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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예술

[한문이 예술] 질문의 힘을 가진 한자

by 북드라망 2025. 9. 9.

질문의 힘을 가진 한자 

동은(문탁 네트워크)


 
1. “하고 싶은 말 있어?”
<한문이 예술>은 2020년 하반기부터 시작했지만, <문탁 네트워크>에는 훨씬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고전 원전을 읽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처음 아이들과 한자로 만났던 건 2017년 겨울, <천자문>을 주제로 했던 수업에 보조로 참여했을 때였다. 사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고전 원문을 잘 읽는 것도 아니었고, 원문을 읽으며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보조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건 <예술프로젝트>에서 한자를 주제로 했던 예술 작업 <천자 중에 한자> 덕분이었다. 내가 예술 작업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수업에서도 아이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한자를 이해하고 표현하며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한자를 외우기만 했던 내 어린시절의 경험 때문에 과연 아이들이 얼마나 한자에 관심이 있을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보조교사로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벌써 수업을 마칠 때가 되어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서도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아쉬울 정도였다. 

성인이 된 이후로 언젠가부터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누군가 내게 “하고 싶은 말 있어?”라고 물으면 그런거 없다며 손사레를 치기 바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대자면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상태가 익숙해졌다. 그러다보니 수업 이후에 느껴졌던 아쉬움과, 뭐라도 말하고 싶어했던 내가 낯설었다. <한문이 예술>을 준비하면서 그 말들을 어떻게하면 잘 정리해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 꾹 다물었던 입을 움직이고 싶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문이 예술> 때문이었을까?


2.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고
그 당시 고은과 나에게는 관련된 어떠한 학위도 없었고, 내세울수 있는 경력도 없었다. (물론 고은은 나보다 훨씬 먼저 아이들과 만나오기는 했지만) 하지만 감사하게도 <문탁 네트워크>에서 나와 고은을 오랬동안 봐온 사람들, 함께 공부했던 분들이 우리가 기획했던 수업을 아이들에게 소개시켜주었고, 함께 수업을 할 수 있는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고은과 나는 별다른 걱정 없이 아이들의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한문이 예술>은 나보다 훨씬 고전 공부에 능했던 친구 고은이 아이들에게 원문에 대한 설명과 의미에 대해서 알려주면, 나는 문장 속에서 중심이 되는 한자를 골라 다양한 한자 활동으로 마무리하는 수업으로 구성됐다.갑골문부터 변화된 형태를 통해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알려주고, 자신만의 해석을 담아 새롭게 만들어보려는 의도였다. 한자 활동은 때론 직접 지점토로 토기를 만들어보거나, 가면을 만들어 함께 북을 치면서 제의를 올리거나, 이야기책이 되기도 하고 연극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과 함께 한자를 익히고, 나아가 그 한자가 사용된 고전의 원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많은 아이디어로 여러 수업을 기획했다. 소학, 사자성어, 날씨와 계절, 친구와 가족 등등... 어떤 수업을 할까 고민하기만 할 수 있는게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 느꼈던 건 갑작스럽게 다가온 코로나 때문이었다. 그동안 문탁 네트워크의 청소년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토요일 오전에 진행되어 끝나고 나면 모두를 위해 공동체에서 함께 준비한 밥을 먹고 헤어졌다. 아이들은 수업을 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마을의 공동체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얼굴을 익혔다. 하지만 교실에서 눈빛만 맞출 수 있던 낯선 상황에서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일상은 길을 잃었다. 모임 인원에 제한이 생기면서 소규모 마을 행사부터 중단되기 시작했다. <한문이 예술>은 불안했던 코로나 시기에도 간헐적으로 이어갔지만 최근에는 1년 넘게 열리지 못했다. 

언제 다시 <한문이 예술>을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수업준비를 위한 공부를 이어가고 싶다. 아니, 꼭 수업 준비를 위한 공부가 아니더라도 한자와 관련된 공부를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해가고 싶다. 수업을 할 수도 없으면서 나는 왜 계속해서 공부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건 내가 한자에서 질문의 힘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3. 질문의 힘과 할 수 있는 말
<문탁 네트워크>에서 공부하며 깨달은 것중 하나는, 질문의 중요성과 힘이었다. 문탁에서 세미나를 하기 위해서는 매 시간마다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 문탁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곳에서의 공부가 서로에게 물으며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질문’을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자신만의 질문을 가지고 세미나에서 그 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때로는 상대의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찾던 답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시야를 확장한다. 이 곳에서 지낸 몇년 동안에는 이 ‘질문의 중요성’을 알아갈 수 있었다. 실제로도 책을 읽는 시간보다 함께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더 많은 공부가 되었다. 그러나 내 질문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진정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질문, 단순히 해소되기만 할 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질문만 반복했다. 스스로 어떤 경계에 갇혀 있어 변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답답하고 두렵기까지 했다. 

