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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예술

[한문이 예술] 어떤 표현을 할 것인가? : 한자의 색色에서 몸짓祭까지

by 북드라망 2023. 12. 11.

어떤 표현을 할 것인가? : 한자의 색色에서 몸짓祭까지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
 <한문이 예술>은 한문으로 예술藝術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미술 활동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런데 정작 수업을 여는 나는 미술, 예술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한자도 주입식으로 암기해왔던 내가 어쩌다가 초등한자-미술수업이라는 퓨전수업을 만들어 냈던 것일까? 그 배경에는 한자를 보며 막연히 갖고 있던 상상을 시각화 한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천자문>의 원문을 읽다가 비슷한 시기에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천자 중에 한자>를 기획하게 되었고 모두 합쳐 7개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천자 중에 한자> 작업은 그야말로 ‘재미’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한자를 하고 싶은 대로 옮겨서 그걸 실현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들을 청聽은 한자를 악보기호로 대치하고 인연 연緣은 부수로 사용된 실 사糸를 살려 실로 마구 엮어 형태를 만들고, 즐거울 락樂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 춤추듯이 썼다. 이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고, 긍정적인 반응을 수업까지 옮겨보려고 했지만, <한문이 예술> 수업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첫 수업시연날, 자신감에 차서 친구들 앞에서 시연을 했지만 유치하고(헉!) 내용이 빈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강의 내용과 활동이 연계되는 과정에 설득력이 부족했고 맥락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문제에 부닥치니 '미술수업'이라고 생각했던 수업의 컨셉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술수업도, 한자수업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차라리 급수 한자 암기가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한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자와 다른 문자의 가장 큰 차이는 한자가 소리의 표현이 아니라 의미의 표현이다. 형태와 의미, 그리고 그걸 읽는 방법 모두 문자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단순히 표면적인 것-형태-만 다룬다면 그 내용은 빈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천자 중에 한자>는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보이는 것’에 치중된 작업이었지만 <한문이 예술>에서는 아이들에게 활동뿐만 아니라 한자의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는 중요한 점을 잊고 있었다.

한자의 변형 과정을 살펴보면 고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한자의 가장 초기 형태를 가진 갑골문부터 주나라 시기에 사용된 전서, 진나라에 사용된 예서, 그리고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해서체의 변화를 보면 때로는 그대로 모습을 본뜨고, 때로는 문자와 문자를 합쳐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때로는 일부를 탈락시켜 다른 의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자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따라서 그 의미와 형태가 계속 바뀌었다. 예를 들면 꿈 몽夢의 갑골문은 눈을 뜨고 누워있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사람들에게 꿈은 눈을 감고 있음에도 마치 뜬 것 같은 경험을 눈을 뜨고 잠들어 있는 사람으로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성인 성聖은 무언가를 보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고대 사람들의 가치판단이 담겨있었다.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의 한자는 없었다는 것, 그리고 한자의 형태에 고대 사람들의 시선이 담겨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아이들과 한자의 표현력을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이 떠올랐다. 한자의 형성 과정을 상상의 영역으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한자를 통한 새로운 표현활동 또한 실험적인 면이 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실험에 아이들이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도록, 그 배경지식과 고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었다.

 

① 색으로 표현하는 한자: 탄생生과 죽음死의 색
하루는 날 생生과 죽을 사死를 배우는 날이었다. 이런, 탄생과 죽음에 대한 얘기는 평소에도 하기 어려운데…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 무거운 주제에 대해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낯익은 고인돌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고인돌은 고대의 대표적인 장례문화다. 고인돌 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물을 통해 고대의 장례문화를 알 수 있다. 사체를 불에 태우거나, 혹은 그 사람이 아끼는 물건과 함께 묻거나… 그런데 이보다도 훨씬 이전의 죽음의 모습은 어땠을까?

죽을 사死에는 아주 원초적인 죽음이 담겨있는데 들판에 사람이 쪼그려 널부러져 있는 뼈조각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죽음의 모습은 들판에서 풍화되어 사라져가는 뼛조각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그 뼈조각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사실 그 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뼈조각을 통해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것 자체가 고대사람들이 바라보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死를 통해서, 우리는 이후에 생긴 다양한 장례의식 속에는 그 형식보다 죽은 이를 떠올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설명을 끝낸 나는 아이들에게 탄생에는 무엇이 떠오르는지 물어보았다. 눈을 굴리던 아이들이 대답한다. “아기요.” “새끼강아지요!” 동물을 좋아하는 민지가 덧붙힌다. 아이들에게 생명을 의미하는 한자인 날 생生을 보여주니 한자에 조금 더 익숙한 아이가 땅 위에 서있는 소가 아니냐고 했다. 바닥인 一위에 소 우牛가 서있는 모습이라는 거다. 맞는 해석은 아니지만 땅과 연결지은 점은 훌륭했다 왜냐하면 生은 지표면을 뚫고 새싹을 틔운 풀잎에서 만들어진 한자이기 때문이다. 고대 사람들은 일찍이 동물만 살아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찾아낸 죽음과 탄생의 색

