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계속해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문자에 담기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새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글자가 표현하는 의미의 맥락이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문자들이 그런 ’이야기‘와의 연관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현실 세계의 어떤 행동이나 사건을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단어에 사용된 문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로 한자가 자체가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한자로 보는 ‘듣기’
처음 ‘듣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이들과의 수업 때문이었다. 나는 으레 다른 어른들이 그렇듯 아이들의 ‘잘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감했다. 수업 내용이 어려웠다는 것인지, 듣고도 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대충 이 상황을 흘리고 싶어서인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문제는 ‘하기 싫다’는 말이었다. 그럴때면 나는 순간 고장난 기계처럼 멈춰서거나 피해버리듯 자리를 파해버리고만 싶어진다. 아이들의 말이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들리는 순간, 내 ‘듣기’의 방식을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자는 듣기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듣기’는 소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자로 ‘소리’는 입술모양을 본뜬 소리 음音을 사용하는데 갑골문이 사용되는 시기에는 말과 소리가 따로 구분되어 쓰이지 않아서 音은 소리와 말을 모두 포함하는 문자였다. 이후 ‘소리’에 ‘음악’의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서 두 의미가 구분되었고, 音에 점 하나를 더 찍어 ‘말言’의 의미를 분리시켰다. 따라서 소리 음音과 말씀 언言 둘 다 입술 모양을 본 따 만들어진 문자다.(출처: 『민중서림 한자대사전』) 그 시기에도 오늘날처럼 중국어에 성조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중국말을 떠올리면 말이 ‘소리’에 가깝다고 느꼈다는 것이 이해된다.
말과 소리가 함께 쓰이던 갑골문 시절, 말씀 언言(위)과 소리 음音(아래)
소리 음音은 이후에 구분되었기 때문에 금문에 해당한다.
이런 말과 소리를 듣는 건 귀다. 그런데 똑같이 ‘듣다’로 사용되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이 있다. (마치 같은 소리에 여러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귀 이耳와 들을 문聞, 그리고 들을 청聽이다. 이 세 가지 한자는 모두 갑골문 시기부터 사용되었던 문자다. 耳는 ‘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듣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듣다’의 의미를 담은 한자 들을 문聞에도 耳가 있다. 그런데 왜 문門과 함께 있는 걸까? 누군가는 고대의 결혼문화에서 비롯된 모양(<한자로드>,신동윤)이라고도 하지만 대체로 문 앞에서 귀기울여 듣는 모습 (『한자어원사전』, 하영삼, 도서출판 3)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나는 門이 의미하는 것이 다른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형태의 물을 문問과 함께 생각해보자. 나가고 들어오기 위해서는 꼭 문을 문門을 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묻기 위해서는 문을 여는 것처럼 입술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왜 問에 입口과 문門이 함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형상이 ‘묻다’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일까? 입을 여는 것이 꼭 질문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것일 수도 있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여기서 문門의 의미를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필요한 때가 아니면 ‘문단속’이 필요하다는 거다. 필요한 순간에 묻고, 그럴 때가 아니라면 우리는 입술을 닫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입은 이렇게 ‘문단속’이 가능하지만 귀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귀는 항상 열려있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귀는 듣고 싶은 것만 걸러 들을 수 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보다 친구와 몰래 떠드는 말이 더 잘 들리고, 유독 내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있거나 재밌는 이야기에는 귀가 활짝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귀는 항상 열려있는데도 생각보다 선택적으로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귀에 문이 달려 있는 모양인 聞이 보여주는 건, 듣는 일도 마치 필요할 때마다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문을 열듯 들을 준비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이해했다. 아마 있지도 않은 ‘귀의 문’을 열고 닫아야 했으니 누군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것이 그들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 聞에 담긴 함의를 생각하며 나는 고대 사람들도 나처럼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며 귀를 닫고 딴생각을 하기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하고 키득거렸다. ㅎㅎ
고대의 ‘듣기’ 능력
‘듣다’의 또 다른 한자, 들을 청聽은 딱 봐도 복잡해 보인다. 한자를 양쪽으로 나눠, 왼쪽에는 귀耳와 사람壬이, 오른쪽에는 곧은 마음가짐과 마음을 의미하는 덕 덕德의 형태가 있다. 德의 고대 자형은 곧을 직直과 마음 심心이 합쳐진 悳인데, 이를 바탕으로 聽에 담겨있는 한자의 내용을 풀어보면 “보고直 듣고耳 느끼는心 사람壬”이라는 심오한 글자다. 듣는 것 만으로도 이런게 가능했다는 걸까?
