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함께 춤을!
브라마차르야와 경쾌한 일상
박소연(남산강학원)
간디의 삶에서 씨앗을 한 움큼 집어와 내 삶에다 옮겨 심고 있다. 이건 재밌는 작업이다. 마음의 밭에 뿌려진 새싹들이 쓱 머리를 내밀 때 신이 난다. 나만 포착할 수 있는 아주 극미한 내면의 변화이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가끔가다 크게 환희로울 때가 있다. 간디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 행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무엇 하나라도 직접 행동하게 해서 살맛이 나게 만드는 힘을 간디는 가지고 있다. 그 씨앗들은 삶의 ‘불안도’를 확 낮춘다. 간디를 만나고 이 세상이 할 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다. 앞으로는 적어도 세상에서 1인분의 역할을 해내지 못할까 봐 불안하지는 않을 것 같다.
브라마차르야는 불안을 내려놓고, 타자와 기쁘게 함께하고, 삶을 살뜰히 대하는 태도를 익히게끔 하는 가장 기본 원리이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얼마나 많은 망상을 낳는지 알고, 배움과 삶이 한 퍼즐로 맞춰질 때의 뿌듯함을 안다. 브라마차르야 – 신·구·의의 일치됨 – 이것만큼 향기로운 진리가 또 있을까. 욕망은 이렇게 일치되고 몰입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동안 브라마차르야 맹세의 과정을 쭉 스케치했다. 이제 브라마차르야의 실질적인 작용 – 그것이 어떻게 간디의 삶을 넓고 밝게 만들어주었는지 살펴볼 차례다.

마음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힘
영국 유학을 떠나기 전 간디는 어머니와 술, 여자, 고기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자신 있게 맹세했지만, 영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벌써 사방 천지에서 간디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어느 항구에서의 일이다. 해안가를 걷던 간디에게 포주가 달라붙었다. “선생님, 열네 살짜리 아이가 있습죠. 저를 따라오십쇼, 선생님. 제가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값도 별로 비싸지 않습니다, 선생님.” 열여덟의 간디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배로 돌아가 일기장을 폈다. 그러고선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아주 상세한 매뉴얼을 만들었다.
침착하라. 그리고 용감하게, 여자를 원치 않는다고, 저리 비키라고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안전할 것이다. 혹시 곤란하거든 즉시 근처에 있는 경찰관에게 이야기하라. 아니면 필시 근처에 있는 큰 건물로 들어가라. 그러나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건물의 이름을 보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인지 반드시 확인하라. 그것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문지기에게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말하라. 그러면 문지기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줄 것이다. (…) 이럴 때는 인색하게 굴지 말라. 문지기에게 돈을 주어라. (『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한길사, 90쪽)
이 대목에서 왜인지 낄낄 웃게 되는데, 간디가 하도 진지한 태도로 서술해서 그렇다. 그런데 웃음기 빼고 찬찬히 보면 아주 실용적인 지침이다. 가장 먼저 침착해야 한다. 그 상황에서 당황해버리면 어물쩍하는 사이 포주의 적극성에 휘말려 여자가 있는 방으로 등 떠밀릴 수 있다. 당황하는 순간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어가므로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거절의 의사를 밝혔는데도 끈질기게 쫓아온다면 외부의 도움을 받거나 건물로 피신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럴 땐 인색하게 굴지 말고 문지기에게 돈을 주라고까지!
간디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일을 겪든지 간에 대충 생각하고 묻어두는 법이 없었다. 사실 맹세의 핵심은 맹세 자체에 있지 않다. 큰 결심 했다고 해서 그걸 지속하는 힘이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설계가 알맹이다. 간디가 브라마차르야 맹세를 평생토록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쓱 지나갈 법한 이런 일들을 절대 모호하게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치밀함과 사려 깊음이 훗날 정치의 영역에서 간디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만들었을 것이다. 진지한 태도를 중2병이나 예술병으로 치부하는 요즘, 간디의 모습이 눈에 더 들어온다.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까지 구구절절 적어놓은 간디의 일기가 구차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행위는 생각의 소산이므로 간디처럼 치밀하지 않으면 겉넘게 되기 일쑤다. 이런 진지함이 예기치 못한 유머를 창조하는 건 덤!
