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곤란한 한자들
1.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말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는 우리의 생활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유행어로 사회를 분석하거나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세대를 구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시기마다 많이 사용되거나 더이상 쓰이지 않는 말이 생기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는 80년대에 과외 금지로 비밀과외를 의미하던 ‘몰래바이트’, 못생긴 사람을 말하는 ‘옥떨메(옥상에 떨어진 메주)’같은 말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모두 개인 휴대폰을 쓰게 되면서 ‘집전화’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이렇듯 한자도 긴 세월동안 만들어지고 사라진 것들이 있다.
한 가지 예시로 ‘옥’이 있다. 초기 중국의 문화 집결지인 화북지방은 넓은 평원이어서 귀금속이 아주 적었다고 한다. 그나마 보석에 가까운 것이 ‘옥’정도였는데 사실 옥도 처음부터 귀중하진 않았고 ‘약간 특별한 돌’정도로 취급됐다. 그런데 한나라 시기에 이 옥을 구분하는 글자만 17자, 제사에 쓰이는 옥, 행정 사무에 쓰이는 옥, 기물을 꾸미는 옥, 빛깔로 나누는 옥, 옥이 부딪치는 소리 등등 27가지로 구분할 정도로 다양한 한자가 만들어졌다. 『한자의 탄생』의 저자 탕누어는 선진시대(하-은-주 나라)에 권력의 상징이었던 청동기가 시대가 바뀌어 다른 사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옥이 권력의 상징물로 전환되어 옥의 가치가 부상했다고 해석했다. 약간 특별한 정도였던 옥의 가치가 철학의 상징물이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커다랗고 웅장하게 가공되어 강력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청동기와 달리, 매끈하고 반투명하면서도 자연물이었던 옥은 사람들에게 권력의 다른 성질을 떠올리게 만든 듯 하다. 하지만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옥과 관련된 한자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더이상 옥에 그러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그만큼 상세하게 사용할 필요가 없어 옥과 관련된 수많은 한자들이 사어가 된 것이다. 비록 한 시기동안 빛났다 사라진 한자들이지만 그 한자에는 고대의 감각이 사진에 담겨있는 기억처럼 담겨 있다.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는 가능하면 ‘좋은 이야기’만 해주고 싶어 이런 한자들에 대해서는 잘 다루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조금 까다롭고 난감하기도 하다. 이렇게 생활을 반영하는 언어와 문자는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듯 언제나 좋은 순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우리말만 해도 욕이나 비하, 혹은 직접적이지 않게 에둘러 표현하는 말들도 있지 않은가. 한자에는 오늘날의 가치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도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 그 한자들이 우리에게 당연한 순간을 낯설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2. 대놓고 하기엔 부끄러운 말
나는 상황에 맞는 말을 잘 못하는 편이다. 눈치가 좀 부족하다고 하면 스스로 변명하는 것 같지만... 눈치가 없는 건 사실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누군가를 소개할 때 적절한 말을 못찾아서 그냥 ‘친한 사람’이라고 얼버무리거나 또 판단력이 둔해서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일이 생기면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해버리고 마는 식이다. 가끔은 이런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나라도 함부로 ‘똥 싸러 다녀오겠습니다.’라거나 ‘여기서 방구 좀 뀔게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말은 좀 ... 부끄러우니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매일 있는 일이 어쩌다 부끄러운 일이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사람이라면, 생물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생리적인 현상임에도, 왜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처럼 비유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일까. 음... 당연한 것에 왜 의문을 갖는지 이상하다고 여길 것 같아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꿔보자면, 언어에 귀천이 생기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행위를 담는 언어에 귀한 것과 천한 것이 나뉘게 된 것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사물간의 비교가 이루어지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하나의 인간, 개인일 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혼자라면 어떤 비교와 판단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그러나 사람들의 인식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적인 시선이 만들어지면 그 때부터 비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 비교는 개인의 행위로부터 사회적인 인식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다보면 일부 소수의 사람들의 지위와 신분이 고귀해지게 된다. 그들의 신분이 고귀한 이유는 그들이 가진 능력이나 지혜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숭고하고 신성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 신분이 가지는 숭고함과 신성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과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 모든 인간에게 이루어지는 동물적인 행위들, 이를테면 배변과 배출, 분비같은 현상을 높은 신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생물학적 구조를 바꿔서 정말 이슬만 싼다거나... 배변을 안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 했을테니까. 대신 언어를 다룰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언어로 전도시켜 ‘사용할 수 없는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일’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일’로 만들어 언어와 문자를 이용해 인간 모두가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다른 이들과 차이를 두기 시작했다.
