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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욕망과 함께 춤을! ‘쾌락’을 창조하는 삶

by 북드라망 2026. 6. 15.

욕망과 함께 춤을!
‘쾌락’을 창조하는 삶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무슨 수로 우리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달고 세상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 위에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389쪽)


파격 오프닝이다. 요즘 부쩍 기쁨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때 은은한 기쁨을 곱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신 언제 어디에서나 불안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마냥 나와 삶을 뻑뻑하게 대한다. 인간은 쾌락보다는 슬픔을 창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최근 ‘고기능 우울증’이란 말을 들었다. 고기능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진짜 열심히 산다. 낮에는 성실하게 일하고 퇴근해서는 자기 계발에 열중한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는데 너무나 우울하다. 생산성에 대한 엄청난 집착, 쓸모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원인이다. ‘고기능 우울증’을 다른 말로 ‘무쾌감증’이라고 부른다. 어떤 일을 하든 그저 버석버석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현대인이 있으려나.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이 감기에 걸렸다는 말처럼 덤덤하게 된 지 오래다. 


열매가 실하게 자라도록 과일나무의 꽃을 솎아주는 작업을 ‘적화’라고 한다. 가지 끝에 달린 꽃을 중심으로 간격을 고려하여 나머지를 정리하는데, 꽃의 시체들이 땅에 수북이 쌓일 때 솔직히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꽃들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가지가 찢어지고 나무가 병들 것이다. 현대인은 적화가 안 된 과일나무 같다. 찢기기 일보 직전의 우리들에게 조르바는 외친다. 인생 뭐 별거 있다고 생각하니? 다 필요 없다. 쾌락을 창조해라! 기쁘게 살아라! 하루살이 같은 우리의 목숨을 가치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말고 없다!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을 잘 안다. 그래서 욕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치도록 먹고 싶던 버찌였지만 한 번 토해낸 뒤로는 마치 낯선 것을 보듯 했다. 빨간빛의 자그마한 열매를 언제 알았던 적이 있었냐는 듯. 욕망과 맞짱 떠 이긴 사람의 다음은 초연함일 것 같은데. 조르바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쾌락. 조르바의 파격적인 말보다 나를 더 아리송하게 했던 건 뒤에 붙은 두목의 해설이었다. 쾌락의 창조와 정신의 창출이 한 차원 위에서는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니. 쾌락과 정신은 슬쩍 생각하기에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쾌락’, 쾌락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정신’ ―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할 단어들이다. 이번 챕터는 조르바 욕망론의 핵심이고 할 수 있다. 결과의 열매고 뭐고, 삶은 기쁨 빼면 시체라는!

 


  


악마 한 마리 ‘반’ 
조르바가 이야기하는 ‘쾌락’은 현실을 뜻한다. 현실과 동떨어져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자들은 모두 비겁자다. 언젠가 조르바와 두목이 수도원에 들른 적이 있다. 조르바가 기획한 케이블 고가 선로 사업의 실행을 목전에 두고 수도원장의 사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두목은 전율했다. 수도원은 “바깥 속세와는 담을 쌓고 녹색 협곡에 푹 안겨 조용히 미소 지으며, 산정의 고결함과 평지의 부드러움이 깊이 있게 조화를 이루고” 우뚝 서 있었다. (위의 책, 278쪽) 들어가기만 하면 수행이 절로 될 것만 같은, 고독함과 경건함이 맴도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수도승들이 한두 명씩 나오더니 둘을 에워싸고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수도승들은 정치 뉴스, 세계 정세, 마을 풍문 등 세상 돌아가는 일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들은 세상을 버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길에는 대도시, 상점, 여자들, 그리고 신문이 투영되고 있었다…….” (위의 책, 279쪽) 수도원은 시끄러웠고, 타락해 있었다.

“마귀 한 마리씩 안 품은 놈은 하나도 없어. 여자에게 침을 흘리는 놈, 절인 대구에 미친 놈, 돈에 홀린 놈, 신문이 보고 싶은 놈……. 푹 퍼진 국숫발 같은 것들! 아, 그냥 속세로 기어 내려가 원하는 걸 실컷 하고 처먹고 해서 대가리나 씻어 내지, 뭐 한다고!” (위의 책, 282쪽)


수도원에 있을 거면 버찌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야무지게 먹고 끊어 내던가. 아니면 세상으로 나가 버찌를 한 소쿠리 사서 미어터질 때까지 먹어 보던가. 이도 저도 안 하면서 기도를 올릴 때도, 성서를 읽으면서도 버찌 생각에 눈앞이 어지러운 형국이라니.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 조잡한 망상만 키우는 수도승들을 보고 조르바는 분개했다. 이런 비겁한 놈들! 더러운 대가리들!