22세의 간디는 끝끝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고, 3년 뒤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인도로 돌아온다. 그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인도 땅을 밟았을 간디는 곧바로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간디가 어머니를 잃은 커다란 슬픔을 자서전에 상세히 밝혀두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간디의 서술은 아주 담백했다. “내 비통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했다. 가슴속에 두고두고 기다리던 게 이제 다 무너졌다. 그러나 슬픔에 못 견디어 미친 듯이 행동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도리어 눈물을 참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간디 자서전』, MK 간디, 함석헌 옮김, 한길사, 156쪽)라고 써두었다.
간디는 빠르게 일상을 회복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한 챕터를 할애하여 기록해두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내용은 담담한 한 문단이 전부였다. 이 미스터리는 곰샘의 강의를 듣는 중에 풀렸다. “만약 간디가 영국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도 마시고, 매춘도 하면서 얼렁뚱땅 지내다 돌아왔다면 회한이 뼈에 사무쳤을 거예요. 하지만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슬픔이 컸지만 이겨낼 수 있었을 겁니다.” 어머니가 바라던 것을 모두 지키고 떳떳하게 돌아왔기에 간디는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일을 그르쳤기에 그 대목을 소상히 밝히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이번의 경우에는 마음에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회와 자책 없이, 맹세로 단단하게 연결된 어머니와의 결속을 느끼며 간디는 새롭게 삶을 도모한다. 이 당시 22세는 지금의 50대 정도 연륜은 되어 보인다. 간디는 이제 정서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으며, 완벽히 독립했고, 자식보다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남아프리카로 갔다. 꼼꼼하고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면 마음에 후회가 남지 않는다. 마음에 덩어리진 것들이 없다면, 그의 일상은 얼마나 경쾌하고 알차게 흘러갈까?
낙관적인 ‘카르마’ 요기
간디 평전의 저자 루이스 피셔는 간디를 “낙관적인 카르마 요기”, 즉 행위의 요기라고 묘사한다. 간디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 같다. 간디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그의 끝을 모르는 낙관성에 감탄하게 되는데, 그건 어떤 암울한 상황에서도 발효된다. 1920년대, 간디는 정부에 대한 비폭력 비협조 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이슬람교도들의 킬라파트 운동(칼리프 보호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킬라파트 운동은 곧 힌두-무슬림이 협력해 전개하는 전인도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잠시 “힌두-무슬림 정치적 우애의 신혼기”라고 할 만큼 둘의 사이가 좋아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이슬람교의 상징인 술탄(칼리프)의 지위가 아슬아슬해졌다. 칼리프를 보호하자는 구호 아래 인도는 잠시 뭉쳤으나,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이 혁명을 일으켜 칼리프 제도는 낡고 무능하다고 판단, 제도 자체를 폐지해버렸다. 그렇게 킬라파트 운동이 허무하게 막을 내리며 힌두-무슬림의 연합 또한 해체되고 말았다. 다시금 분열이 시작되었다.
정치정세는 그의 뜻과 다르며 다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6월 전인도 회의파 위원회가 열렸을 때 그는 비폭력을 신봉하지 않는 동지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사람들 앞에서 통곡했다. 잇따라 전해지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분쟁에 관한 정보, 말다툼, 증오, 우울의 무거운 공기가 그의 육체와 정신을 압박했다. (『인도의 성웅 간디 1권』, 루이스 피셔 지음, 민병산 옮김, 일신서적, 296쪽)
이 시기는 모로 봐도 간디에게 가혹했다. 이때 간디는 감옥에 있었다. 감옥에서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은 데다가 상처 부위가 감염되어 회복도 늦었다. 정부는 간디가 감옥에서 죽어버릴까 무서워 그를 조기 석방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감옥에서 나와 마주한 현실도 씁쓸했다. 국민회의의 정치인들은 간디를 존경하면서도 비폭력의 비전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디의 비전보다는 그가 민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원했다. 간디는 통곡했다. 사람들에게 비폭력의 메시지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전해도 더운 기후가 형성한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인지, 군중은 쉽게 흥분해 폭력을 썼다. 