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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목젖까지 처넣고 토해라! (1)

by 북드라망 2026. 4. 14.

욕망과 맞짱 뜨기

목젖까지 처넣고 토해라! (1)

박소연(남산강학원)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94쪽) 조르바는 자연을 닮은 사람이다. 나의 경우 힘이 들거나 답답할 때면 조르바를 찾게 된다. 사람들이 심신이 지칠 때 산이나 바다를 찾아가듯이. 조르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복닥복닥 들어차 있던 생각들이 비워지고,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사유할 수 있다.


조르바는 “인간은 자유”라고 말했다. ‘자유’로 산다는 건 자연으로,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 아닐까. 나무들은 고요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생명 활동을 하는 중이다. 나무의 생은 태양과 구름과 비와 미생물들과 벌레와 다른 나무들에 의지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타자들과 함께 나무의 뿌리는 흙을 단단히 붙잡고, 최선을 다해 양분을 끌어올리고, 그걸 모든 가지에 전달하고, 몸통을 튼튼히 하고, 잎을 틔운다. 어떠한 작위성도 없이 생명의 역동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은 그 삶의 형식만으로도 타자를 쉬게 한다. 조르바가 내게 그런 존재인 것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사람의 질문이지만, 20대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다. 조르바는 아주 단순한 답변을 내놓았다. 생명의 본성대로 존재하면 된다. 생명의 본성은 삶을 욕망하는 것이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에 단단히 뿌리 박고” (위의 책, 94쪽) 선 나무 인간 조르바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삶에서 필요한 건 나의 이 몸과 열린 마음, 그리고 나를 살고 싶게 만드는 욕망들뿐. 조르바는 진정한 의미의 ‘프로 욕망러’였다.

 

 


이토록 무해한 욕망이라니!
언제부터인가 ‘욕망’이란 단어에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입혀졌다. 탐욕스럽고 간사한, 기름진 얼굴을 가진 사람이 그려진달까.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원초적인 욕망 또한 왜곡된 지 오래다. 여기서 욕망은 늘 괴로움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조르바가 욕망하는 방식이 아주 놀라웠다. 그에게 욕망은 생을 기르는 에너지이지, 존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소용돌이가 아니다. 단, 전제가 하나 있다. 조르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상은 나 같은 사람만 산다면 행복해요. 예를 들면, 밤나무나 너도밤나무처럼 굉장히 큰 나무를 보면 나는 그 나무에 대해서 감탄하고, 마찬가지 얘기이지만 이제 땅 밑에서 능아연을 – 너무나 눈부시며 산소산처럼 푸르디푸른 능아연을 – 보게 되면 나는 그것을 숭배하고, 아니 차라리 하느님과 대자연의 창조에 대해서 감격하게 된답니다. 다른 인간의 노력을 탈취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거나,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지니지 못한 인간은 전혀 인간도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보다 열등한 인간을 찬미하거나 숭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엘레니 카잔차키 엮음, 『카잔차키스의 편지』,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152쪽)


(기오르고스) 조르바의 말이다. 나의 욕망은 “다른 인간의 노력을 탈취하지 않으면서” 실현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무럭무럭 팽창해야 한다. 물론 조르바도 이러한 믿음을 단번에 획득한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젊었을 적 인간도 아니었던 때가 있었다. 조국을 향한 그의 에로스는 무수한 인간의 목숨을 탈취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멋모르고 날뛰던 시절에도 단단히 붙잡고 있던 확신이 있었다.


조르바가 어렸을 적 일이다. 소년은 한때 버찌에 미쳐 있었다. 그러나 주머니를 탈탈 털어봐도 고작해야 동전 한두 개가 전부. 그 정도 사 먹는 양으로는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나중에는 밤이고 낮이고 버찌 생각이 머릿속을 맴맴 돌아 견디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여느 날과 같이 버찌를 갈망하던 조르바는 문득, 자존심이 상했다. 이따위 조그만 열매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쥐락펴락하는 거지! 안 먹으면 괴롭고, 먹으면 더 원하게 되는 통제 불가한 자신의 식욕이 굴레처럼 느껴져 갑갑했다. ‘네가 뭔데, 나를 갖고 놀아?’ 조르바는 작심하고 아버지 주머니를 뒤져서 은화 한 닢을 훔쳤다. 다음 날 그 돈으로 버찌를 왕창 사서 먹었다. 배가 꿀렁거리고, 조금씩 역류하다가, 끝내는 몽땅 토할 때까지.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 훗날 담배나 술을 놓고도 이런 짓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에 휘둘리지도 않습니다. 조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한때 그걸 너무 좋아하다 그것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버렸지요. 그때부터 그것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82쪽)


