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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예술

[한문이 예술] 昔, 어떤 과거는 오래된 극복이다

by 북드라망 2024. 1. 15.

昔, 어떤 과거는 오래된 극복이다

  
하고 싶은 말
언젠가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선생님을 하기로 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내가 선생이었나?'부터 '내가 선생이어도 될까?', 그리고 '내가 어쩌다 선생이 되었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질문한 친구에게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친구는 "그냥 궁금해서요."라고 했지만 곧이 곧대로 듣기에는 조금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선생이라기엔 하고 다니는 행색이 너무 선생답지 않았나? 수업이 별로인가? 아니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너무 '선생'같은가^^?? 스스로 선생이라기보다는 학생이라고 생각해온 시간이 훨씬 길어서 그런지 친구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 앞에 서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선명했다.

그 친구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들한테 한자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인 것 같아."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몰랐던 것을 '나 정말 그랬구나!'하고 이제서야 깨닫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수업준비의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한자의 이야기를 전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방식보다도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았다. 그랬으면서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건지...!

 

한자로 상상조차 힘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과거로 회귀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데 완전히 달라진 오늘날에 고대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예를 들면, 사람의 탄생과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의 출산방법과 장례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일도 예시가 될 수 있다. 고대에 요즘처럼 숏비디오를 찍으며 놀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진 않았겠지만 그 때도 '친구와 함께 논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의 질문을 받은 이후로 고대와 지금은 분명히 다르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 속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내가 한자 선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때로 고대 사람들의 어떤 ‘태도’가 되기도 했다. 이번 글에서는 그들의 태도가 드러나는 한자를 소개한다. 옛 석昔은 아주 까마득한 과거를 의미하는 한자다. 그런데 옛날의 ‘옛날’, ‘고대’의 ‘옛날’이라고 한다면 과연 언제를 옛날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이 탄생하기도 이전인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고대 사람들에게 ‘옛날’은 아마도 처음 ‘이야기가 시작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었던 시절 말이다. 구전설화의 주제들은 대부분 건국과 연관되어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삼국사기>의 환웅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환웅이 고조선을 세울 때 홀로 온 것이 아니라 신하인 우사와 풍사, 그리고 운사를 데리고 왔다는 점이다. 그가 전지전능한 신으로 여겨졌던 이유는 비와 바람, 그리고 구름같은 자연을 다룰 수 있을 다루는 신하를 두어서 였던 것이 분명하다. 고대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그 속을 알수 없는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중국도 별로 다르진 않았다. 중국 고대 나라인 ‘하夏나라’의 순임금은 당시에 파격적으로 자신의 자손이 아니라 나라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다음 왕위를 이은 사람의 공적이 바로 범람의 피해를 막은 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홍수의 피해를 막은 것이라 생각하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와는 스케일이 다른 중국 황하의 범람을 막았다면 오늘날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때 거대한 범람을 의미하는 한자가 바로 昔이다. 昔 아래에는 태양이 있는데 초기 갑골문을 살펴보면 昔의 형태가 물결치는 파도 아래에 태양이 있는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昔은 사실 태양을 삼킨 파도가 넘실거리는 규모의 엄청난 자연재해를 의미하는 한자였다.

 




어떻게 재해는 ‘옛날 일'이 되었나
범람은 비옥한 토지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강가에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재해다. 산사태나 지진같은 재해와는 다르게 우기는 주기적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의 범람이 한 해가 시작하는 기준이 될 정도였다. 재해는 사람들이 일궈놓은 밭, 농장, 마을과 사람들을 없앨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억까지 없앨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매년 돌아오는 범람 때문에 그 지역에 자리를 잡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에게는 잊기 어려운 두 번의 범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 첫 번째는 아득한 신화시대에 일어난 범람으로 이 때 모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어버려서 신들이 다시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어 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대 사람들이 몇 번이나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시작을 반복했을지 오늘날의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범람이다. 두 번째 범람은 첫 번째 범람보다도 비교적 구체적이다. 바로 처음으로 범람의 피해를 막은 ‘우禹의 치수治水’이야기로 여기서 등장하는 우禹가 바로 범람의 피해를 막고 요임금에게 인정받아 왕위를 물려받은 주인공이다.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은 기원전 2300년 전에 일어났다고 한다. 아마도 이 시기부터 사람들은 조금씩 범람의 피해를 줄이며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던 기록과 기억, 업적을 차근차근 쌓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기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전해졌으며, 어찌할 줄 몰랐던 자연재해는 서서히 먼 옛날이 되어 昔은 서서히 ‘옛날‘을 지칭하는 말로 변해갔다. 어려움을 극복해 재앙을 글자 그대로 ‘과거의 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우는 어떻게 범람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걸까? 우의 아버지는 황하의 물을 다스리는 일을 해왔는데 우의 아버지는 제방을 쌓아 물길을 막는 일에만 열중해 매번 범람의 피해를 막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왕은 매번 실패하는 우의 아버지를 대신해 우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우는 제방을 없애고 오히려 더 많은 물길을 만들어 범람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실패의 경험으로 결국엔 인간이 닿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재해를 극복해낸 것이다.



어떤 과거는 오래된 극복이다
昔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와 다르게 고대에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을 이겨낸 사실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한자다. 뜻이 달라진 채 사용되고 있어 그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 없지만, 나는 이 한자가 재해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말고도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전해준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단숨에 무너뜨릴수 있는 자연재해도 언젠가는 옛날 일이라며 과거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니 꼭 두려워만 하지 말라는, 그런 태도 말이다.

나는 고대 사람들이 범람을 문자로 만들어냈던 것처럼,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시각화시켜서 문자로 만들어보는 활동을 꾸몄다. 먼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친구랑 싸웠던 일, 하기 싫은 숙제, 가족과의 관계 등등 다양한 문제들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이 당시 코로나로 인해서 일상 속에 여러 제약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라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라고 썼던 아이의 활동지가 기억난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코로나 때문에 시행착오들을 맞닥뜨리던 때였다.

코로나가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했던 아이는 무엇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을까?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코로나가 걱정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로나가 가져온 변화는 단순한 개인 위생과 건강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 위생때문에 벌어지는 낭비와 소비들, 가려진 얼굴로 잊혀지는 표정들,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으로 나뉘는 세계... 무엇이 달라졌을지 확신할 수 없는, 불투명한 어려움들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코로나 또한 일종의 재해이기에, 그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2년이 지나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더이상 일상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고, 언론에서는 이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마스크를 벗는 것을 두려워한다. 등산을 하면서 숨이 차올라 답답해 하면서도 마스크를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미 일상을 되돌린다거나, 되찾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로 돌아갈수도 없는데 우리는 일상의 무엇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걸까?

한자공부를 통해 과거를 되찾자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이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고대사람들이 재해를 문자로 만들어 사용하면서 昔을 재해로 사용해온 기간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득한 시간동안 어려움을 직시하고, 끝끝내 그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처럼. 昔은 그들의 어려움과 오늘날의 어려움을 떠올려보게 만든다.

 

 


글_동은(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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