킬라파트 운동의 좌절 이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합은 이제 물거품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1924년, 간디는 힌두-이슬람의 우호를 위해 21일 동안 단식을 하기로 한다.브라마차리는 편안한 상황, 행복의 조건이 갖추어지길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행복을 창조한다. ‘카르마’, 즉 행위의 요가를 통해서. 처음에는 리더라는 자리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간디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부침을 나의 것보다 더 크게 해석하고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물론 간디의 상황은 우리의 일상보다 더 가혹한 면이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모든 사람은 각자의 어려운 자리에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겪었던 어려움의 축소판이 우리 일상에서도 매일 벌어진다. 살만하면 꼭 무슨 일이 터지고, 몸이 편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관계가 돈독하고, 오해도 없고, 몸도 마음도 동시에 편안한 순간이 얼마나 될까. 순간 의욕적이 되었다가 다음 순간 불편한 감정의 노예가 되는 현실. 그러나 브라마차리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그는 55세라는 연령으로 21일간의 단식은 어쩌면 치명적인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아직 산더미처럼 많았고 또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자살 같은 의도적인 죽음을 그는 반대했다. 단식은 죽음과 밀회하는 일은 아니다. 또 일부러 고통에서 무슨 희열을 느끼자는 것도 아니다. 단식은 그의 최고 목표 – 사해동포 – 인간은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이념이 그에게 명령한 의무였다. 간디로서 행동은 어디까지나 바르고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나 타인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느냐 하는 것조차도 고려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는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했다. (위의 책, 297쪽)
간디는 행동하기로 했고, 단식을 도구로 채택했다. 간디의 방식은 강요와 설교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걸 당신들도 믿으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스스로 불을 밝힐 뿐. 간디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이 천 명이라도, 아니면 간디 자신뿐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망상도 없어야 한다. 비폭력 행동의 과정에서 천 명이 죽든, 간디가 죽든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행위 가운데서 죽음을 불사하는 것과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 간디의 단식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상대를 압박하려는 전술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간디는 죽음에 의연했던 만큼 삶을 사랑했다.

바르고 진실한 행동이란 무엇인가? 행동과 생각과 말은 일치되어야 진실하다. 인도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의 갈등 앞에서 그의 생각과 말은 어떤 행동으로 태어나야 하는가. 무력을 사용한 다툼의 종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말로만 외친다면 공허할 뿐이다. 길은 명확했다. 나를 희생하는 것으로 행동하자.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간디는 만연한 증오를 작은 체구에 받아 안아 그 흐름을 절단시키고자 했다. 단식은 먹는 일을 중단함으로써 그만큼의 에너지를 다른 데 집중할 수 있게끔 한다. 그래서 단식 기간의 간디는 활달하다. 더욱 힘차게 물레를 돌리고, 글을 쓰고,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한다. 몇 차례 목숨을 건 대단식을 했을 때 대부분의 민중은 이런 간디를 관찰하며 양심이 동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며 간디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이번 21일간의 단식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으나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고 한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간디는 진실한 행동을 했고, 이는 간디가 지치지 않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1925년에는 1년 내내 동서 1500마일, 남북 1900마일에 걸쳐 방방곡곡을 도보로 여행하여 인도의 대부분의 주와 여러 토후국을 방문했다.” (위의 책, 305쪽) 이 낙관적인 브라마차리를 누가 좌절시킬 수 있을까. 자신이 좌절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 힘의 핵심은 행동이다.
흐르는 욕망의 향연
그렇다면 끝없는 행동의 원천은 무엇일까? 루이스 피셔는 간디가 말년에 머물렀던 세바그람 아슈람에서 간디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 경험을 평전에 담았다. 그의 관찰일지를 함께 보자.