조르바가 자연과 닮아 보였던 이유다. 조르바의 욕망에는 충동과 탐닉이 끼어들지 못한다. 술, 담배, 조국, 심지어는 그 어떤 이념마저도 ‘처넣기’ 전법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조국을 미치도록 사랑했으나, 그 에로스에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살해한 불가리아 신부의 다섯 아이와 마주한 순간, 조르바는 조국을 토해 냈던 것이다. 조르바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망이 왜곡된 방향으로 치달아가거나, 죽음 충동으로 향하게끔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버찌와 한판 뜬 경험이 있었기에. 이후 길 위의 삶을 선택하고부터는 더욱 단순해졌다. 오직 생을 위한 욕망만이 남아, 그것들을 마음껏 발산하고 만끽하면 되었다. 밤나무나 너도밤나무처럼.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란 “다른 인간의 노력을 탈취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거나,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 존재가 이다지도 무해하게 다가온 건 처음이다. 그동안 나는 조르바와는 정확히 반대로 인간을 바라봤다. 다른 인간의 노력을 어떻게든 탈취하여 무엇인가를 발견하거나, 좋든 나쁘든 내게만 이로운 일이면 되었다는 마음을 지닌 존재. 내 안에도 무수한 탐욕과 이기심이 있음을 알고, 뉴스만 봐도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나오기에 인간을 도무지 곱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폭력의 광기에 휩싸여 야수처럼 사람을 죽였던 청년,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세상 별꼴을 다 목격했을 조르바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참 해맑다. 국가와 이념에 눈멀었던 과거의 자신과는 작별한지 오래라, 후회와 자책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는걸! 비겁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으면 퍼부었지 냉소로 대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욕망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망은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기 나름이다. ‘인간도 아닌’ 사람들은 언제든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 조르바가 했다면 모두에게도 열린 길이다. 그래서 조르바는 인간에게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지 않는다. 대신 생명답게, 세상 무해하게 욕망을 분출하며 사람들 속에 녹아든다.

 

 


일과 이야기를 창조하는 ‘먹기’
크레타섬에서 두목은 조르바에게 갈탄광 사업을 일임했고, 조르바는 인부들을 관리·감독하는 한편 직접 탄광 안에 들어가서 갈탄을 채취하는 일을 했다. 낮 동안에는 “대지와 곡괭이와 갈탄에 호흡을 일치” (위의 책, 161쪽) 시키며 일에 취해 있다가, 저녁이 되면 두목과 함께 식사하는 간결한 일과.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조르바는 완전히 지쳐서 집에 돌아온다. 말에는 힘이 없고, 동작도 굼뜨다. 그러나 음식이 들어가는 순간, 희미하게 깜빡거리던 전등이 선명하게 밝아지듯 조르바도 다시 반짝인다. “그의 말대로 엔진에 연료를 채우고 삭이면 그의 몸이라는 기계는 다시 생기를 되찾고 속력이 붙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 눈에는 불이 켜지고 지난 일들이 다시 그의 기억으로 되돌아왔으며 발에는 날개가 달린 듯이 춤을 추었다.” (위의 책, 99쪽)


그가 먹는 걸 묘사한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게걸스럽게” 먹는다, 음식을 “요절냈다”, “우적우적” 먹는다, 포도주를 “그득” 따라서 목구멍에 “콸콸” 쏟아붓는다…. 읽기만 해도 배가 고파진다. 요리도 얼마나 맛깔나게 하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첫 만남 때 “수프를 만들 수 있다”라는 말로 두목을 꼬시지(?) 않았겠나. 조르바는 늘 두목과 함께 먹을 수프를 끓였다. 요리하고, 식탁을 세팅하고, 두목을 부르고, 오르탕스 부인을 불렀다. 먹고, 먹이는 일이 조르바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배불리 먹고 나자 기억이, 말이 우글거리기 시작한다. 조르바의 ‘먹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야기이다.
  