한자는 어떻게 이 과정을 거쳤을까. 오늘날 똥오줌을 의미하는 한자는 변便이다. 하지만 이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분糞은 어떨까? 분糞도 마찬가지로 똥을 의미하지만 갑골문을 보면 무언가를 쓸어 치우는 모습으로 부스러기의 흔적만 알 수 있다(왼쪽 그림).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없다면, 행위 자체를 보여주는 한자가 없을까? 그건 뇨尿와 屎시가 있다. 이 두 한자의 갑골문을 보면 직관적으로 어떤 행위를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가운데와 오른쪽 그림). 여기서 분糞과 시屎에서 ‘똥’을 교묘하게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시屎가 일차적이라면 분糞은 이차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두 한자 모두 그 흔적이나 행위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 ‘똥’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의미하는 이 한자들은 어느 순간 갈 곳을 잃어 그저 상스러운 의미가 된다. 그리고 문자는 차이를 두려는 언어습관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 다시 대상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을 찾게 된다. 그렇게 부끄러운 행위가 행해지는 장소로 대체되는데 그 글자가 바로 측廁, 측이다. 장소로 대체된다. 측廁 뒷간, 편便도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기 위해 우회한 문자들이다. 시간이 지나 배변행위는 전혀 다른 표현이 되고 마는데, 원래 측간은 집에서 따로 분리되어 있는 장소였지만 오늘날의 생활양식에서 몸을 씻는 곳과 함께하게 되면서 ‘단장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화장실化粧室이 측간과 같은 의미가 되었다. 화장실을 ‘근심을 푸는 곳’이라 표현하는 해우소解憂所는 또 어떠한가. 에둘러 표현하며 약간은 고상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가 생리현상으로부터 탕누어는 이 과정을 두고 문자와 언어가 “서로 도주하고 추격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3. 탄생의 대가 혹은 책임
출산도 마찬가지로 생리적 현상 중 하나다. 갑골문을 보면 출산의 순간을 생생하게 담아낸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많이 사용되는 몸 신身은 배 속에 아이가 있는 형태로부터 만들어 졌고, 출산 후 핏방울이 뚝뚝 흐르고 산파가 아이를 받아내는 모습에서 만들어진 기를 육毓, 그리고 같은 의미지만 비교적 간단하게 막 태어난 아이를 묘사한 기를 육育까지. 모두 익숙한 한자들이라는 점에서 생명의 잉태와 출산은 고대나 오늘날에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冥은 어두울 명으로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함을 치는 모습이라 해석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손으로 질구를 벌려 아이를 받아내는 모습이라 보기도 한다. 모든 출산이 수월하진 않았을테니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다. 인간의 몸을 억지로 갈라서 태아가 태어나는 장면이 다소 자극적이어서 그런 것일까, 오늘날 명冥에는 출산의 맥락이 사라지고 이런 상황을 대체하는 단어로 난산難產이 쓰인다. 이렇게 어렵게 아이가 탄생했지만 탄생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사라져버리고 마는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자도 있다. 버릴 기棄의 갑골문에서는 아직 피가 묻어있는 아이를 포대기째로 가져다 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棄의 다른 갑골문 자형을 보면 밧줄과 함께 있는데 이는 밧줄로 아이를 교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막 태어난 생명을 죽인다는 일이 오늘날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들은 왜 아이를 죽였어야만 했을까?
뿐만 아니라 갑골문에는 노인을 죽인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행위가 이루어진 바탕에는 한정된 식량자원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탕누어는 노인과 영아 살해는 원래 대자연의 특권이라고 설명한다. 살인을 두고 특권이라고 하다니,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하지만 그 주체를 다른 비인간 동물들에게로 시선을 옮겨보면 늙은 동물들은 사냥이나 도망 능력을 잃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대자연의 자애롭지 않은 법칙이다. 탕누어는 인간의 손으로 인간 개체를 조절하는 것이 자체적인 능력이라 바라본 것이 아닐까. 이런 유기와 살해와 관련된 기록은 주나라 시기부터 인간의 도덕과 인륜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차차 줄어들었다. 영아와 노인을 죽이지 않는 건 이 시기에 일어난 윤리적 탐구에 의해 일어난 인류의 성과 중 하나였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해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인식은 지극히 당연하다기보다는 노력으로 이뤄내야 하는 일이었다.
영아살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남미에서 소규모로 살아가는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일이었다. 이들은 아이가 젖을 떼기 전까지는 성행위를 금지하고 이미 영아가 있는 경우에 임신이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낙태를 하거나 태아를 유기했다. 유기된 태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짐승에게 먹혔을 수도 있으나, 만일 운이 좋아 다른 부족에게 발견될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그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혈연에 얽매이기보다는 외부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부족을 유지했다. 처음 남미로 건너가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을 본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보고 야만적이라거나 미개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윤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와 같지 않다고 해서 그들 나름의 세계관이 열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원주민과 고대인들을 비난하거나 우리와 비교하기보다는 오히려 노인공경과 영아살해에 대한 오늘날의 윤리 의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과연 생명에 탄생에 어느 정도의 대가와 책임을 가지고 있을까?