보통 노인은 옛날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로이드 조지는 시사에 관해서 얘기를 할 때에는 으레 제1차 세계대전 당시나 혹은 금세기 초의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자기가 한 역할을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일흔 살이나 되는 고령임에도 한 번도 옛날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항상 미래로 향해 있었다. 몇 해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끝없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성웅 간디 2권』, 177쪽)
간디는 독특한 사람이다. 그 정도 위치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한 번도 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간디를 사랑했던 이유다. 보통의 정치인은 소금 행진과 같은 엄청난 활동을 이끌었던 시기를 삶의 전성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랬던 자신이 점차 정치의 주 무대에서 사라져갈 때 불안하고 씁쓸하지 않을까. 그러나 간디는 정치인과 종교인 사이의 사람이었다. 그 같은 행동가에게 시간은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일은 끝이 없는 미래의 한 점에 불과했다. 우리는 때때로 ‘언제까지 해야 해?’ ‘지금까지 내가 한 게 도대체 뭐지?’ 묻고 지친다. 간디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다. 인도가 독립하면 그걸로 끝인가? 아니다. 생명이 생명다움을 실천하며 사는 그날까지 간디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간디의 삶과 메시지에서 끝없는 미래를 본다. 전쟁이 났고, 사람들은 일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초등학교에 미사일 폭격이 떨어졌고 170여 명의 아이들이 숨졌다. 안온한 공간에서 이런 소식을 뉴스로만 접하니 그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나의 공부는 어떤 행위도 만들어내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보어전쟁이며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인간의 욕망은 그대로 미국-이란 전쟁에 재연되고 있다. 그때도 지금도 비폭력이란 비전보다 탐욕의 힘이 월등히 센 것 같은데. 21세기에 간디의 사상은 적용 가능한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해봐도, 간디의 사상이 세상에 ‘먹힐’지 여부를 떠나서, 진리와 비폭력이 생명의 비전임은 분명했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적어도 나는, 간디의 일을 끝내지 않겠다는 의지 아닐까. 간디가 생각하던 끝없는 미래에 동참하고 싶다. 어떻게 그런 커다란 마음 길에 합류할 수 있으려나. 간디가 절대 좌절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늘 끝없는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걸까?
잠깐 소금 행진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1930년, 소금세에 대한 저항을 필두로 간디는 인도의 완전한 자치를 위한 독립운동을 이끌게 된다. 사바르마티 아슈람에서 단디 해변까지 걸어가 소금을 집어 올림으로써 비폭력 비협조 운동의 대대적인 시작을 알렸던 장면은 잘 알려져 있다. 간디와 78명의 사티아그라히들은 25일 동안 19km 정도씩 행진해서 총 390km를 걸었다. 이들은 사바르마티 아슈람을 떠나 걷고 있었지만 실은 아슈람을 그대로 길 위에 옮겨둔 것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매일 한 시간씩 물레를 돌렸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리고, 일기도 썼다. 단디 해변까지의 여정은 영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진이 아닌 각자의 마음을 정화하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비폭력의 신조를 어기지 않으리라는 맹세의 행진이었기 때문이다. 또 각자 맡은 소임이 있었다. 각각 식사를 준비하고, 방문한 마을의 정보를 수집하고, 아픈 사람을 간호하고, 기부금 회계를 보았다. 19km 행진했다고 일과의 끝이 아니었다. 사티아그라히들은 조금 지쳤다. 날이 갈수록 물집 잡힌 발은 따가웠을 것이고, 행진을 마치고도 할 일이 끝나질 않으니 피곤했을 것이다. 간디는 이를 헤아려 매주 월요일을 휴식일로 정했다. 사실 이 여정에서 가장 정력적이었던 사람은 61세의 간디였다.
간디는 보행에 전혀 곤란이 없었다. 간디는 ‘그다지 큰 짐도 가지지 않고 하루 2회로 나누어서 약 12마일쯤 걷는 것은 어린이의 유희’라고 말했다. (…) “젊은 세대는 사치스럽고 편한 생활에 길들어 허약해졌다”라고도 말했다. 그는 예순한 살이었다. (위의 책, 37쪽)
젊은 세대를 깔끔히 앞지르는 체력의 소유자 간디는 하루 두 번 야외에서 기도회를 열었고, 물레를 돌리고, 일기를 쓰고, 연설을 준비하고, ‘영 인디아’에 실을 글을 썼다. 잠들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가장 먼저 잠에서 깨 일을 시작했다. 새벽 4시면 달빛에 의지해 편지를 쓰는 간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간디는 소금 행진을 하면서도 답문을 썼다! 나는 이게 놀라웠는데, 보통 큰 프로젝트를 하면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 기존에 하던 잡다한 일을 최대한 줄이지 않나. 간디에게는 늘 수천 통의 편지가 쏟아졌다. 공사 불문, 질문이 끝도 없었다. 공적인 일은 ‘영 인디아’의 글에 연재하는 것으로 대체하면 될 터. 사적인 일로 힘들어서 간디에게 위로를 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어떻게 그것까지 신경을 쓴단 말인가. 그러나 매일 새벽 간디는 답장을 썼다. 간디의 일상에 ‘잡다한’ 일은 없었다. 모두가 필수적이고 소중한 일이었고, 그는 그걸 거뜬히 해냈다. 간디의 일상은 리듬을 탄다. 길 위에 있어도, 해외에 나가도, 감옥에 갇혀도 그곳이 간디의 아슈람이 되었다. 어떤 조건 아래에서도 나의 일상을 지키고, 리듬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루이스 피셔는 짧은 시일 내에 이 점을 파악했다.
