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한다, 나는 자유다
영원히 늙지 않는 조르바
박소연(남산 강학원)
조르바는 매우 통속적인(!) 현자다. 고요하기보단 말이 많고, 어느 면에서는 철없는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철없는 현자는 어쩐지 더 매력적인데, 그건 아마도 ‘현자’라는 단어에 달라붙은 이미지를 약간 비틀기 때문일 것이다. 현자라 하면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한 태도, 심연을 꿰뚫는 듯한 눈빛, 모든 것을 통달해서인지 약간은 지루해 보이는 손짓 등이 그려지지 않나. 이는 완벽한 오해다. 사실 붓다와 간디를 포함하여 현자라 불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기쁨을 이야기했다. 그 농밀한 기쁨은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상당히 지루해진다. 각자의 정진으로 직접 느껴봐야지만 알 수 있는 맛이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 외양만을 본다면 경악할 수밖에 없다. 금욕적이고, 고생스러워 보이고, 몹시 지루해 보일 것이니.
이런 점에서 (얼핏 보기에)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면서 끝없이 유쾌한 사람은, 삶을 기쁨으로 빽빽하게 채우는 조르바의 생명력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누구나 한 번쯤 조르바처럼 살기를 꿈꾸지 않을까? 마음껏 사랑하고, 음식과 술을 즐기며,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이야기 나누는 삶.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자유를 이미지로만 사유해서는 안 된다. 기쁨에서 기쁨으로만 이어지는 삶은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조르바의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울퉁불퉁함마저 온통 긍정으로 끌어안아, “자기만의 마음의 법칙을 따라 신세계를 창조”(『그리스인 조르바』, 388쪽)하며 사는 것. 언제고 기쁨을 창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지닌 자, 조르바는 분명 현자라는 칭호를 탐탁지 않아 할 테지만, 그가 현자다. 조르바가 무심코 던지는 말에는 붓다의 길이고, 간디의 길이고, 여느 철학자의 길이기도 한 보편적이고도 심오한 진리가 살아 숨 쉰다. 물론, 아주 통속적이고 맛깔난 방식으로 표현될 테지만. 그게 조르바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더 싫어!
조르바의 말은 시시콜콜한 유머와 무겁고 진지한(하다고 일컬어지는) 이야기를 종횡무진 넘나든다. 우스갯소리를 실컷 하다가도 번뜩, ‘늙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선회하여 평소의 생각을 술술 푸는 식이다. 가볍거나 심오한 주제들의 자연스러운 교차. 조르바와 두목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조르바가 내뿜는 유쾌함의 원천을 찾았다. 죽음 그리고 ‘안티-에이징’.
늙고 죽는 것. 피해 갈 수 없는 인간의 운명. 이를 피해 가기 위한 분투는 2천 년 전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했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계속되어왔다. ‘안티-에이징’, 나이듦에 대한 저항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노화 방지를 위한 각종 건강식품, 화장품, 피부 마사지, 각종 시술 등. 현대인의 얼굴은 자본의 써레질로 인해 잘게 부수어지고 있다. 눈, 귀, 귓불, 코, 콧방울, 인중, 입술은 각각의 특수한(!) ‘안티-에이징’ 기술을 필요로 한다.
신체 또한 마찬가지. 극단적인 예시로 “Don’t Die”라는 구호를 내걸고 ‘안티-에이징’ 실험을 하고 있는 미국의 억만장자가 있다. 기업을 매각해서 엄청난 부자가 된 이후, 10대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젊어지기 위해서 17살 아들의 피를 수혈받는 다소 충격적인 실험부터 시작해서, 30명의 의사와 과학자들로 팀을 꾸려서 매일 같이 신체 상태를 점검했고, 영양제를 한 움큼씩 챙겨 먹고, 강도 높은 운동을 병행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원인도, 치료 방법도 알 수 없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인 자가면역위염을 진단받았다. 발병의 원인이 인위적인 실험 때문이었는지 잠재된 기운의 발현이었는지는 모르나,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놀랍게도 조르바 역시 늙어가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 다른 것은 딱 하나. 그는 오직 ‘늙음’에만 맞서 싸운다. 우리가 ‘안티-에이징’에 집착하는 이유는 미국의 억만장자가 외쳤듯 돈 다이,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헌데 조르바는 오직 늙음만 두려워할 뿐, 죽음에 대해서는 코웃음 친다.