  

누군지도 알수 없는 뼈조각이 죽음이라는 글자가 되고, 푸릇한 싹이 생명을 의미하게 되었다. 아직 아이들이 죽음과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워서 대신 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생명은 아이들이 고민하게에는 어려운 주제였기에 아이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생명의 상징색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자가 의미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면 색으로도 자신만의 상징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이들은 여러 색을 통해 자기가 생각하는 생명의 색과 죽음의 색을 골랐다. 재미있던 것은 같은 색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으로,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색으로 골랐던 점이다. 여러 색을 고른 아이들은 마치 葬에서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는 것처럼 수채기법으로 색을 섞기도 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生의 색과 死의 색으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② 몸짓으로 표현하는 한자: 우리만의 제례祭을 만들자
<한문이 예술>은 1년에 크게 네 시즌으로 운영되었는데 방학 때마다 짧게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은 2주 동안 짧고 굵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임팩트있는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한자를 가르치다보면, 필수적으로 중국의 고대 사유나 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많은데, 한자를 통해 중국의 제의적인 문화를 경험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특강은 함께 제사를 구성해 지내는 프로젝트형 수업을 준비했다.
  

아이들이 제사를 준비하며 만들었던 그릇들



방학특강은 6차시였지만 한자는 단 세 자밖에 배우지 않았다. 그릇 정鼎과 거짓 가假, 그리고 제사 제祭. 이 세 한자 모두 고대의 제의적 생활과 연관되어 있다. 보통 그릇이라고 한다면 그릇 기器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鼎은 제사에서만 쓰이는 제사용 그릇(祭器)을 가리킨다. 고대사람들에게 제사는 무척이나 상서롭고 신중한 의식이었기 때문에 제사 전용 그릇을 만들거나 술잔을 만드는 방식으로 정성을 쏟았다. 거짓 가假는 거짓, 가짜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한자에 사용된 叚는 빌리다라는 의미다. 이것이 사람亻과 합쳐져 원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물건을 빌려주던 모습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을 자기것이라 거짓말을 쳤는지 그 이후로 의미가 확대되어 거짓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이들과 이 한자를 배운 이유는 제사를 지낼 때 제사장이 사용했던 가면假面 때문이다. 제사장은 제사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제사에 더욱 몰입하고 정성을 쏟으며 일시적으로 신이나 조상의 힘을 빌려올 수 있도록 가면을 쓰곤 했다.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제사 제祭였다. 다양한 종류의 그릇도, 가면도 모두 제사를 위한 집념과 정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3년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그들이 왜 그렇게 제사를 지내며 살아갔는지 그 근간을 알기 힘들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제사를 올리는 일이며, 1년 내내 시기에 맞는 제사를 치뤘다는 점으로 보아 그들의 삶에서 제사를 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고대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오늘날 우리들이 제사를 올리는 이유를 찾기로 했다. 우리는 직접 제사를 위한 그릇과 가면을 만들고 우리가 지낼 제사를 직접 구성했다. 제사를 지낼 때는 경건함에 집중하고, 상을 당해서는 애도를 다한다. 그러면 선비라고 할 만하다.(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리고 세상에 감사를 올리는 인디언 연맹의 연설을 읽으면서. 고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다리가 부러지는 음식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한자원문을 발문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율동을 하거나 북을 치는 등 우리만의 자그마한 제사를 치렀다. 나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제사를 지내는지보다도 제사를 치르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싶었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주위의 얼굴들을 둘러보며 생명의 순환이 계속됨을 봅니다. 우리는 서로와, 또한 뭇 생명과 더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의무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인사와 감사를 건넵시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위대한 정령인 조물주께 생각을 돌려 창조의 모든 선물에 인사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좋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곳 어머니 대지님에게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랑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인사와 감사의 가장 좋은 말을 조물주께 드립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 하우데노사우니 인디언 연맹의 감사연설 중


 
이것은 한자 수업일까? 예술 수업일까?
<한문이 예술>은 분명 한자수업인데 한자에 대한 설명보다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물론 그렇다고 한자에 대한 내용을 느슨하게 할 수도 없다.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용에 따라서 활동의 형태가 달라졌고 <한문이 예술>은 매 시즌마다 실험에 임하는 자세로 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까?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자신의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그 과정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자는 정말 수업에 큰 주축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옆으로 살짝 빗겨나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한문이 예술>은 한자 수업이 되기도, 그리고 예술 수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한자가 하나의 기호로 사람들에게 수많은 의미로 확장되었던 것처럼, 아이들의 생각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과정을 계속해서 찾아나갈 수 있는, 그런 수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_동은(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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