내가 한자로부터 느꼈던 ‘질문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 첫번째 이유는 한자가 우리의 언어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자는 우리가 쓰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문자다. 물론 한자를 모르더라도 뜻을 알 수는 있으나, 그 어원과 의미를 이해하려면 한자의 의미를 살펴보는건 필수적이다. 그런데 한자사전을 펼쳐보면 하나의 뜻만 가진 한자는 없다. 내가 알고자 하는 의미가 긴 시간동안 겹겹이 쌓인 의미들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치 새로 말을 배우는 것처럼 의미와 문자, 말들이 낯설어진다. 그리고 한자의 형태적인 특징 또한 중요하다. 한자는 소리를 옮겨놓은 문자가 아니라 의미를 담은 기호에 가까워 형태를 통해 더 다층적으로 문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비교적 단순한 초기의 한자형태를 보다보면, 그 모습이 마치 시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어두운 밤에 창틀에 내리는 달빛(明)이나, 잠들어 있어도 눈을 뜨고 있는 모습(夢), 종처럼 주변에게 전해지는 아픔(通)같이... 그 과정에서 한자의 형태와 함께 그 의미들을 곱씹다보면, 어느새 고대 사람에게 빙의된 것만 같은 순간이 온다.

논어 집주의 첫페이지


그러자 고전을 읽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논어>는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먼 곳에 있던 벗이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땐, 공부를 마치 친구처럼 여기라는 부모님의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이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공자가 말하는 ‘벗’이 단순히 친구라는 의미가 아닌 다양한 층위를 가진 관계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함께 배우고 성장하며, 같은 길을 걸었던 반쪽(道伴)이었던 관계. <논어>의 첫 구절은 배우고 익히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공자가 친구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가를 보여주는 문장이었다. 이를 깨닫고 나니 마치 쌍둥이같은 친구같아 보이는 한자 붕朋에서 어떤 감동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더 놀라웠던 건, 이후로 공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예, 인, 의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는 점이다. 내 인생에 ‘구닥다리 유교정신’을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다니. 놀랍게도 한자를 알아갈수록 새로워지는 것은 과거에 대한 인식보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시선이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동양인으로서, 어떻게 동양적 사고를 이해해야 할지 그 답을 찾고 싶어졌다. 그 즈음부터 한자는 나에게 있어서 단순한 문자도, 지식도 아닌 ‘질문의 언어’가 되었다. 한자를 공부하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감상에 가까웠던 말들의 근거를 찾고 싶어 졌고, 근거를 찾기 위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질문이 생기자 할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한 공부로 이어졌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 말로만 소통하던 시기에 대한 탐구를 위해 신화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고, 기나 음양같은 동양적 사고의 특징과 한자의 관계를 알고 싶어 <주역>을 읽어본다거나, 오늘날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고대인들의 사유방식의 단서를 얻고 싶어 인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질문은 나름의 답을 가지고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공부를 통해 공부가 확장되는 경험... 내가 느꼈던 질문의 힘이 나에게서 샘솟는 느낌이었다. 나로부터 시작된 질문을 통해 그 언어를 찾아 나서는 길 위에 서있는 기분. 어쩌면 나의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4. 공부를 하는 것과 살아가는게 다르지 않은 이유
한자를 ‘질문의 언어’로 삼은 이후, 아이들과 더 긴밀하게 만나게 되었고, 질문을 기르며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영역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질문에 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해 노력한 만큼, 나의 영역이 더 넓어졌다. 나는 그 덕에 내가 더 똑똑해졌다고 느끼기보다는 비로소 나에게 갇혀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나보다도 상대를 더 생각해보고,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더 많아졌다. 그 상대는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생활하는 사람이기도 했으며, 책의 저자나 혹은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되기도 했다. 가끔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더 넓은 무언가를 떠올리곤 했다. 어느새 나를 잊고 완전히 몰입하고나면 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후련해졌다.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질문 앞에서 두려웠던 시절과 비교하면 한없는 자유에 가깝다.

최근에는 이런 나의 공부를 잘 표현하고 전달해야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문탁에서는 대표적으로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공부를 나눈다. 글을 쓰는 시간은 너무 괴로웠지만 정성들여 쓴 글을 읽고 질문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접점이 없던 사람들끼리 글을 통해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교차할 수 있다는 걸 경험했다. 나에게 있어서 <한문이 예술> 또한 그 표현의 장이자 아이들과 서로 교차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프로그램이 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내가 느끼고 알게된 것을 누군가에게 잘 전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지식을 단순한 지식으로만 두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함께 신화학을 읽고 쓴 에세이를 나누는 발표자리


 언젠가 “공부와 사는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는 문장을 썼던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내가 공부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가끔은 잘 살아가고 있다고 실감하기도 한다. 공부가 미진해서 내 삶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다가도, 가끔은 마음 깊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삶이라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언제나 두 상황은 번갈아온다. 그래도 그 과정을 잘 겪어내고 나면,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 공부를 하는 것과 살아가는게 다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의 힘이 계속해서 나를 새로운 지평으로 데리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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