그가 밥값을 해야 할 때가 오면 나는 이렇게 소리친다. 「이야기하세요, 조르바. 뭐든 이야기해요!」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케도니아 전체가, 산이, 숲이, 냇물이, 코미타지 게릴라가, 부지런한 여자들과 건강한 사내들이 그와 나 사이의 좁은 공간 가득히 펼쳐지는 것이다. (…) 그는 난장판이 된 발칸 반도를 돌아다니며 늘 경이로 반짝이는 작고 매서운 눈으로 모든 것을 샅샅이 보고 온 사람이었다. (위의 책, 77쪽)


숲의 나무들은 개별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속을 들여다보면 뿌리들이 서로 얽혀있어서 이게 이 나무의 뿌리인지, 옆 나무의 뿌리인지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그물망이 짜여서 형성된 게 숲이다. 조르바-나무의 뿌리는 이야기이다. 오르탕스 부인이 조르바에게 푹 빠졌던 것도, 두목이 조르바를 애정하는 것도 다 이 넘실대는 이야기 덕분이다. 조르바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게 그만의 것인지, 나도 발칸 반도를 휘젓고 다녔던 것인지 그 경계가 무색해진다. 그뿐인가? 오르탕스 부인에게서 걸쭉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흘러나와 조르바의 뿌리를 감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왕진지’ 두목에게서 얼핏 조르바의 대사인가 헷갈릴 정도로 유머러스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해 서로를 휘감는다. 타자들은 이야기를 통해 상대를 너무나 사랑하게 된다. 존재의 일부를 공유하게 되었으므로, 두목은 조르바이고 조르바는 두목이기도 한 것이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어내고, 혹자는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내고, 혹자는 신을 만들어낸다나 어쩐다나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밖에요. 두목,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 나는 내가 먹는 걸로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냅니다.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위의 책, 100쪽)


조르바의 식(食)철학은 간단하다. 먹은 음식으로 일과 좋은 기분(혹은 좋은 유머)을 만들어내는 것.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는 먹기는 부담스럽다. 그게 다 내 비계가 되고, 똥이 되니까. 신을 만들어낸답시고 어깨 무겁게 살아가는 것도 조르바의 취향은 아니다. 그건 마치 까마귀가 비둘기의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를 흉내 내려다가 자신의 보법을 까먹은 꼴이다. 까마귀가 까마귀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기껏해야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는” 없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라는 말이다. 삶을 욕망하면서. 즐겁게 먹고, 마시고, 서로의 뿌리를 공유하면서, 그렇게. 


음식은 갈탄광에 곡괭이를 힘껏 꽂아 넣을 수 있는 힘을 준다. 저녁이 되어 기진맥진해졌다면 흡족할 만한 일이다. 그만큼 일을 창조했다는 거니까. 또 밥 먹으면서 두목과 수다 떠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나의 식욕이 타자와 연결되고, 먹은 음식이 곧바로 이야기로 만들어져 나오면 존재가 무거워질 틈이 없다. 때때로 식욕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은 먹은 음식이 잉여로 남아 내 안에 축적될 때다. 이야기를 창조하라고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삶이 지루한 하루의 반복이 아닌, 창조의 장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이야기는 샘솟을 것이므로.


아, 물론 이야기가 꼭 걸쭉한 언어의 형식으로만 생성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절에서 발우공양을 할 때는 침묵 속에서 밥을 먹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무수한 타자와 연결되는 시간이다.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라는 구절을 끝으로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도업(道業)’이라는 말부터 그렇다. 수행자가 도업을 이루려는 이유는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다. 밥 한 그릇이 앞으로 만날 무수한 인연을 매개하는 것이다. 또한 발우공양 끝에는 꼭 발우를 씻은 물을 가라앉혀 깨끗한 물만 덜어내어 모으는데, 이는 아귀를 위함이다. 아귀는 전생에 탐욕을 부린 죄로 아귀도에 떨어진 귀신이다. 배는 엄청나게 커서 늘 허기를 느끼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아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밥풀 하나도 삼킬 수 없고, 오직 발우를 씻은 물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발우공양에 참여한 대중은 혹여 찌꺼기가 달려 들어가지는 않는지 매우 조심하고, 마지막까지 그 물을 보고 또 본다. 작은 고춧가루 하나도 아귀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먹기’는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와 세상을 연결한다.

