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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진격의 두별! -다산과 연암 가족관계 파헤쳐 보기

by 북드라망 2013. 6. 11.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완전정복 가이드 1탄] 



다산과 연암, 그들의 가족관계



18세기 조선에 나타난 두 거성, 다산과 연암. 이 두 개의 별을 둘러싼 또다른 크고 작은 별들과의 관계를 파헤쳐 봅니다. 오늘은 가족관계편입니다!



다산의 가족관계


1762년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산. 다산의 아버님은 장가를 세 번 드셨습니다(당시 상황으로는 뭐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첫째 부인에게서는 약현을 낳았고, 두번째 부인인 다산의 어머니와는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을 낳았습니다. 이분들이 장성하여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한국 초기 천주교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게 되시죠. 다산의 이복 맏형 약현의 부인(다산의 형수)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천주교의 개국성조로 일컬어지는 이벽이라는 인물입니다.


다산과 다산의 단짝이나 다름없던 둘째형 약전은 사돈총각 이벽과 어울려 지내다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이의 남편 즉, 매형 이승훈은 다산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세례를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승훈은 이벽의 지시에 따라 북경의 천주당에 가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승훈 베드로가 되는데 조선에는 아직 천주교 사제가 없었기에 이승훈은 사제를 대신해 교인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벽도 다산도 모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산의 막내형 정약종, 그는 다산의 친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에 입교했지만 배교를 한 약전과 다산과 달리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순교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처와 2남 1녀의 자식들까지 모두요.




정약종에게는 황사영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조카사위와 처숙의 인연을 맺게 됩니다. 맏형 약현의 딸과 황사영이 결혼을 하거든요. 이 두 사람의 혼배미사를 집전해 주었던 이가 중국인 신부 주문모입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 입국 후 6년 동안이나 숨어서 전교활동을 펼치지만 결국 신유박해 때 처형되고 말지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토굴에서 중국 교회에 천주교 재건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황사영 백서’를 작성하다 검거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됩니다. 천주 앞에서 다 같이 한 형제가 된 뜨거운 가족애가 순교의 불꽃으로까지 활활……흑.
 

이렇게 대부분의 가족들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가운데 맏형 약현은 가문을 꿋꿋하게 지켜내고 있었고, 한때 천주교에 함께 빠졌다가 함께 배교한 다산과 둘째형 약전은 목숨은 지킬 수 있었지만 유배를 떠나게 되는 공동운명에 처하게 됩니다(황사영 백서 사건이 결정타였습니다). 다만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길이 갈렸지요. 언제나 다산의 학문을 격려해 마지않았던 정조를 대신하여 약전은 다산에게 새로운 태양이 되어 줍니다. 동생의 학문을 불타오르게 했던 약전, 언젠가 다시 돌아갈 그날을 위해 매진했던 동생 다산과는 달리 그는 일찌감치 흑산도에 눌러앉습니다. ‘정약전의 흑산도 정착기’는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이하 『두별』)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저는 <정글의 법칙>의 김병만이 생각나더라는……ㅋ 매력적인 분입니다!!).


후에 정약전은 어부로 변신(!)하여 『자산어보』를 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다산의 가족들로는 부인과 자식들을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다산은 열다섯에 부인 홍씨와 결혼을 하는데 무려 60년을 함께합니다. 물론 유배 가 있는 동안 떨어져 살기는 했지만 세 번 장가를 가셨던 아버지(물론 다산 아버님은 상처를 하셨기 때문이기는 했지만요, 흠흠)나 흑산도에 가서 새장가를 들었던 형 약전과는 달리 다른 여자에게는 일절 눈을 돌리지 않았지요. 그런 만큼 금슬도 좋았는지(응?) 다산은 자식도 많이 낳습니다. 무려 6남 3녀(여기서도 다산! 응?)! 하지만 안타깝게도 4남 2녀를 잃게 되는데요, 대개 어린 나이에 마마를 앓다가 그렇게 된 듯합니다. 다산이 『마과회통』을 짓게 된 계기이기도 하구요. 좌우간 살아남은 두 아들이 학연과 학유입니다. 기른 자식보다 잃은 자식이 두 배였으니 다산에게는 더더욱이 귀한 자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자식들은 출사가 영영 막혀 버린 폐족의 자식으로 전락하고 말지요. 피어 보기도 전에 꺾여 버린 자식들이 행여 엇나갈까 싶어 다산은 땅끝에서 부지런히 편지로 자식들을 다독입니다. 자식들이 과연 다산의 말을 잘 들을까요? 확인은 『두별』을 통해서!(ㅋ 참고로 저는 다산의 아들들을 보면서 자식 교육에는 매가 장땡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죄;; 죄송합니다;;)
 

다산의 일간은 정화인데, 월간에도 정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지에는 사화와 오화가 있구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 것이 일지와 월지는 미토…! 눈치채셨나요? 지지가 사오미 합화로 온통 불입니다. 한마디로 다산은 비겁과다형!! 드글드글한 비겁들과 호시절을 함께하기도 하지만 비겁들의, 비겁들을 위한, 비겁들에 의한 고초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 훨씬 많은 것이 비겁과다들의 운명이기도 하지요. 다산 역시 그런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아, 오해는 없으시길! 피하지 않았기에 다산은 다산이 되었답니다.^^ 자세한 사연은 책 속에……호홋!