나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내가 잘 실천한다고 믿으니까 하느님이라면 털끝만치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나는 죽음도 역시 무서워하지 않는데, 그건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니고 전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역시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건 나하고 똑같은 셈이죠. (『카잔차키스의 편지1』, 149쪽)
오, 나는 너무나 잘 알아요. 나는 죽을 몸이고, 악취를 푹푹 풍기는 송장이 되고, 의식도 없는 걸레 같은 존재가 될 텐데 – 나는 온 세상에 썩는 냄새를 잔득 풍기겠고, 세상 사람들은 속이 뒤집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를 파묻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그리스인 조르바』, 212쪽)
조르바가 죽음을 대하여 아무렇지 않은 건 그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자기 삶에 자신이 있고), 스스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르바에게 죽음은 언제나 삶 가까이 붙어서 함께 숨 쉬는 친구였다.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그가 사랑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생기로움을 잃어버리고 고약한 냄새를 푹푹 풍기는 송장이 되는 것도 목격했다. 죽음은, 모두가 알다시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러한 필연성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존재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아둔 탓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은 우리의 존재 양식이 소멸되는 것을 뜻한다. 생명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가장 큰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르바의 말을 따라서 생각해보자. “나도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스스로에 대한 조소나 허무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과장된 것들을 모두 벗겨낸 말일 뿐이다. 지구가 속한 은하계마저 더 바깥에 있는 큰 우주에서 보면 별 하나 정도의 크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에 대한 의미 부여, 나는 손실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은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논리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면 죽음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지만, 내가 ‘어떤 것’이라면 죽음 또한 그만큼의 위엄을 갖게 된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조르바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다시 한껏 멀어진다. 죽음에 의연하라는 말을 누가 못할까. 또한 조르바의 말마따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은 별일 아닐지 모른다. 가족, 친구,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이 백 배는 더 견디기 어렵기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조르바가 오르탕스 부인을 떠나보냈을 때를 떠올려보자. 슬퍼하고 애도한 다음 깨끗하게 흘려보냈다. 두목에게 지탄받을 정도로 순식간에!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조르바가 오르탕스 부인을 자신의 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나의 존재 일부가 뜯어져 나가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되려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디가 ‘아파리그라하’(무소유)에 대해 생각하며 자문했던 것도 이와 비슷했다. ‘나의 아내는 나의 소유가 아닐까?’ ‘나의 자식은 나의 소유가 아닐까?’ 간디가 아내 카스투르바이를 떠나보낼 때도 조르바와 비슷했다. 몹시 슬퍼했고, 말이 없어졌고, 병에 걸릴 정도였으나 그 슬픔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윤회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나의 소중했던 사람, 카스투르바이의 삶은 그 죽음으로 인해 완결된 것이다. 이 세상엔 자연스러운 죽음보다 안타까운 죽음들이 훨씬 더 많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지닌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은 자들에게는 한 개체의 완결을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극단적인 슬픔에 빠지는 것은 떠나간 사람을 나의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냉정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사유로도 해석하기 어려운 죽음들이 떠오른다. 