4. 고대의 형벌과 노예의 한자
이런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된 살인 외에도 전쟁과 형법에 의한 살인과 관련된 한자도 있다. 끊임없이 전쟁이 있었던 춘추전국시기에 사용된 글자들을 보면 그 적나라함에 섬뜩해진다. 무기로 사람의 머리를 베거나, 장대에 사람 머리를 달아놓거나, 더 효율적으로 죽은 이의 귀를 잘라 싸움의 결과를 헤아리기도 했다. 얻을 취取는 시체에서 잘라낸 귀를 들고 있는 손에서, 칠 벌伐은 창으로 목을 자르는 모습으로부터 만들어진 한자다. 죽이지 않고 살려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했을까? 과거에는 전쟁포로를 살려두거나 범죄자를 죽이지 않는 경우에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창이나 바늘로 한쪽 눈을 실명시킨 뒤 노예로 삼았다. 오늘날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빈번한 전쟁과 견고한 신분제 시대에서야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오늘날 대중을 의미하는 민民이 원래는 노예를 의미하는 한자였다. 민民의 갑골문은 송곳으로 눈을 찌르는 형상으로 노예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죽이지 않은 이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약간 더 인도적으로 노예를 삼기도 했는데 바로 얼굴에 문신으로 표식을 남기는 묵형墨刑이다. 검을 흑黑은 이 형벌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진 한자다. 신기하게도 고대 사람들은 일찍이 문신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피부에 글씨를 새기려면 피부 밑 조직까지 잉크를 넣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뾰족한 칼날이 필요했다. 오늘날 매운 맛을 의미하는 신辛은 사실 노예용 표식을 남기는 문신용 칼을 의미하는 한자다. 매운 맛을 의미하는 건 단독으로 쓰일 때 뿐, 본래는 ‘괴롭다, 고생하다, 죄’의 의미로 다른 글자와 결합하면 모두 노예와 관련된 의미가 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영역이 굉장히 방대하다. 본래 여자 노예를 의미했던 첩妾, 묵형을 당한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 모습인 복僕, 노예를 다스리는 직업이었던 재상 재宰, 포로로 붙잡혀 한쪽 눈을 잃은 신하 신臣, 오늘날에는 아이를 의미하는 아이 동童까지...! 더구나 용과 봉황에도 辛과 유사한 모습이 있다. 그야말로 왕이 아니면 세상에 노예가 아닌 자가 없는 셈이다. 다른 것보다 아이童가 본래 노예를 의미하는 한자였다는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왕이 아닌 모든 사람들民은 결국 노예民일 수 밖에 없는 걸까?
그러나 이러한 글자가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를 구속시키고 있는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중국 고전을 읽다보면 성인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군자들과 대담을 나누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어떤 정치관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인간성을 가져야 하는지 꾸짖고 조언하고 어르고 달래며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이런 원문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불쑥 솟아오른다. ‘내가 군자도 아닌데 이런 얘기를 굳이 알아야 하는 걸까? 나는 백성인데!!’ 그런데 사실 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계급이 없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피지배자라고 하는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노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이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끄달려가는 노예의 삶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살아간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무언가의 노예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보아야 할 것이다.
5. 한자의 역사성이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야만과는 거리가 먼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첨단을 달려가는 기술들과 뛰어난 시민의식으로 이루어진 요즘을 살아가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이번 글에서 다룬 한자들은 오늘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사점을 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표현을 찾는데 몰두하고, 신분제가 사라졌어도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형편은 비슷하며, 출산율이 낮아 난리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대처는 여전히 부족하다. 고대 사람들은 부족의 규모를 유지하기 어려워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종교적 신념과 경제적 이익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있는 전쟁은 어떠한가. 한자 속에 남아 있는 고대의 흔적을 보면 그다지 우리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의미가 바뀌며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는 한자가 가진 역사성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고대는 야만적이고 일어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났던 시기다. 그 시기로 돌아갈수는 없으나 그 ‘비상식적’인 일들이 그대로 문자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과거와 오늘이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한자가 가진 역사성이 어떻게 오늘날을 비추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러기엔 우리 사회의 그리 밝지 않은 이야기들까지도 아이들과 나눌 자신이 없다. 언젠가 내 역량이 더 커지는 날이 오면, 조금 더 유연하게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다.
참고문헌
『한자의 탄생』, 탕누어, 김영사
『한자어원사전』, 하영삼, 도서출판3
『슬픈 열대』, 레비-스트로스, 한길사
글_동은(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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