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탁 네트워크에서 공부하시는 이동은 샘의 [한문이 예술]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문이 예술]은 문탁넷의 고은샘과 동은샘께서 초등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하셨던 한문 수업 이름인데요, 바로 그 동은샘께서 수업을 준비하면서 또 진행하면서 느끼셨던 내용들을 이렇게 글로 써주셨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가랑비에 옷 젖듯 한자를, 雨
연필을 부러뜨리고 머리를 쥐어 뜯게 만든 한자
17살 여름, 한자능력검정시험 4급을 땄다. 8급부터 4급까지 누적되는 시험 출제범위가 딱 1000자였에 나는 그 날부터 한자 1000자를 외운 사람이 되었다. 물론 국가공인으로 인정되는 급수는 아니었지만 1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그 무게를 들어 올린 내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지금까지 한자를 통해 겪었던 고통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언제부터 한자를 배웠는지 기억을 거슬러 가보면, 미취학 아동 시절 때부터 외우느라 끙끙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한자 공부를 시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어느 학원에서는 영어발음을 위해 혀뿌리를 자르게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정도로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대세를 거스르고 나를 서예학원에 보냈던 이유를 유추해보자면 아무래도 나의 산만함이 원인이었다. 먹냄새라도 맡으면서 사자소학이라도 읽고 내가 제발 조금이라도 차분한 애가 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서예학원에 가면 한자를 급수 순서로 빼곡하게 채워 코팅한 책받침을 줬다. 갈 때마다 그 책받침에 표시를 해 가면서 그 날 외워야 하는 한자를 할당해줬다. 오늘은 쇠 금金까지, 내일은 군사 군軍까지... 피아노 학원 원장님, 태권도 학원 사범님, 가리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었던 나였지만, 서예학원의 할아버지 선생님은 제발 입 좀 다물라고 꿀밤을 때리셨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빨리 한자를 외워서 학원을 탈출해야 했다. 어쨌든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도 꾸준히 한자학원에 다녔고 한자학원에 더 다니지 않게 되었어도 엄마는 계속 나에게 한자를 외우게 했다. 물론 나도 한자를 외워야 자유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꾸역꾸역 한자노트 칸을 채웠다.
당연하지만 점점 한자를 외우는 것은 어려워졌다. 급수가 올라갈수록 복잡해지고 비슷한 형태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쉽게 외워지지도 않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옛말(도대체 지아비라는 말을 외워서 어디에다 쓰는가?)을 반복하고 있자니 노트 표지만 봐도 열불이 일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산만한 애를 앉혀놓고 차분하게 외우라 하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외우기 싫다고 엉엉 우는 건 물론, 제 분을 못 이겨 연필을 부러뜨리고 급기야 교재를 찢기도 했다. 씩씩대며 화가 난 나에게 엄마는 한자공부는 너한테 꼭 필요하다는 말로 설득했지만 나는 도대체 세상에 필요 없는 공부가 어디 있냐며 빽 소리를 질렀다.
이야기로 한자와 만나다
외국어 능력이 능통했던 우리 언니는 고등학생때부터 일본어 능력 시험(JLPT시험)을 준비했다. 일어한자를 외우기 위해서 과외를 받았었는데 그때 겸사겸사 나도 끼워서 한자과외를 받았던 적이 있다. 수학도, 과학도, 국어도 아닌 한자 과외라니. 아무 기대가 없이 시작했지만 지금까지도 선생님이 했던 설명이 떠오른다.
"이건 특별할 특特이야. 왜 특별할까? 소牛가 절寺에 다녀오니 특별한 소인거지!"
"그럼 때 시時에는 왜 절寺이 들어가는 걸까? 왜냐하면 날日이 밝을 때마다 종을 울리던 곳이라서 그렇지. 그래서 시간을 나타내는 글자가 된 거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설명은 형성자나 회의자에 포함된 한자를 이용해 형태나 뜻을 풀이하는 흔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통으로 외우기만 할 줄 알았던 나에게 굉장히 파격적이고 새로운 설명법이었다. 나는 조금씩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왜 의원 의醫는 왜 술이 들어가요?', '사랑 애愛에는 왜 손톱이 있는 거에요?' 그렇게 몇 번 수업을 들으니 한자 안에서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선생님의 설명은 탁월할 때도 있었지만 억지로 연결지어 수상쩍은 적도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때로는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풍경으로 보기도 하고 때로는 한자의 형태를 비틀어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나는 정말 무작정 한자를 쓰는 법과 뜻, 음만 외워온 것이다. 한자로 이야기로 만들어낸 선생님의 설명은 한자를 보는 내 눈을 틔워주기에 충분했다. 한자공부는 엄마의 바람대로 산만한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그 산만함은 다르게 발휘되었던 것 같다.
'물고기 어魚는 왜 이런 모양이 된 걸까? 아래의 점들은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모습일지도 몰라. 손手과 털毛은 왜 이렇게 된 거지? 사슴 록鹿은 뿔모양을 본 뜬게 아닐까?' ...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상상들이 실제 한자 형성 과정과 유사하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나중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한자를 익혔는데,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가지,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보다 한자 외우는 게 훨씬 나아졌다.