연암의 가족관계


1737년 한양의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난 연암. 아버지는 처사였지만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계의 요직을 두루 섭렵한 명망가이자 녹봉으로 연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었지요. 이 가장이 돌아가시던 날 집안에는 단 열 냥의 재산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암이 물질에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하네요. 좌우간 할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집안 살림을 맡을 여자는 연암이 세 살 때 연암의 형 희원에게 시집온 형수 이씨. 형수는 연암의 어머니보다 더 오래 연암을 돌봐주었습니다(연암 나이 2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데 형수와는 39년을 함께합니다). ‘허생의 아내’와는 다르게 “마음먹은 뜻을 한 번도 펴” 보지 못하고 20년 동안 열 식구를 먹여 살리다 후사도 없이 죽은 형수와의 안타까운 사연은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에 잘 나타나 있고요, 『두별』에서는 366쪽을 보시면 됩니다.^^  


당신 노론은 막강한 세력이었습니다. <성균관 스캔들>에서 이선준이 "어이! 노론"이라고 불리던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



형수님만큼이나 연암에게 아주 중요한 여인으로는 사모님(응?)이셨던 전주 이씨 부인이 계신데, 다산처럼 오래오래 해로하시지는 못하였으나 전주 이씨가 사망한 이후 연암은 죽을 때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쿨하게 넘기려면 넘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손수 고추장을 담가 자식들에게 보내며 부인의 빈자리를 채웠던 연암을 생각하면 목석같은 저 역시 어쩐지 찡해지지 뭡니까. 좌우간 전주 이씨와의 결혼은 연암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는데요, 이유는 장인인 이보천과 처숙이었던 이양천이 연암의 청년기를 이끌었던 훌륭한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암은 장인에게 『맹자』를, 처숙에게는 문장 짓는 법을 배웠고 처남이었던 이재성과는 평생의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처남 이재성은 연암의 글 곳곳에 평어(평론)를 남겼을 뿐 아니라, 연암의 임종을 지킨 진정한 벗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장인은 사위에게 공부를 가르쳤음에도 사위의 출세를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사위가 과거장에 들어가 그림 따위를 그려놓고 나오면 마음속으로 기뻐했다고 합니다. 사위를 권력의 장에서 뒹굴지 않게 하는 것이 사위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민한 사위도 그런 장인의 뜻을 모르지 않았을 테고, 스스로도 권력과 이권 다툼의 세계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요. 그러던 차에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이후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처숙을 보며 청년 연암은 더욱 뜻을 굳힙니다(참고로 연암은 정말로 먹고 살기가 막막해진 50대에 과거가 아닌 추천을 통한 말직으로 관직생활을 합니다). 포인트는 청년기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연암이 보여 준 삶의 태도는 처가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연암의 자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연암은 다산처럼 다산(;;)하지는 못하였고, 아들 둘, 딸 둘을 두었습니다. 첫째 아들 종의는 형님의 양자로 보냅니다. 큰형수 상을 당했을 때 종의를 상주로 세워 형수의 자식으로 입적시키지요. 둘째 아들 종채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렇다고 넌 이제 내 아들 아니야, 형님 아들이야. 우리의 부자 인연은 이제 끝! 이런 거 아니고 종의가 장성한 이후에도 작은아버지와 조카로서 부자의 정을 이어 나갑니다(연암이 ‘내가 네 애비다’ 하거나 종의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나요’ 하는 출생의 비밀을 가장한 막장도 물론 없습니다!!). 종의의 아들 효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연암이 편지에서 ‘응애응애’ 소리가 가득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엄마 미소가…(응?).




좌우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막내아들이자 독자인 종채. 평생을 포의로 지냈으나 너무너무 훌륭한 일을 해냈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 연암의 행적을 기록한 『과정록』(『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라는 번역문이 나와 있습니다)을 저술했다는 것! 종채는 연암이 열하에 가 있을 당시 태어났습니다. 해서 1780년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해인데요, 『열하일기』의 탄생을 가능케 한 연행이 이루어졌고, 훗날 연암 박지원 탐구를 가능하게 해준 『과정록』의 종채가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이미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밝혀 놓은 다산과 달리 연암은 ‘너무’ 말이 없었기에 『과정록』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합니다. 또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아들을 낳아 이 아들이 후일 명재상이 되었으니, 그 이름은 박규수. 비록 당대에 공식적으로 간행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집 사랑에서 자신과 뜻이 통하는 개화청년들과 할아버지의 문집 『연암집』을 강독했다고 하니, 세상이 할아버지를 잊지 않도록 힘쓴 효자입니다.
 

연암의 일간은 계수, 연암의 비겁도 다산 못지않습니다. 물기둥인 계해 일주인 데다, 일간 계수 옆으로 계수와 임수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국. 재미있는 것은 다산이 자신의 비겁들에 의해 타의적으로 주류 세계에서 추방당했다면, 연암은 자신의 비겁을 통해 주류 세계에서 스스로 빠져 나옵니다. 잠깐 들어갔다(미관말직이라도 조선사회 전체로 보면 주류죠;;) 나올 때도 비겁의 힘을 빌리지요(이 이야기는 연암의 친구 유언호를 소개할 때 좀더 자세히 할게요!). 물과 불이라는 운명적 차이가 가족관계를 비롯한 인간관계에 그대로 투영됩니다. 이 ‘두 별’의 운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지금 바로 주문하세요!! 인터넷서점(알라딘, 예스24, 인터파크)에서 구매하시면 불의 기운이 활활 타오르는 다산컵과 물의 기운이 철철 넘치는 연암컵이 ‘무려’ 세트로 따라 간답니다. 2013 여름, 독자님들을 사로잡을 진격의 초초 스페셜 에디션션션션션~! 부디 다산&연암과 ‘컵플’하셔염^^!            




_편집자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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