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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타아(他我)-되기: 정욕과 미각 통제

by 북드라망 2026. 3. 18.

욕망과 맞짱 뜨기


타아(他我)-되기: 정욕과 미각 통제


박 소 연

 

정욕에서 사랑으로
브라마차르야 맹세가 봉사의 지평을 활짝 열었다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맹세 이후, 아내 카스투르바이와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간디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될수록 카스투르바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에 맞섰던 간디. 그는 빠르게 조롱과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백인들의 집단 린치로 생명이 위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카스투르바이가 아이들과 함께 남아프리카에 오자마자 목격했던 것이 백인들에게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남편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머무는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을 끔찍한 첫인상이었다.

낯선 땅에서 적응하기도 무섭고 힘들어 죽겠는데, 간디는 카스투르바이에게 어려운 일들을 요구했다. 그는 한참 공공 봉사에 몰두해 있었고, 소박한 생활 방식을 추구하던 차였다. 간디는 “개인적인 위안을 위해 다른 사람의 봉사에 의존하지 말 것, 나아가 사심 없이 다른 사람들을 섬길 것”(『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186쪽)을 강조했다. 간디의 집엔 간디 가족 외에도 하숙인들이 몇 있었다. 간디의 법률 서기와 조수가 함께 살았고,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평등하게 집안일을 했다. 방에 하수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 요강을 두고 썼는데, 요강을 비우는 일은 간디와 카스투르바이가 직접 했다. 인도에서는 불가촉천민 하인들이 변소든 요강이든, 배설물 같은 더러운 걸 치우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 식의 계급 차별을 견디지 못했던 간디의 성화에 따라 하인을 두지 않고 직접 하긴 했어도 카스트 제도가 숨 쉬듯 자연스러웠고, 불가촉천민을 부리는 게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정에서 자란 카스투르바이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가촉천민 출신의 서기가 왔고,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 “간디는 카스투르바이에게 그의 변기를 치우는 일을 맡겼다. 카스투르바이는 그동안 간디의 공동생활 방식에 반대해왔다. 그런데다가 새로 온 사람, 불가촉천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변기까지 치우라고 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위의 책, 187쪽) 요강 치우는 일을 그냥 해서도 안 되고,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간디의 말에 카스투르바이는 폭발했다. 둘은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간디는 못 하겠으면 나가라고 소리쳤고, 카스투르바이도 목청 크게 응수했다. 그러나 카스투르바이는 결국 자신의 분별심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이 일단락되고, 인도에 돌아가기 직전에도 한 차례 다툼이 있었다. 사람들은 송별회를 열어 간디와 카스투르바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간디는 금, 은, 다이아몬드 등의 귀중품을, 카스투르바이는 고가의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 간디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과 힘을 합쳐 아내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카스투르바이도 물러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마음을 담아 챙겨준 선물을 왜 포기해야 하는가. 심지어 자신한테 준 선물을! 그리고 남편은 도무지 미래를 생각할 줄 몰랐다. 지금이야 딱히 필요 없다고 해도, 아이들이 커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며느리에게 물려줄 만한 게 하나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카스투르바이가 가지고 있던 장신구는 간디가 벌써 다 처분해 공공 봉사에 써버렸다. 빈털터리 집안에 누가 시집이라도 오려나, 며느리를 맞으면 무슨 낯으로 보나…. 아들 넷을 둔 어머니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이다. 속상했지만 간디가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자신을 내려놓는 수밖에. “간디는 모든 선물을 공동체의 봉사를 위해 쓰라고 맡겼다.”(위의 책, 194쪽) 훗날의 카스투르바이는 당시의 선택이 지혜로웠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나중에 간디보다도 더한 무소유 실천자로 변모하게 된다. 그녀의 소유물을 담은 여행 가방이 간디의 것보다 더 작고 가벼웠다고!

 



남아프리카 사탸그라하 운동을 하며, 간디는 감옥에 밥 먹듯이 갔다. 그럴 때마다 공동체 식구들의 생활을 돌보는 건 카스투르바이의 몫이었다. 하릴랄, 마닐랄, 람다스, 데브다스―네 아이를 키우면서. 또 간디하면 단식의 대명사 아닌가. 인도에서는 특히 생사를 넘나드는 단식을 자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카스투르바이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간디는 의사의 처방을 거부했다. 소량의 고기와 소금, 버건디 한 모금, 우유 한 잔까지도. 그는 분명, 인도인들의 ‘바푸(아버지)’였으나,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이상적인 남편 또는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런 간디 옆에서 카스투르바이도 차츰 물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품을 넓혔다. 네 아이의 어머니에서 인도인들, 나아가 불가촉천민까지도 품에 그러안는 진정한 ‘바(어머니)’로.