 

출처 - 불교평론


그동안 나는 조르바의 호기심을 몹시도 부러워했다. 글을 쓰고 싶은데 질문이 생기지 않으니까, 책과 케미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세상을 봐도 도무지 특별할 게 없었다. 도대체 조르바는 뭐가 그리도 경이로운 걸까? 여자, 남자,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면서 그는 감탄한다. 놀라워한다. 고백하자면, 그런 조르바를 보면서 저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었다. 밥을 먹으면 몸에 생기가 돌고, 다시금 삶에 대한 의욕으로 가득 차는 그런 감각이 내게는 없다. 대개 먹어야 하니까 먹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먹는다. 내가 생명답게 욕망하는 법을 모른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평범한 일상을 지겨움으로 받아들이는 내가, ‘호들갑’ 떤다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내가 사람을, 꽃을, 물을 본들 호기심이 생길 리가. 일상을 버려두고 나는 어떤 새로움과 특별함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걸까. 조르바와 함께 생명다움의 끝장까지 가보겠다. 나의 무딘 감각을 차차 일깨워야겠다. 

 

 

말 없는 말을 토해 내다
이제 하이라이트, 조르바의 폭발하는 생명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바로 조르바의 춤! 그는 국적 불문 다양한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중 러시아 친구와의 우정은 워낙 강렬하여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도 광산 일을 하러 러시아에 가게 되었다. 선행 학습한 말이라고는 겨우 대여섯 마디 - “예, 아니요, 빵, 물, 사랑한다, 오너라, 얼마요?”(위의 책, 110쪽)가 전부다. 꼭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골라 배운 말들도 참 조르바답다. 인간이라면 “예, 아니요”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버찌에, 술과 담배에, 조국에 대해 조르바가 확실한 대답을 내놓았던 것처럼. 또 맛있게 먹고, 마셔야 하겠다. 빵과 물 없이는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그렇다면 “사랑한다”와 “오너라”는? 이 말을 모르고서는 살 수 없다. 일을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르바에게 광산은 바위들의 집합체 이상이었다. 조르바가 크레타섬에서 갱도가 무너지는 미세한 소리를 인식해 인부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건 갈탄광을, 자신의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오너라” 외쳤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던 소리였다.

 

그 나라의 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어야 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르바를 보니, 어느 ‘정도’라는 게 무색할 정도다. 이렇게 금방 친구를 사귀고, 형제만큼 다정한 우정을 나누었던 걸 보면 말이다. 존재가 존재를 만나는 데 뭐 많은 게 필요 없다는 증명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친해졌지? 볼셰비키였던 친구는 조르바에게 러시아 혁명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조르바 또한 자기가 어떻게 이 러시아 땅에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눈빛으로만 정다움을 주고받는 그런 대화는 둘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둘은 바디 랭귀지로 대충 대화의 룰을 정했다. 러시아 친구는 러시아어로 하고픈 말을 한다. 듣다가 답답해지면 조르바가 “그만!” 하고 외친다. 그 순간 친구는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춘다. 조르바도 되는대로 손을 뻗고 발을 구르며 화답한다. 조르바가 그리스어로 떠들 때도 마찬가지. 러시아 친구가 “그만!”이라고 외치면 즉시 춤판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아주 푹 가라앉아 있어요, 제기랄! 몸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주둥이만 나불거리고 있어요. 하지만 주둥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주둥이가 당신한테 뭘 알려줄 수 있어요? 아, 당신도 보셨어야 하는데! 그 러시아 친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온몸의 말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얼마나 잘 알아들었는지! 나는 내 불행을, 내 편력을 춤으로 추었습니다. 내가 몇 번 결혼한 사람인지, 내가 한 짓(돌장이, 광부, 행상, 옹기장이, 의용군, 산투르장이, 볶은 호박씨 장수, 대장장이, 밀수꾼), 감옥에 들어간 사연, 탈출한 이야기, 러시아로 굴러 들어온 경위 등등……. 맹한 친구였지만 내가 표현한 건 모조리 알아들었지요. (위의 책, 110쪽)


조르바가 온몸으로 하는 말에 한껏 귀를 기울이는 러시아 친구의 모습이 그려져서 웃음이 난다. 집중, 호기심, 애정 어린 눈길, 그 유연한 마음의 파동이란! 이렇게 주로 기쁠 때 춤을 추지만, 가끔은 슬픔을 춤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조르바의 첫 아이 디미트라키가 세 살이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조르바는 슬픔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슬픔의 늪으로 점점 가라앉고 있는데, 속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춤춰!” 조르바는 즉시 몸을 움직였다. 그건 생명의 명령이었다. 그 상태로 더 있으면 위험해. 디미트라키의 생이 짧게 끝났다고 조르바의 인생까지 그 리듬을 따를 수는 없다. 조르바는 생명의 외침에 눈감지 않았다. 앞의 버찌 사건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조르바는 슬픔에 잠식되는 대신 밀어 넣고 토해버렸다. 온몸으로 절박한 춤을 토해 냈다. “그때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정말 미치고 말았을 겁니다.” (위의 책, 108쪽) 조르바가 과거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조르바는 죽는 법보다는 사는 법을 안다. 욕망하는 법을 안다.