 

조르바의 수행 철학(?)은 분명하다. 어떤 금욕주의자가 여자를 보고 성욕이 불같이 올라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자 도끼로 성기를 잘라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르바는 경악해서 말했다. “참 병신 같은 친구도 다 있네! 그걸 자르다니! 그런 병신은 지옥에나 가야지! 그건 장애물이 아니에요! 그건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라는 걸 왜 모르셔? 병신은 천국에 못 들어가요.” (위의 책, 29쪽) 병신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 어쩜 그렇게 통쾌하던지. 성기를 잘라 성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어도 욕망이 그대로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태어날 때 몸에 달고 나온 것들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사는 자만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 신체도 욕망도 다 끌어안은 동시에 자유로운 사람만이 천국에 간다. 조르바가 토할 때까지 버찌를 먹었던 건 생각마저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수도원 내부 사정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한 신부와 젊은 수련 수도사는 동성연애 관계였고, 조르바와 두목이 묵었던 그날 밤, 신부가 청년 수도사를 총으로 쏴 죽이는 치정살인까지 벌어졌다. 수도원이 영혼을 고양시키는 최적의 장소일 것이란 기대를 품고 갔다가 실망만 잔뜩 한 두목에게 조르바는 이야기한다. 마을과 동떨어진 적막강산에 산다고 해서 영혼이 고양되지는 않는다고. 다시 말해 “정신을 창출할” 수 없다고. 식욕과 성욕을 경멸하고 두려워했던 두목은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점차 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르바가 먹은 음식으로 좋은 기분을 만들어내듯 육체가 먹고, 마시고, 즐길 때 영혼이 함께 기뻐한다면 그 순간 자유롭다.


조르바는 계속해서 거침없이 말한다. 영혼은 천사의 몫이고 육신은 악마의 몫이라고? 그렇다면 더더욱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악마를 이기려면 자기가 악마 한 마리 반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위의 책, 284쪽) 악마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니고 한 마리 ‘반’이라는 게 중요하다. 육신이 악마의 몫이라면, 악마 한 마리 반은 육신을 넘어선 경지 아니겠는가. 그건 이미 자신 안의 악마, 육신을 가진 한 모두가 내포하고 있는 욕망에 빠삭하다는 말이다. 몸에서 쇠붙이 소리를 내면서 사람을 죽였던 파괴적인 본능. 버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미친 식욕. 여자를 찍어누르고 수탉처럼 뻐기고 싶어 했던 부자연스러운 성욕. 조르바는 악마에서 반 치 벗어났고, 그렇다고 두 마리의 악마가 되지도 않았다. 파괴, 불안, 소멸로 향하려는 악마의 본능을 인간의 생명력과 열정, 산 사람의 배짱으로 압도한다! 정신을 창출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악마가 되겠다고 선언하다니, 이렇게 불경스러운 일이 있나. 그러나 하느님이 원하는 수도승의 모습 또한 조르바의 영혼과 닮아있으리라. 욕망을 억압해서 크기를 줄이고, 끝내는 사멸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다. “창조주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계시니까.”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독일인의 사랑』, 배명자 옮김, 더스토리, 77쪽)

 

 

백 살이 되어도 벗어나지 ‘않을’ 저주
생의 목적―쾌락―중에서도 조르바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성과 사랑의 문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가 흘린 한 방울 눈물은 그를 빠뜨려 허우적거리게 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305쪽)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소년 시절 조르바의 집 맞은편에 예쁘장한 소녀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탈로.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크리스탈로에게 “미쳐 있었다”. 얼마나 미쳤냐면, 모여서 크리스탈로를 떠올리며 술 마시는 모임(?)을 가질 정도였다. 취기의 힘을 빌려 고백할 용기를 장전한 청년들은 모두 귀에다 향기 좋은 나륵풀 하나씩 꽂고, 기타까지 야무지게 챙겨 크리스탈로의 집 앞(이자 조르바의 집 앞)으로 갔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골목은 세레나데와 사랑 고백으로 시끌벅적했다.