시간이 흘러 인문학공동체에서 <천자문>이나 <논어>같은 동양고전 원문을 읽게 되었을 때, 내 지난했던 한자공부는 다시 빛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한문보다는 한자 하나 하나가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더 눈을 반짝였다. 그 한자가 왜 그 자리에 있는 것인지, 무슨 의미로 쓰이는 것인지...! 한자를 다시 만나게 된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이제 처음 <한문이 예술>을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자는 왜 배우는 걸까?
흔히 한자를 배우는 이유로 어휘력을 꼽는다. 한자를 배우면 그 다양한 용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단어를 이해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한자를 배우는 이유를 실감한 건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였다. 중학교부터 과목마다 시험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자가 평균 점수를 깎아 먹는 주범이 된 것이다. 나에게 한자는 거저먹는 문제였기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국어 시험에서 꼭 한두 개씩 나오는 한자 문제를 속수무책으로 틀리는 것을 보고 상식이 없냐면서 그 앞에서 모처럼 주름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체적인 정답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찍어서 맞으면 운이 좋은 거고, 틀렸다면 아쉬운 정도의 점수였을 뿐이었다.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머리에 욱여넣는 공부는 당연히 괴롭다. 학교공부라는게 암기가 전부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자는 특히 더 실용성을 느낄 수 없었다. 자기 이름 석자 이외의 한자를 언제 쓰겠는가. 한자는 점수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과목도 아니었기 때문에 성적을 위한 공부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미술이나 음악, 체육같은 예체능 과목도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괴로워 하면서 한자를 공부했던 것일까? 엄연히 하나의 교과목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한자였지만, 우리말이라고도 할 수 없고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한자를 왜 힘들게 외워왔던 것이까? 다 알아야 한다는 상식을 위해서? 혹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교양을 쌓기 위해서? 어부漁夫의 부夫가 지아비 부夫라는 것을 맞추기 위해서?(지아비는 정말 이런 데나 쓰였다!)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오랫동안 한자를 익혀오며 급수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그 흐름에 관성적으로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굉장히 괴롭지도 않았다. 한자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거나 나를 너무나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그 답을 찾기 전까지 오랫동안 답답했을 뿐이다.
때문에 <한문이 예술>을 준비 할 때 [왜 한자를 가르쳐야 할까?]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과는 그런 답답함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특히나 절대 급수 중심 한자 암기 수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첫 수업을 준비하는 몇 달 동안, 어떤 한자를 처음 만나면 좋을지 고민하다 한자 비 우雨를 찾아냈다.
처음 한자와 만난다면 이것으로
처음 아이들과 만났던 건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리가 수업을 할 때마다 새벽에 촉촉한 비가 내렸다. 강수량이 가장 많은 여름에 아이들과 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시기적으로 이 한자를 고른 것은 아니었다. 雨는 상형자로 어렵지 않게 빗방울이 내리는 비의 형상을 글자 속에서 떠올릴 수 있다. 그뿐인가, 雨비는 눈 설雪, 구름 운雲처럼 다른 글자와 합쳐져 날씨를 의미하는 부수로 쓰이기도 하며 전기 전電의 경우에는 회의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자를 통해서 아이들과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자造字의 원리가 아니라 아주 오래 되어서 알 수도 없는 옛날 이야기였다. 한자가 만들어진 역사에서 가장 초기를 살펴보면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에 만들어진 한자들은 대부분 그 모습을 그대로 본 뜬 상형자 대부분은 하늘에 떠있는 해日와 달月, 마시는 물水과 몸을 데우고 음식을 만드는 불火처럼 우리 주변에서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로 만들어져있다.
비雨 또한 빗방울이 내리는 모습으로부터 만들어졌는데,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비가 내리거나 번개가 치거나, 눈과 우박이 내리고 구름이 가득해지는 모든 일과 연관되어 날씨를 상징하는 글자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기상현상을 구분했고, 그 현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눈 설雪의 경우에는 눈을 쓸어내는 싸리빗자루를, 번개 전電은 길게 내리뻗는 번개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고, 그리고 기우제 우雫는 가뭄에 비가 내리길(下) 바라며 만들어졌다. 이 외에도 구름 운雲, 장마 림霖 모두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하늘을, 날씨를 바라보는 시야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절대로 정확히 알 수 없는 고대 세상에 대해 한자라는 단서를 통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고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었다.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한자 공부
수업에서 배우는 모든 한자가 '쓸모 있는', 그러니까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아니었다. 기우제 우雫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를 외우는 건 별로 소용이 없다. 대신 雨가 들어간 다양한 한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바뀌었는지, 농경사회에서의 비와 오늘날의 비가 무엇이 다른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雨가 확장되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경험을 담은 새로운 한자를 만들도록 했다.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비맞을 우, 비오는 날 지렁이를 본 기억을 되살려 지렁이 밟을 우,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로 만든 구름 많을 우…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 기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雨의 활용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 정도면 한자와 아주 훌륭한 첫 만남이었다.
이후로 몇 년간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한자 공부에 대해 갖고 있던 답답함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었다. 한자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공부가 가능하다는 것! 고대의 시선을 60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유지하고 있는 문자이기에, 오늘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내가 한자를 공부하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과거를 통해 오늘날을 이해하고, 더 풍부한 의미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상식과 교양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는 한자 공부가 되었으면... <한문이 예술>은 아이들과 조금씩이라도 그런 공부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됐다.
글_동은(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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