전쟁 가운데서, 배에서, 비행기에서, 거리에서 황망하게 죽은 사람들. 나는 그 죽음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조르바에게 물어보고 싶다. 조르바는 뭐라고 대답할까. 두 눈을 부릅뜨고, 쓸데없는 생각 말고 산 자의 의무를 다하라고 호통치려나?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무척이나 담대한 조르바인데, 희한하게도 늙음 앞에서는 겁쟁이가 된다. 늙는 거나 죽는 거나 매한가지 아닌가? 아니다. 늙음에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사람만이 죽음을 대하여 의연할 수 있다. 보통의 현자들은 나이듦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오히려 늙어가는 게 좋다고까지 이야기하는데 조르바는 아니다. 그는 도대체 늙음의 어떤 면모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난 늙는다는 것이 굉장히 겁나는데, 이 두려움을 쫓아 버릴 방법을 통 알아낼 길이 없어요. 늙어 버리면 난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에 얽매이는 신세가 되고, 자유도 잃게 될 테니까, <나는 늙었소> 하고 얘기해야 한다는 게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돼요. (『카잔차키스의 편지1』, 149쪽)
조르바에게 젊음이란 단순히 나이의 문제가 아닌, 세계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춤추고, 사랑하고, 궁금하면 달려가고, 불같이 화내고, 어린애처럼 감탄하는 것. ‘나는 늙었소’라는 말은 그 즉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효력을 지닌다. 신체의 소멸은 아무것도 아니다! 욕망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나는 늙었소’ 하고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죽는 순간이 진정 무서운 때이다. 조르바는 존재의 지속에는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존재의 강도,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죽음을 기다리며 살지도 않는다. 이러한 태도가 소중한 이들을 먼저 보낸 산 사람들의 의무이려나. 「내가 삼도천의 뱃사공에게 양처럼 목을 쑥 내밀고, 〈여보쇼, 카론 씨, 이 목 좀 잘라 주시오. 천당으로 직행하고 싶어서 그래요!〉 이럴 것 같아요?」 (『그리스인 조르바』, 387쪽)
머리에 종을 달고
조르바에게 삶은 사랑함이고 다정함이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겠다는 다짐, 죽을 때 죽을지언정 늙지는 않겠다는 각오는 세상에 대한 사랑에 다름 아니다. 어떤 전문가에게 ‘-쟁이’라는 말을 붙여준다. 조르바는 ‘사랑쟁이’가 적절할 테다. 처음 만난 두목과 강렬한 눈빛 교환을 시작으로 냅다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오르탕스 부인과도 금세 눈이 맞는다.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다”라는 고백을 끝으로 두목과 헤어진 뒤에도 ‘류바’라는 젊은 여성과 살림을 차렸더란다. 그의 사랑은 심지어 ‘종’을 뛰어넘어 돌과 비와 꽃으로 향한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눈을 떠서 볼 수 있을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 – 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 – 을 안을 수 있을까요?” (위의 책, 138쪽)
살아있음이란 추상적이지 않은, 아주 생생한 감각이다. 보이지 않는 행복과 웃음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생경하게 감각하는 것. 커다란 귀를 가진 이가, 세상 속에서 누구보다도 두 눈 크게 뜨고 자유인으로 살려는 이가 간절히 외친다. 언제쯤 자신의 꽉 막힌 귀가, 멀어버린 눈이 회복될지. 조르바는 늘 자신이 삶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할까 봐 염려한다. 그의 욕망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혐오로부터 떠났고, 자신이 살해한 신부의 아이들에게 가진 돈을 다 털어 주면서 재산으로부터도 멀어졌다. 그의 행위를 추동하는 외부의 명령 따위는 없었다. 돈을 주고 물물교환하듯 맺는 관계도 없었다. 그가 돌, 비, 꽃,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땅을 사서 자기 땅 안의 자연을 가꾼다는 뜻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만을 애정한다는 것도 아니다.
큰스님은 떨어지는 꽃, 물소리, 길가의 돌에 한바탕 웃고 갈 수 있는 유머가 숨어있고, 그것들에 부처님이 깃들어 있다고 하셨다. 사랑 장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에 살고 있는 웃음을 포착한다. 거창한 의미도, 정교한 기술도 필요 없는 영역이 유머다. 돌, 비, 꽃,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아주 평범한 것들로부터 이야기를 채취할 수 있는 사람이 코미디언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옆에 피어 있는 꽃을 보았는데, 웃음이 나거나 부처님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인식하기 전에는 보이지도 않았던 꽃이 지금 온전히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감각이 좋았다. 조르바의 간절한 외침이 좋다. 사랑과 다정함엔 언제고 간절해지고 싶다.