그때 조르바는 여든 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르바가 가만 살펴보니 토요일마다 분주한 건 젊은애들뿐만이 아니었다. 조르바의 할머니도 토요일만 되면 바빠졌다. 매트리스를 질질 끌어다가 창가에 붙이고,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을 꼼꼼히 손질했다. 그러곤 모르는 척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이런 모습을 들킬세라, 누가 가까이 오면 할머니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조는 척을 했다. 맞다, 할머니는 세레나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이 이야기를 하며 조르바는 슬퍼져 눈시울을 붉힌다. 하지만 그때는 할머니의 마음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모습이 우스워 보이기만 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맨날 계집애 꽁무니만 쫓아다닌다고 조르바를 나무랐다. 잔소리가 지겨웠던 조르바는 그만 곧이곧대로 쏘아붙이고 말았다. “할매는 왜 토요일마다 호두나무 잎사귀를 잎술에다 문지르지? 왜 가르마를 타지? 우리가 할매한테 와서 세레나데를 불렀으면 좋겠지? 우리가 쫓아다니는 건 크리스탈로예요. 할매는 뭐 냄새가 푹푹 나는 송장이나 마찬가진걸!” (위의 책, 71쪽) 할머니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는 그 일이 있고부터 급속도로 쇠약해져 불과 두 달 뒤에 돌아가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르바를 저주하면서. 알렉시스 조르바! 내가 받은 고통을 다 물려받기를! 이제 예순다섯이 된 조르바는 말한다. 자신이 백 살을 산대도 할머니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백 살이 되어도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게 될 거라고. 


조르바는 그날 처음으로 여자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알았다고 고백한다. 여든이 되어도 사랑을 갈망하는, 생각하면 “눈이 빠지게 울고 싶어지는” (위의 책, 325쪽) 존재, 여자. 어쩌면 조르바는 할머니의 저주를 풀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백 살을 산대도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백 살을 산대도 저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랑만은 목젖까지 처넣고 토하지 않았던 그였다.

 

조르바의 사랑법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현존을 꼽겠다. 나는 이게 『그리스인 조르바』의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조르바는 어정쩡한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사람을 대할 때도, 욕망을 대할 때도 그렇다. 배가 고플 때는 그 자신이 닭고기와 계피 뿌린 육반이 되고, 갈탄광에서 일을 할 때는 갈탄광이 된다. 여자와 함께 있을 때는 여자를, 산투르를 연주할 때는 산투르를, 술을 마실 때는 술을 “살아 버린다”. 순간마다 마주하는 것을 살아 버리면 신체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따로 놀지 않는다.


이쯤에서 조르바와 오르탕스 부인의 남은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우여곡절이 많다. 조르바가 크레타섬에 오자마자 곧바로 사랑을 나눴고, 어쩌다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다가, 결국 부인이 죽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막을 내린다. 얽매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조르바이지만 오르탕스 부인의 염원으로 해변에서 반지를 나눠 끼고 약혼까지 했다. 그러다 부인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오르탕스 부인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환상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주위는 난장판이었다. 그날 조르바는 슬프게 울었다.


마을 사람들은 벌써 쓸 만한 것들은 다 쓸어 담으며 여관을 완전히 거덜 내고 있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마당에 있는 닭을 잡아 솥에다 삶고 있었다. 만가를 부르러 온 두 노파(곡녀)도 얼른 끝내고 나가야 뭐라도 챙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급해져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조르바가 벌떡 솟구쳐 일어나 두 노파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뒤로 끌어내었다. 「아가리 닥쳐, 늙은 까마귀 같은 년들! 아직 살아 있는 것도 안 보여서 곡을 하나? 나가서 뒈져!」 조르바가 소리를 빽 질렀다.” (위의 책, 374쪽)


죽음이 만들어낸 광기의 현장에서 조르바는 꿋꿋했다. 그게 조르바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나이를 불문하고 사랑을 원하는 연약한 존재를 그가 가장 연약한 순간에 사랑으로 지켜주는 것. 오르탕스 부인은 조르바의 품에 안겨 죽었고, 조르바는 몸을 떼어 그녀의 눈을 잘 감겨주었다. 울음을 삼키며 장례를 치르고 조르바는 금방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추억하는 말 한 자락 하지 않고 묵묵히 광산 일을 할 뿐이었다. 싱숭생숭한 쪽은 오히려 두목이었다. 어느 날 두목은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제 폐허가 된 오르탕스 부인의 호텔에 다녀왔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두목은 여느 날처럼 일을 마치고 돌아와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조르바에게 쏘아붙였다. 벌써 오르탕스 부인을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냐고.