조르바의 춤을 보면서 생명력의 끝판왕을 마주한 것 같았다. 감정이 뭉쳐서 아프지 않고, 언어가 달라도 말이 통한다. 그리스어, 러시아어, 손짓, 발짓, 웃음, 포옹, 눈맞춤 – 온갖 걸 다 동원해서 조르바와 친구는 둘만의 언어를 창조해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겪어왔는지 서로의 역사를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몇 달 전 다람살라에 갔을 때 숙소에서 만났던 백발의 호주 할머니가 떠오른다. 7일 동안 딱 두 번, 밤에 별을 보면서 대화를 나눴다. 밤공기가 꽤 쌀쌀했지만, 서로 ‘이러다 얼어 죽겠다’ 싶기 전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의 영어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다.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하지만, 속 깊은 이야기를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호주 억양이 익숙하지 않아서 중간중간 의미를 놓쳤다. 그래도 우리는 눈치껏 대화를 이어갔다. 할머니는 짧은 시간에 인생사(연애, 사별, 재혼…)를 다 들려주었고, 자신이 암 말기이며, 다람살라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강력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자신이 영영 눈을 뜨지 않을 순간이 오늘 밤일지 내일일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두렵지 않다고 했다. 자신의 전생을 알고, 이번 생은 봉사의 의무를 띄고 태어났으며, 다음 생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을 거라는(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차원의 세상들이 중첩되어 있으며, 그중 어딘가에 태어날 거라는) 이야기를 할머니는 처음 본 나한테 담담하게도 말했다.


첫 대화부터 무겁고 심오한 주제들이 내게 쏟아졌는데, 다람살라라는 시공간 덕택인지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슬프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몸 잘 챙기라거나 건강을 걱정하는 안부의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죽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할머니에게 내 이야기도 떠듬떠듬했다. 내가 뭘 하면서 지내는지, 고민이 뭔지, 묻어두었던 슬픔, 그리움 같은 감정들도 털어놨다. 마지막 날, 할머니와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고 할머니는 단언했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 또한 우리가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든, 다른 차원에서든. 의사소통이 물 흐르듯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서로가 10년은 알고 지낸 사이 같다고 느꼈고,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조르바는 좋은 삶이 별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알고 싶고, 나를 알리고 싶고, 마음을 나누고 싶은 욕망을 무시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부끄러움과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을 떨치고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던 것도 그런 욕망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그 마음을 평생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먼저 다가가고, 삶을 묻고, 타자를 마음에 들이는 감각을, 타인을 향한 미소를 잃으면 안 된다고.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보고 있으려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저렇게 쾌활하고도 단순하게 세상과 어우러질 수 있는지! 그의 몸과 영혼은 얼마나 조화로운 하나를 이루고 있는지! 또 여자와 빵과 물과 고기와 잠 등 모든 것은 그의 몸과 너무도 행복하게 결합하여 저 조르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위의 책, 194쪽)


여자와 빵과 물과 고기와 잠 – 존재의 원초적 욕망은 세상을 향한 다정함과 분리될 수 없다. 식욕, 성욕이 나를 소외시켜 고통스럽다면 잠시 멈춰서 자신을 살펴야 한다. 내가 생명의 본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치달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조르바의 말마따나 내 안에만 푹 가라앉아 있지는 않은지. 식욕과 성욕이 이렇게 멋지게 변주될 수 있다니. 내놓기 부끄러웠던 욕망들이 엄청난 잠재력으로 탈바꿈되는 순간이다. 

욕망에 충실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약간 착잡해진 마음 반, 삶의 본질을 알게 된 기쁨을 숨길 수 없는 상태 반이 되어 앉아 있는 두목. 조르바는 두목에게 “윙크를 보내고 나서 물었다. 「좀 웃어요. 왜 그런 눈으로 보고 계시오?」” (위의 책, 108쪽) 들어서 아는 것을 넘어서 두목의 뻣뻣한 신체가 춤을 출 수 있게 될 때까지 조르바는 욕망 레슨(?)을 끝낼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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