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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리뷰대회 당선작] 건강에 예민한 대가, 의원병

by 북드라망 2022. 5. 26.

건강에 예민한 대가, 의원병


3등 - 이영순

팬데믹 이후, 기저질환자가 코로나에 취약하다는 뉴스를 접하며 우리 부부는 유별나달 정도로 방역지침을 철저히 따랐다. 면역력에 도움이 된다는 건강보조제도 열심히 챙겨 먹었다. 내 나이 오십도 되기 전 고혈압 약을 복용하다보니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도 나이가 들면서 건강에 예민해져서 몸에 좋다면 비싼 약을 냉큼 사오기도 하고, 이상증상이 감지되면 득달같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 강의』에서는 이런 걸 의원병이라고 말한다. 내가 의원병이라고? 게다가 의원병은 스스로의 몸을 자율적으로 돌보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한다. 나와 가족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신경쓰고 살았는데 내가 한 건 자율적으로 돌보는 게 아니었나? 책을 읽으며 의원병은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나를 돌본다는 건 어떤 건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의원병이란 말은 『이반 일리치 강의』에서 처음 들어보았다. 이 책은 이희경 선생님이 이반 일리치라는 사상가를 통해 코로나 이후의 삶을 고민해 보자고 강의했던 내용을 풀어놓은 것이다. 읽어보니 의원병은 ‘의사 때문에 생겨나는’이란 뜻으로 이반 일리치가 만든 용어였다. 이반 일리치는 의료제도의 확대가 오히려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면서 의원병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분석했다고 한다. 그중 임상적 의원병은 의료 기술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의 역할을 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다른 위험의 부작용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남편은 코로나 백신 부작용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항상 서둘러서 2, 3차 백신을 맞았다. 당시에는 부작용이 있어도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불확실한 안전을 위해 부작용을 감수하는 게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는 이런 임상적 의원병보다 더 고민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의원병과 문화적 의원병이라고 한다. 사회적 의원병은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사람들을 점점 병원과 의사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노화를 의료와 복지의 대상으로 만들고…. 이런 식으로 사회 전체가 의료화 되는 것을 말한다. 문화적 의원병은 통증은 없애야 하고, 질병은 물리쳐야 하고, 죽음은 어떻게든 늦춰야 된다고 하는 즉,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의학적이고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다루겠다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병원이 많아져서 미리미리 검진받고 예방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사회적 의료화가 왜 나쁘다는 거지? 아프고 병들고 죽는 걸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해결하는 게 뭐가 문제지? 이반 일리치는 무엇을 염려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5년 전, 내 혈압 수치가 정상치를 훨씬 벗어나자 남편은 기어이 의사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혈압약 복용을 꺼리는 나에게 의사는 오히려 복용하지 않았을 때 위험이 더 크다며, 많은 환자들이 오랫동안 치료를 해 온 약이니 부작용이 적다고 말했다. 이후 얼마간은 의지에 불타 노력이라는 것을 하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가지 못했다는 것, 약 한 알만 먹으면 혈압 수치는 정상이었다. 그에 따라 힘들여 해야 할 노력은 중단되었다. 그러다 5개월 전, 이번엔 당뇨 판정을 받았다. 5년 전에도, 5개월 전에도 눈물은 흘렸지만 삶은 거의 바뀐 게 없었다. 대신 언제든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건강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제 보니 건강에는 예민하고 삶에는 둔감해지는 게 의원병이고, 건강에 예민한 건 건강을 잘 돌본다는 뜻이 아니라 불안에 대한 반증이었다. 왜 나는 건강에 예민한 걸 건강을 돌보는 것으로 착각했을까?

 

의료 문명에 의존해 “고통을 없애는 것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점점 썩어가는 자아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로 변화하고 있는 거죠. 『이반 일리치 강의』, 이희경, p.124

 

고혈압과 당뇨로 실제 고통을 느끼진 않았지만 이런 내 몸을 생각하면 그게 고통이었다. 의원병이라는 말을 알게 되니 전문가와 우리 사회가 아프고 병들고 늙는 걸 고통으로 인식하도록, 불안해서 건강에 예민해지도록 주입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TV만 켜면 환자들과 전문가가 등장해 천기누설 건강비결을 알려주고, 마침 딴 채널에선 그걸 팔고 있고. 새로운 비결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에 내 삶을 돌아보고 문제를 직면해야 하는 고통은 피하고, 대신 약과 건강보조제, 검진 등의 의료 기술로 나를 돌본다고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이희경 선생님은 팬데믹 시대에 기술에 의존해서 넋 놓고 갈지, 자기 삶을 돌볼지 갈림길에 우리가 서 있다고 했다. 지금껏 잘못된 인식으로 건강에 예민하게만 산 대가로 자기 치료 능력을 상실했던 거라면 이제는 나를 돌보는 방법을 스스로 찾고 싶다. 소박하더라도 자율적인 내 힘으로. 자기 돌봄은 저절로 되지도 않고, 누가 대신 해줄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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