 

아니었다. 그녀가 죽던 날 조르바는 고통으로 심장이 뜯겨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은 지나갔다. 지나간 일은, 그게 엊그제 일이건 10년 전 일이건 간에, 조르바에게 아득한 과거에 불과하다. 그에게 어제와 내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직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만이 조르바의 눈앞에 있다. 그래서 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무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답한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 온통으로 잘해 보게 조르바. 조르바는 자신한다. 자신만큼 오르탕스 부인을 기쁘게 해준 남자는 없었을 거라고. 부인에게 키스하면서도 자기 함대나, 왕, 훈장, 마누라를 생각하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조르바는 그 순간에 오르탕스 부인과 함께 있었다. 부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고 조르바는 말한다. “쪼그랑 망태기” 같은 조르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현존하는 신체의 에로스! 조르바의 에로스(쾌락)가 자유와 연결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덧붙이자면 ‘현존’이란 키워드는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 장면만 봐도 어렵지 않게 도출될 수 있다. 오르탕스 부인이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장면, 포도주로 부인의 온몸을 소독했음에도 곧바로 시체에 파리알이 스는 장면, 누렇게 뜬 시체 위를 덮은 파리떼. 카잔차키스는 날것의 죽음을 그려 놓았다. 당시만 해도 죽음은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나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함께하고, 조르바와 두목 모두 한동안 묵묵해졌다. 죽음을 생각했고, 삶의 목적을 생각했고, 그런 대화를 나눴다. 병자의 고통도 시체도 부패도 모두 숨겨진 지금의 시선으로는 금세 오르탕스 부인을 잊어버린 조르바가 매정해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음을 늘 체감하며 사는 당시의 사람에게 있어, 그중에서도 특히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영혼에게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사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쾌감증 ― 쾌락을 못 느끼고 산다는 건 신체가 붕 떠 있다는 말이다. 불안이든, 후회든, 죄책감이든, 자의식에든. 어떤 구멍에 빠져서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성과정, 다시 말해서 팽창적인 생물학적 쾌락과정은 전적으로 생산적인 삶과정”(빌헬름 라이히 지음, 『오르가즘의 기능』, 윤수종 옮김, 그린비, 25쪽)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실감하는 만큼,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만큼이 생산적인 삶과정이다. 라이히가 이야기하는 성과정이란 몰입의 능력이며, 이를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환상이다. (학력, 직업, 재산, 사랑 등에 대하여) 남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환상이다. 나의 육체로 겪어내고 나의 정신으로 삭여내지 않은, 외부에서 주입된 모든 욕망들을 불신해야 한다. 믿을 건 자신뿐이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그놈이 유일하게 내가 아는 놈이고, 유일하게 내 수중에 있는 놈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게요. (『그리스인 조르바』, 82쪽)

 


기쁨을 캐는 광부
아직 풀어야 할 게 하나 더 남았다. 나의 쾌락을 창조하는 것과 세상에 기여함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또 사물이 쾌락을 창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간디 세미나 시간이었던가, 곰샘이 적재적소의 쓰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사람도, 사물도 자기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난다. 세미나실에 책상이 없다면 책과 노트북을 놓을 수 없고 편하게 필기할 수도 없다. 공부하는 공간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그게 책상의 기쁨이다. 만약 책상이 체육관 한가운데에 놓여있다면?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래서 곰샘은 사물에 제자리를 찾아주면 너무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사물이 사람과 가장 알맞게, 다채롭게 관계맺을 수 있는 탁월함을 생각하는 마음이 인상 깊었다. 책상의 기쁨, 사물의 쾌락은 이런 모습 아닐까 한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인이 생산성에 집착하는 이유도 자신의 자리를,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는 마음 아닐까. 타자와 관계 맺고 싶다는 절박한 몸부림 아닐까. 책상과 책과 나, 그리고 세미나실을 채운 선생님들- 우리가 모여서 공부했기에 책상이 기쁠 수 있었다. 기쁨은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는 증명이다. 쓸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조르바의 말마따나 연결되는 데는 쓸모 따위 필요 없다. ‘살아있음’ 자체가 이미 쓸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서투름을 개선하면, 조금 더 능력 있고, 조금 더 생산적이고, 조금 더 부유하면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기쁠 것이라고 착각한다. 천만의 말씀. 조르바가 누누이 이야기했듯 금욕은, 오늘의 기쁨을 유예하며 성취하려는 것은 그것이 제아무리 좋은 목적일지라도 가짜다. 과정부터 기뻐야 한다. 아니, 사실은 기쁜 과정이 전부다. 밋밋한 일상은 내가 쾌락을 창조하는 딱 그 순간만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쾌락을 창조한다는 게 약간 추상적으로 와닿는 면이 있을뿐더러 이 마음을 매번 내는 게 쉽지도 않다. 그래서 공유하고 싶은 소중한 문장이 있다. 이 인용문을 꺼내 놓을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래서 한참 아껴두었던 구절이다. 조르바와 두목이 크레타섬에서 헤어진 이후 (기오르고스) 조르바는 종종 두목에게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초대하곤 했다. 물론 두목은 한 번도 가지 못했지만, 아무튼.