조르바와 두목이 헤어지기 직전, 몸치 샌님 두목이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둘은 신나는 춤판을 벌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하늘로 날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친 다음 땅바닥에 누워 조르바는 두목에게 키스한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춤 장면의 생생함에 사로잡혀서 ‘키스’라는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 배로 클로즈업되어 보이는 단어였다. 이 소설의 진짜 러브라인은 조르바와 두목이었고, 조르바는 사실 게이 아니냐는 진지한 토로도 들어봤다. 이와 관련해 잠시 사잇길로 빠지자면 두목과 오르탕스 부인, 여자들을 대하는 조르바의 태도를 보고 기분이 요상스러울 수 있다. 이 정도면 진정한(?) 사랑은 두목과 나눴고, 여자들과의 사랑은 하룻밤 접촉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것.
이건 둘의 인연을 매개한 ‘갈탄광 사업’이 불꽃을 터뜨리며 대차게 망한 다음에 벌어진 일이다. 활동의 끝은 두 사람의 이별을 암시한다. 그냥 망한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의 고생이 허공에서 공중분해 폭발하며 망한 것인데, 조르바와 두목 모두 이상하게 가슴이 시원했다. 사업의 끝, 인연의 완성. 두 사람은 그 순간 서로를 향한 애정을 불태웠던 것 같다. 두목이 드디어 조르바의 언어(춤)로 대화할 수 있게 되자 곧바로 이별해야 하는 아이러니. 내가 다 아쉬웠다. 계속해서 함께한다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친밀해지고, 즐거울 텐데. 그러나 놀랍게도 두목이 먼저 선수를 쳤다. 「조르바, 나는 외국으로 나갈까 해요. 내 뱃속에 든 염소라는 놈이 아직 종이를 더 씹어 먹어야 성이 차겠대요.」 (위의 책, 426쪽)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년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예쁘다. 거기에다가 조르바의 말을, 조르바를 사랑하는 청년이라면? 조르바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친구, 그의 말을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삶으로 틔워내려는 친구, 끝내는 둘만의 춤-언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친구라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이러한 우정을 다루고 있고, 화자가 오르탕스 부인이 아닌 두목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때 그 순간의 가슴 벅참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조르바로서는 그런 친구와 함께했던 기쁨을 표현할 수단이 키스밖에 없었을지도. 그러니 조르바의 ‘진정한’ 사랑이 두목에게 향했는지, 여자들에게 향했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쿨하게 헤어진 뒤에도 가끔가다 조르바는 두목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가 전한 서신이 몇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울림이 컸던 편지를 소개한다. 이는 기오르고스 조르바의 목소리이다.
언젠가 그는 수놓은 세르비아의 몬테네그로 만든 모자도 나에게 보내왔다. 모자의 방울 술에는 은으로 만든 종이 달렸다. <써봐요, 두목.> 그가 편지에 썼다. <꼴같잖은 글을 쓸 때 쓰세요. 나도 일할 때 똑같은 모자를 씁니다. 사람들이 웃죠. “자네 미쳤어, 조르바?” 그들이 물어요. “종을 왜 머리에 달고 다니지?” 하지만 난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아요. 두목, 종을 머리에 달았다는 건 우리 두 사람만 아는 비밀입니다.> (『영혼의 자서전』, 624쪽)
‘살아있음 = 사랑함’이란 등식은 자칫하면 빈껍데기 구호가 되기 쉽다. 사랑하자! 사랑하자! 외친다고 해서 곧바로 세상이 사랑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조르바는 종이 달린 모자를 쓴다. 조르바가 일할 때는 꼭 광산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보인다. ‘몰입’이란 시야가 까마득해지거나, 바깥의 소리가 아득해지는 상태가 아니다. 곡괭이질의 무의식적인 반복 또한 아니다. 감각적 쾌락 속에 파묻혀 키스하거나 잠을 자는 것도 아니다. 강렬하거나 익숙한 하나의 감각만이 남아,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진정한 몰입이며 사랑인가?