어느 날 저녁 마하데브 데사이가 물레를 돌리고 있을 때 필자는 이런 얘기를 그에게 했다.
“나는 간디의 말을 조심해서 듣고 메모를 다시 검토해보고 그가 민중을 파악하는 근원이 뭔지를 생각해본 끝에 그것은 그의 정열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정열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육체에 담긴 정념을 승화시킨 데서 옵니다.”
“정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과 분노와 야심 그것을 이겨낸 간디의 자제는 완전합니다. 거기에서 강렬한 에너지와 정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억제된 동시에 충족된 정열이었다. (위의 책, 177쪽)
‘억제된 동시에 충족된 정열’이란 모순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간디의 욕망은 크기가 컸다. 간디의 토양인 힌두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영국 유학 시절 만났던 『바가바드 기타』와 산상수훈, 붓다의 가르침은 어린 간디에게 어떠한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솔직함, 꼼꼼함, 간호하기를 좋아하는 성정으로 드러난다. 남아프리카 기차에서 쫓겨났을 때도 부당함에 분노하기보다는 그곳의 유색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한다. 이건 간디의 인격적 훌륭함이라기보다는 그냥 간디라는 사람이 그렇게 형성된 것에 더 가깝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그쪽으로 가고, 에너지를 쓰고 싶은 거다. 힌두교도 간디에게 ‘라마’, 즉 신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다. 간디의 신은 진리다. 진리는 외부에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자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해서 모두에게는 신의 편린이 존재한다. 그걸 발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렇다면 진리를 따르는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사람은 신의 모든 피조물의 복리를 진지하게 열망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복리를 열망하는 데 자신의 복지가 존재한다.” (『간디 전집 3권』, 라가반 이예르 지음, 허우성 옮김, 나남, 650쪽)
간디의 욕망은 자연스레 그렇게 흘렀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 것이다. 아내를 너무 사랑했고, 아내를 볼 때마다 정욕이 들끓었다. 『천 개의 고원』에서 흥미로운 문장을 발견했는데, 바로 쾌락이 욕망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물건을 사는 순간 욕망하는 상태의 중단이 찾아오고,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 성욕이 중단되는 것처럼. 간디의 생명력은 성욕 앞에서 자꾸만 막혔다. 욕망이 쾌락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간디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려면 브라마차르야를 맹세하는 수밖에 없었다. 쾌락이 억제됨으로써 간디의 욕망은 충족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행위를 창조하고, 그걸 해내는 과정에서 바로 기운을 찾는 쾌활함의 원천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정열이다.
간디와 함께하고서부터 일상의 피로도가 덜하다. 불안이나 자책 같은 감정들로 몸과 마음을 들볶지 않으니 그런 것일까. 끝을 생각하고, 결과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 그런 것일까. 간디는 기도하고, 물레 돌리고, 답문과 연재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걷고, 단식하며 늘 바빴고, 충만했다. 나도 그렇고 모두가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간디처럼 지켜야 할 일상이 있다. 그 시간을 홀로 충만하게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결과의 달콤함도 맛보지 않을까. 그러나 그때의 결과는 연속적인 행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할 것이다. 인생을 크게 놓고 보면 모든 성취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죽어도 진리는 영원할 것이므로 진리의 일은 끝나지 않을 테다. 끝없는 미래에 나를 던지고 퐁당퐁당 헤엄치면 어떨까. 내게 주어진 일을 하고, 또 내 할 일을 찾으며 그렇게 헤엄치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때의 죽음을 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윤회론을 믿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는 진리의 편린으로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끝없는 미래를 생각하는 브라마차리의 일상은 이토록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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