우리 만나서 이 얘기를 모두 나눠 보기로 합시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난 밥벌이를 제대로 하고, 몸에서 때를 좀 벗기고, 당신더러 이곳으로 오라는 편지를 쓸 여유라도 내기 위해 애쓰는 중인데, 우리가 같이 지내게 되면 얼마나 좋고 이득이 되는지를 당신도 알게 될 겁니다. 그 까닭은, 이 대지 위에는 생명이 넘치며, 생명은 꽃과 무수한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마련해 놓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그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할 노릇이, 도대체 어디를 가더라도 나는 이 대지의 표면을 차지하는 온갖 나쁜 것들이 그 속에 뒤섞였다는 걸 보게 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곡괭이로 파헤치면 값진 물건들이 올라오는데 – 금이거나 은이라도 상관없고, 혹시 철이 나오면 그것은 더욱 쓸모가 많을지도 모르며, 거기에서 구한 쇠로는 도구를 만들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기도 하며, 석탄을 캐내어 집 안을 따뜻하게 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카잔차키스의 편지 1』,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153쪽) 


인용문의 ‘대지’는 내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첫째로 세상이다. 대지에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별 위안이 되지 못한다. 꽃, 나무의 토대인 대지 자체가 아름답지 못하다. 온갖 불순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공간이 바로 대지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두목이 그랬듯, 조르바 또한 인간과 세상에 대해 오만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비판적 시선, 딱 여기까지였다면 그토록 감동적이진 않았을 텐데. 이어지는 말이 예술이다. 순수하지 못하다고 외면하지 말고 곡괭이질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아름다운 색채도 없는 거무튀튀한 곳에서 금이나 은이 나오기도 하고, 철과 석탄이 나오기도 한다. 그것들은 제각각의 쓰임이 있다.

 

조르바의 곡괭이질은 ‘창조’의 순간이다. 꽃의 아름다움만 탐닉하고 있다가는 꽃이 시들면 삶도 시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쾌락보다 창조다. 곡괭이질을 통하여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캐내는 일. 창조가 지속되어야 삶도 계속된다. 세상을 탓하고, 사람에 상처받기보다는 걸걸하게 욕지거리라도 내뱉으면서 언 땅에든, 봄 땅에든 곡괭이질 한 번 해보는 것. 살아있는 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 조르바의 주장이다.

 

대지의 두 번째 의미는 ‘나’이다. 우리는 세상을 탓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자신을 가장 못살게 군다. 온갖 나쁜 것들이 뒤섞인 나. 나 빼고는 다 아름답고 괜찮아 보인다. 모두 만개한 꽃들 같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캘 것이 있고, 그게 금이든 석탄이든 모두 가치롭다는 것. 마치 존재에 대한 설명 같다. 조르바는 기쁨을 캐내길 멈추지 않는, 다시 말해 지금 이곳에서 살아있기를 멈추지 않는 광부다. 조르바가 죽으면 세상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다. 내가 모든 아름다움을 지탱하고 있는 대지이므로. 고로 나 하나 기쁘게 사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봉사했다고 자부할 만하다.
  
조르바 효과인가, 요즘 몇 안 되는 오프라인 수업 현장이 그렇게 좋다. 강의안 종이에 내려앉은 햇볕, 집중하는 마음들, 배움에 대한 기쁜 동의들.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이 줌 수업에서보다 더 낯설고 따끔하게 다가온다.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내가 앉아 있을 수 있는지. 삶을 낯설게 대하고자 하면 이런 순간들이 얼마나 많으려나. 기쁨은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현재를 쾌락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번 글이 우리에 대한 불신을 확신으로 완전히 못 박아 버리는 계기가 되길. 믿는 마음이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고 했다. 굳건히 믿고, 다음 걸음을 내딛자.


어느덧 마지막 챕터를 남겨두었다. 이별할 때가 왔다는 건 두목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일 거다. 욕망하는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자유롭고 통쾌해질 수 있을까. 이제 조르바가 사랑하는 친구, 두목에게 바치는 이별의 세레나데를 들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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