‘브라마차리’로서 살기로 결심한 남편과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이.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에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관용의 화신’인 그녀는 때로는 흔쾌히, 때로는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며 한결 같이 간디와 함께했다. 간디의 평전을 쓴 루이스 피셔는 책에 간디와 함께 머물렀던 일주일을 담았다. 그가 목격한 간디 부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결코 간디 여사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어떤 특권도 받지 않았으며, 아무리 고된 일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그를 숭배하는 젊은 제자들이나 중년 여성 제자들의 작은 그룹이 자신과 그녀의 유명한 남편 사이에 끼어들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그녀가 간디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거나 그가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식사를 할 때나 기도를 할 때 그녀는 그의 왼쪽 어깨 뒤편에 살짝 비껴 앉아서 부지런히 그에게 부채질을 하고 항상 그를 바라보았다. 반면 그는 거의 그녀를 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가까이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간디의 삶과 메시지』, 루이스 피셔 지음, 박홍규 옮김, 193쪽)


말 없는 가운데, 둘만의 대화가 오고 간다. 이러한 관계를 20, 30대의 두 사람이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브라마차르야 맹세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을 광경이다. 성적인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에 깊은 신뢰와 우정이 생겼다. 간디는 사랑과 성욕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서로의 욕구가 결부되어 있다면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려 해도 결국 각자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둘 사이는 “정욕은 죽고 대신 사랑이 지배하게”(『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378쪽) 되었다.

브라마차르야의 진미는 간디와 카스투르바이의 케미이지 않을까. 맹세 이후 둘의 관계가 상당히 재미있어졌다. 성욕을 제어하니 소유욕이 사라졌고, 이전처럼 아내의 생활을 통제하려는 욕망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카스투르바이의 당찬 성격이 톡톡 살아났다. 간디는 늘 소식했고 차나 디저트는 입에 대지 않았는데, 카스투르바이는 차와 커피를 곧잘 마셨다. 심지어 간디는 아내를 위해 종종 커피를 끓이기까지 했다! 또한 맹세 이후 카스투르바이는 많이 건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브라마차르야를 맹세할 당시 그녀는 넷째 아이를 출산한 뒤 빈혈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렇게 성욕이 많던 남편이 갑자기 브라마차르야를 실천하겠다고 했을 때, 카스투르바이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한순간에 정욕을 절제하는 건 그녀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 테지만 몸이 약했고, 성욕의 절제가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걸 알았기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실제로 카스투르바이는 간디와 동고동락하며 74세의 나이까지 장수했다.

 


“온 세상이 나를 버릴지라도”
37세에 브라마차르야를 맹세하고, 간디는 죽는 날까지 단 한 번도 성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념은 아주 힘이 셌다. 섹스라는 행위는 통제 가능하지만, 생각을 통제하는 건 배로 어려운 일이었다. 간디에 따르면 생각 또한 일종의 행위여서, 생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지 않는 이상 진정한 브라마차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레 맹세를 지켜오던 간디는 67세에 커다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를 보고 싶다는 느낌 같은 것이 찾아왔다. 거의 40년 동안 본능을 이기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서 이 무시무시한 경험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그 느낌을 이겨냈지만, 내 평생 가장 검은 시간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그 느낌에 굴복했다면 그것으로 나는 완전히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위의 책, 590쪽)


갑자기 성욕이 불같이 일어나서 억누르기 어려웠다. 겨우겨우 불을 껐지만, 이 순간은 간디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내 경지가 아직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간디는 몇 달 뒤 이때의 경험을 『하리잔』에 실었다. 역시 간디다. 만천하에 가감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게 당연한, 신기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독립을 앞두고 힌두-이슬람 사이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어졌다. 모하메드 알리 진나는 1946년 8월 16일을 ‘직접 행동의 날’로 선포했다.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 “5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적어도 2천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0만 명이 집을 잃었다. (…) 칼리카타 도시 전체가 납골당으로 변해버렸다.” (위의 책, 710쪽) 진나를 만나 설득을 하는 등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했음에도 참사를 막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테러와 폭력, 학살이 여기저기로 번져갔다. 간디는 몹시도 참담했다. 그는 “자신이 지도하는 비폭력에 어떤 진전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위의 책, 719쪽) 이러한 상태를 타파하기 위해서 간디는 브라마차르야의 ‘완전한’ 실천을 다짐했다.