고대 사람들이 ‘듣기’에 대해 어떤 가치를 부여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자는 성인 성聖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점이 대단한 걸까? 우리는 ‘성인’이라고 하면 공자님이나 예수님, 부처님같이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라고 하면 ‘훌륭한 말’을 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을 ‘성인聖人’이라 일컬을 때 사용되는 聖의 갑골문은 그들이 세상에 나타나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 문자다.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聖의 갑골문은 보면 입과 귀가 강조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보고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은 ‘말’보다 ‘듣기’를 더 잘 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대 사람들이 소리音와 말言을 구분하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그들에게 말을 의미하는 문자가 없었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언어는 문자보다도 말이 앞선다. 문자는 어찌보면 말을 담기 위한 그릇이니까. 그들이 ‘말’과 ‘소리’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은 ‘듣기’의 대상을 ‘사람의 말’에 한정짓지 않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세상의 모든 소리는 어떤 의미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는 생각보다 여러 정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어났을 땐 무기를 들고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 상대의 동태를 알아채고, 사냥을 위해 떠날 땐 동물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새가 우는 것을 듣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 오늘날의 우리가 귀를 사용하는 방법보다 더 폭넓은 방식으로 사용했다면, 그들에게 ‘듣기’의 대상은 바람소리, 천둥소리, 살아있는 생물들의 소리, 사물들의 모든 소리이지 않았을까. 고대 사람들에게 ‘듣기’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영역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했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고대의 ‘성인’이란 세상의 현상을 알아채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번역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언어에서 벗어나 자연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은 그들에게는 인간 세상의 소리 뿐만 아니라 비인간 세상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사람에게 알리는 샤먼과 같은 능력이었다.
논어에서 말하는 음악에 대해 다룬 책도 있다. 『논어와 음악』의 표지
정상도, (2021), 『논어와 음악』, 나무발전소
고대인들이 갖고 있는 ‘듣기’의 위상을 알고나니 공자가 음악에 대해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자는 “시에서 선한 배움을 일으키고, 예에서 원칙을 세우며, 악에서 삶을 완성시킨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태백 8편)”라고 말하며 음악에 대해 굉장히 큰 가치를 두었던 사람이다. ‘음악樂’은 음악이 단순히 즐겁고 흥겨운 잔치를 위한 요소가 아니라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세상의 의미를 담은 ‘소리音’였다. 그러니 조화로운 음악 소리는 세상의 조화와도 같았던 것이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음악을 듣고 삼개월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다. 나도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 정도로 좋아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 아니요! 공자가 왜 성인이라 불리는지 이해되는 부분이다.
한자에 담겨있는 ‘듣기’의 방법론
초등학생때 필독도서로 한창 유행하던 『경청』이라는 책이 있었다. 베토벤이 아닌 이토벤(!!)은 주변 사람들에게 불통의 아이콘이라 불리며 동료들의 말을 듣지 않고 회사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불치병에 걸려 귀가 안들리기 시작하는데,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악기를 만들어주고자 동료들과 협동하기 위해 경청을 하며 목표를 이룬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어린 내가 책을 읽고 이해한 경청은 ‘입 닫고 귀를 열어라!’였다. 그렇다면 고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듣기’는 뭐였을까? 聽의 갑골문은 네 가지 한자가 복잡하게 어우러져 의미를 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아주 심플하다. 하나의 귀와 두개의 입. 여기에 담겨 있는 고대인들이 생각한 ‘듣기’란 무엇이었을까?
聽의 갑골문에 담겨있는 커다란 귀와 입 두개.
ㅂ과 초승달이 아니다!
聽의 갑골문이 보여주는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듣기’란 하나의 귀에 두 입의 말을 담는 자세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에 듣는 모습일 수도 있다. 아이들과의 소통에서 고민하던 나에게는 아이들이 하는 말과 ‘다른’ 말도 함께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하는 ‘잘 모르겠다’나 ‘하기 싫다’는 말에 대해서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조금 더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부족했는지를 알고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꼭 내 수업과 관련된 문제가 아닐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아이 자체를 잘 살펴야 한다. 아이의 말에 다른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했는지, 혹은 눈빛이나 손짓이 평소와는 다른지, 어떤 마음과 상태에서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채야 한다. 그 과정이 ‘눈으로 확인한다’의 차원이 아니라 마치 귀기울여 듣듯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인들처럼 듣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나는 마음을 유연하게 만들어 아이의 말에 갇히지 않고 적절한 질문(問!!)으로 다른 말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럴 때면 말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생각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놔 주었다. 아이들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할 때면, 내 생각보다도 편한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이는 아마도 내가 듣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럴 때면 묻기問와 듣기聞가 같은 발음을 갖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 활동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만 같다. 너무 앞선 해석일까? 아니면 이것 또한 한자에 담기는 또 하나의 ‘이야기’일까?
글_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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