모자에 달린 종이 ‘딸랑’하고 울리는 순간, 세상은 한층 더 진하게 조르바에게 다가온다. 명상할 때 멍해지고 캄캄해지는 것을 ‘무기’라고 일컫는다. 멍하고 캄캄한 상태는 일종의 편안함을 주는데, 이 편안함 때문에 수행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무기는 필연적으로 수마(엄청난 졸음)를 동반한다. 그럴 때면 풍경소리, 풀벌레 소리,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옆에 앉은 사람이 부스럭대는 소리 등 어떤 것에라도 의지해서 암흑을 깨고 나오려고 애쓴다. 그러한 접촉이 나를 생생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달린 모자 하나쯤은 필요할 테다. 특히 두목과 같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모자의 종소리는 사랑하는 두목이 슬픔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조르바의 목소리이다. 두목이 그랬고,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그랬듯 글 쓰는 사람은 세계에 울림을 주는 한편 지독한 답답함에 휩싸이기 쉽다. 작가는 쓰는 행위로 세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데, 글은 굶주린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해소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답함이 어둠처럼 스며와 까마득해질 때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 들리는 종소리. 그 소리가 두목을 숨 쉬게 하지 않았을까. 다만 자신의 소임을 다하되 그 밖의 일에 상처받지 말라는, 두목을 향한 사랑이 담뿍 들어가 있는 선물 같았다. 종이 달린 모자를 쓰고 끝끝내 살아서 행동하는 것. 캄캄해지지 않고, 답답해하지도 않고, 머무르지 않고, 움직일 때 울리는 ‘딸랑’ 소리마다 새파랗게 살아 있는 것이 조르바의 사랑함인 것 같다.

조르바, ‘나’의 초록빛 보석
크레타섬을 떠난 두목은 다시 글을 썼고, 조르바는 러시아로 가서 새로운 광맥을 찾아내 갱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베를린으로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멋진 녹암을 찾았음. 즉시 오시오. 조르바.〉” 조르바가 전보를 보냈던 당시 독일은 대기근을 겪는 중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의 모든 과오를 독일에 돌렸다. 1320억 마르크를 배상하라는 조항은 독일을 멸망시키겠다는 유럽 열강의 다짐과도 같았다. 독일은 전쟁 배상금을 내기 위해 화폐를 마구 찍어냈고, 역사상 최악의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마르크화(貨)가 값이 떨어져 우표 같은 걸 사는 데도 수백만 마르크를 가방에 담아 가야 했다. 굶주림, 추위, 낡은 옷, 구멍 난 구두가 당시는 다반사였다. 혈기 좋던 독일인들의 뺨도 별수 없이 창백하던 시절이었다. 작은 풍파라도 일면 사람들은 바람 앞의 낙엽처럼 우수수 길거리에 나가떨어졌다. 어머니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고무를 주어 씹게 했다. 밤이면 경찰이 다리를 지켜, 애들까지 안고 세상을 하직하려는 어머니들을 저지해야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435쪽)
전쟁 패배, 배상금 문제, 지독한 굶주림으로 인한 독일 국민의 허탈감과 분노는 히틀러의 탄생을 도왔고, 제2차 세계대전의 초석을 깔았다. 이런 와중에 저런 한가한 편지라니? 아름다운 초록빛 보석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아름다운 것 좋아하네! 아름다움에는 심장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어.”(위의 책, 436쪽) 처음에 두목은 화를 냈지만, 곧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가지 않는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두목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르바가 답장을 보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두목, 당신은 글쟁이에 지나지 않아요. 이곳에 왔더라면 아름다운 초록빛 보석을 구경할 평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얻었을 텐데, 못 보게 되었군요. 가끔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으면 혼자 앉아서 지옥이 있나 없나 궁리를 해보죠. 하지만 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어떤 글쟁이들은 진짜로 지옥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혼의 자서전』, 623쪽)
보석이 굶주린 사람들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르바는 세상이 비참하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걸 포기하는 것, 삶을 유예하는 것에 화가 난 거다. 대답해보라! 대체 언제 녹암을 보러 갈 텐가? 전쟁이 끝나면? 가난이 끝나면? 모든 책임을 다한 뒤에?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는다! 두목이 세르비아로 갔더라면 조르바와 뜻깊은 시간을 보냈을 터였다.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초록빛을 보았을 터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조르바는 진정 에로스의 화신이었다. 두목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가고 싶어 발을 동동거릴 정도였지만 끝내 가지 않았다. 조르바를 좋아했지만, 조르바가 될 필요는 없었으므로.