간디가 생각하기에 이건 지도자의 자질에 관한 문제였다. 자질도 보통 자질이어서는 안 됐다. 간디는 육신을 신이 머무는 성전으로 알았다. 그곳에 한 티끌의 자아도 존재하지 않아야 신이 머물 수 있다. 영적인 힘만이 이 사태를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간디는 절실했다. 게다가 10년 전의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약해진 마음을 정념이 비집고 들어왔다. 한동안은 꿈속에서조차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는데, 한순간 정신이 말짱한 상태인데도 사정을 막을 수 없었다. 간디는 또 편지를 썼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 자리가 어디입니까? 정열에 굴복하는 사람이 어떻게 비폭력과 진리를 대리할 수 있겠습니까?”(위의 책, 721쪽)

간디의 경우 끝까지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욕망이 성욕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알겠지만, 강한 성욕을 타고 태어났다. 문득 간디의 조건이 눈에 들어온다. 용량이 큰 위와 강한 성욕의 소유자. 식욕과 성욕은 모두의 숙제라지만, 간디는 남들보다 풀어야 할 숙제의 난도가 높았다. 조혼 관습이 그의 욕망을 부채질했음에도 간디는 간디가 되었는 걸. 그러니 상황 탓, 조건 탓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맛이 사람의 마음을 따르는 것처럼,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내가 마음을 두는 곳이 내 자리다.

 



하여간에 간디는 이게 마지막 넘어야 할 장애물임을 알았다. 간디는 새로운 종류의 브라마차르야 실험을 통해 욕망에 최후통첩을 선언했다. 세간의 비판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동침 실험이 바로 이것이다. 간디가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정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가? 그러나 간디가 생각하는 완전한 자유는 수도원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를 만나지 않고, 만지지 않으며 정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건 거짓 자유다. 그건 브라마차르야가 아니다.

간디의 벵골어 통역인 보세는 간디와 마누(증손녀뻘 되는 친척이라고 함)가 한 침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목격했다. 또 “간디는 여제자들에게 침대, 심지어 이불까지 함께 사용하자고 권했으며, 그런 다음에 그 자신이나 그의 동료에게 관능적인 느낌이 조금이라도 생기는지 확인하려 했다.” (위의 책, 723쪽) 간디의 방식을 덮어두고 좋게만 해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성급히 간디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맥락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다. 실험에 동의하지 않는 제자들과 친구들은 간디를 맹렬하게 비판하며 그의 곁을 떠났다. 간디 또한 이 일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간디가 하는 일이 늘 그렇듯, 동침 실험도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그에게 한 티끌의 부정이라도 있었다면 간디는 분명 그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자신이 브라마차르야 맹세를 어겼음을, 완전히 실패했음을 선언했을 것이다.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실험은 카스투르바이가 죽고 난 뒤의 일이라는 것도 밝혀 둔다.)

소중한 사람들이 혐오의 빛을 보이며 돌아서는데도 간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첫째, 세상이 뭐라하든 간디의 정의는 분명했다. “나의 정의는 방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래서 두렵지 않았다. “나는 신께 이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났으며, 그 길에서 지상의 동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비난하라 하십시오. 어쩌면 이것을 계기로 고집스럽게도 나를 마하트마라고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몽에서 깨어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그렇게 폭로된다고 생각하니 아주 기쁩니다.” (위의 책, 726쪽)

간디는 몸과 마음에 남은 한 톨의 힘사(폭력)라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욕정에 따른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는 사람, 늘 신을 섬김으로써 전혀 성적으로 흥분되지 않고, 벌거벗은 여자들 –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 과 함께 벌거벗고 누워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진실되지 않을 수가 없고, 온 세상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도 해를 주려 할 수가 없고, 분노와 악의로부터 자유로우며, 『바가바드 기타』의 의미에서 초연합니다. 그런 사람이 완전한 브라마차리입니다.”(위의 책, 728쪽) 어쩌면 간디에게 이 실험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발바닥이 마르고 닳도록 돌아다니며 비폭력을 외쳤지만, 폭력과 학살, 최악의 전쟁이 국내외로 그칠 줄 몰랐다. 폭력 사태가 터지면 참회의 단식을 이어오던 간디. 그랬던 그가 힌두-이슬람의 분열 앞에서 지도자의 자질을 자문했다. 참회의 단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폭력을 이야기하는 지도자라면, 그가 먼저 아힘사 자체가 되어야 한다. 간디는 몸에 남은 한 티끌의 힘사,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는 정욕을 반드시 비워내고 싶지 않았을까.

행동가 간디. 그는 행위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그 순간의 진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다. 잉여가 없으니, 번뇌도 없다. 동침 실험이 불러올 여파를 그도 분명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이 두려워 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 시기의 간디는 온전한 ‘타아(他我)’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정욕을 남김없이 정복하는 것, 자아를 말살하는 것, 비폭력의 실천, 그리고 인도의 스와라지(자치). 간디에게는 모두 다 같은 말이다. 모든 큰일을 해결하는 힘은 크고 작은 내밀한 욕망을 바로 보고, 이를 제어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사람의 일상은 자연스러운 리듬을 탄다. 브라마차르야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 간디의 활동들, 이제 그 경쾌한 걸음들에 접속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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