 건, ‘사제 관계’를 통해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어른-되기’는 혼자서, 가족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른-되기는 ‘다른 관계’에 들어가 공부하고 변신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걸 우치다 선생의 책을 통해 새삼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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