두목의 결정이 인상적이다. 촌철살인을 퍼부었지만, 조르바도 한편으로 기특했을 것 같다. 전보를 받고 세르비아로 달려가서, 조르바와 얼싸안고 초록색 보석을 함께 보았던들. 조르바가 죽기 전에 얼굴을 보고, 그간의 이야기를 몽땅 나눌 수 있었던들. 두목은 어쩌면 조르바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끝내 그를 만나러 갈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방울이 달린 모자가, 아니 조르바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두목에게는 정말 아름다운 초록빛 보석이었으므로. 또한 두목은 과감히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에게 도전한 것 아니었을까? 굳이 세르비아로 가지 않아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 멋진 녹암을 발견해보겠다고 하는.
두목은 정말로 초록빛 보석을 발견해내었다. 소설에서는 조르바를 낱낱이 담아내고픈 욕망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 가는 방식으로. 현실에서는 전쟁 한가운데서 떨어져 가는 식량을 헤아리며, 최대한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가만히 누워있던 무기력한 날들을 통과하며 “카잔차키스는 그의 가장 활극적인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다.” (『카잔차키스의 편지2』, 701쪽) 글 쓰는 사람에게 녹암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광부 조르바는 녹암을 캐냈고, 글쟁이 두목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캐낸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말라는 외침. 조르바를 만나고서 인생이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공부하고 글 쓰는 공간으로 오게 만든 것은 짤막한 강연 제목이었다.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때까지 나는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 같다. 나는 다양한 삶 형식을 고민해보고 싶었다.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다. 서투른 사람들끼리 연결되고, 고민을 털어놓고, 마음껏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나의 이런 갈망은 삶에 꼭 이유가 없어도 된다는 곰샘의 말에 힘을 얻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파격적인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 스물한 살에 서울로 독립할 거라고는 나도, 우리 부모님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유 따윈 필요 없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의 갈망은 많이 해소되었으나, 이제는 공부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이 공부는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나는 이 글을 왜 쓰지?’ ‘내 공부가 세상에 이로움을 건네줄 수 있을까?’ 뚜렷한 이유와 목적이 떠오르지 않자 불안해졌다. 필요한 질문이지만, 지금의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왜냐면 공부하는 데 진짜 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싶으니까 하고, 쓰고 싶으니까 쓰고, 궁금한 게 생기니까 읽는다. 조르바가 ‘이 녹암을 보는 게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질문하지 않듯. 아름다우니까 보러 가는 거다. 공부하고 싶으니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뾰족한 이유가 없듯이 삶 또한 그렇다. 저 사람이, 이 말이, 어떤 글귀가 그냥! 너무 좋아! 일흔 살이 다 되어서도 초록빛 보석을 보고 흥분해서 부리나케 편지를 부치는 조르바는 그래서 늘 청춘이다. 조르바가 소설 속 ‘나’, 두목에게 불러주었던 세레나데는 이제 나에게로 흘러왔다. 두목이 두목의 길을 내었듯, 나는 나의 보석을 찾아낼 거다. 조르바와의 만남을 기록한 이 글이 그렇고, 이 글을 토대로 앞으로 만들어갈 활동들이 모두 다 아름다운 초록빛 보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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