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의 날들
강가에나무(마산토박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여자로 태어나 성지여고에서 그때의 친구들, 선생님들과 함께 지내는 것.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품어 온 소망이자 누가 물어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오랜 바람이었다. 등굣길엔 무학산이, 체육관에서 연못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으면 멀리 아파트들 사이로 호수 같던 바다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던 성지여고. 학교로 오르는 좁고 가파른 길에 줄지어 선 오래된 벚나무들은 봄이면 연분홍 꽃잎을 무더기로 피워올려 우리의 등굣길을 밝혀 주었다.
지금은 곳곳에 학교들이 생겨났지만 예전에는 산복도로에 고등학교가 밀집되어 있어, 인문계 여고 세 곳과 남고 두 곳이 반경 1.5km 정도 안에 모여 있었다. 본관 현관의 희고 육중한 기둥이 인상적인 마산여고와 울창한 나무숲이 교문을 둘러싼 제일여고는 산복도로변에 위치해 지나는 길에 바로 볼 수 있지만, 성지여고는 도로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야 나온다. 산복도로로 다니는 버스가 있기도 했지만, 도심을 관통하는 중앙 도로에서 학교까지 제법 거리가 있는 데다 오르막이었기에 마산 시내 여고생들의 종아리가 굵은 것은 산복도로에 여고가 모여 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마산 연합고사 커트라인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학생 수에 비해 인문계 고등학교 수가 많지 않았던 데다 비평준화 지역이라 인문계더라도 ‘마산연합’에 속하지 않는 학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창원, 진해뿐만 아니라 인근의 함안, 창녕, 의령 그리고 멀리 합천 같은 군지역에서까지 성적이 높은 학생들은 마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다 보니 200점 만점에 합격선이 180점 가까이, 어느 때에는 서너 문제만 틀려야 합격하는 해가 있기도 했다. 이후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합격선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바로 우리가 입학하던 그해부터였다.
그 유명한 마산 연합고사를 통과해 인문계 여고에 입학했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는 학교에서 이내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선배들은 학업과 인성, 심지어 미모까지 우리보다 우월했다-고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합격선이 낮았으니, 선배들보다 수업을 따라오는 속도나 이해력도 더뎠을 테지만, 반마다 개성 넘치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아서였는지 선생님들은 우리 학년 수업을 어려워하시는 듯했다. H.O.T와 젝스키스의 등장으로 아이들은 교복 치마 아래로 생활복 바지를 길게 늘어뜨려 겹쳐 입었고, 바닥 청소를 하던 친구는 갑자기 대걸레를 스탠드 마이크 삼아 본조비의 노래를 목놓아 부르기도 했다. 착실하고 모범적인 데다 공부마저 잘하는 언니들만 봐오신 선생님들은 혀를 내두르시며 신생 인류를 접하시는 듯 당혹감을 감추지 않으셨다.
수녀원에서 종신서원을 받으신 직후 우리 학년 담임을 맡으셨던 한 수녀님은 그때를 인생에서 가장 힘드셨던 해였다고 말씀하셨다.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수녀님을 다시 뵙게 되었을 때 한결 편안해지신 모습에서,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걸까 싶었다. 우리 학교에는 해마다 있는 체육대회에서 1, 2, 3학년의 같은 반이 한 팀이 되어 경기를 치르는 전통이 있었다. 1학년 1반, 2학년 1반, 3학년 1반이 한 팀이 되는 것이다. 고3들은 입시 준비 때문에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들처럼 소극적으로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3학년이 되었을 때, 공부 외에는 모든 것에 적극적이었던 우리는 승패를 두고 3학년들끼리 얼굴 붉히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워 후배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여느 학교에서는 찾기 힘든 건물 배치의 특별함도 우리의 자유분방함을 거들었다. 성지여고는 일반 학교와 남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을 거듭하며 곳곳에 건물이 증축되어 여러 건물이 다양하게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중앙 계단이나, 오른편에 있는 성모상을 지나 돌아가면 석조 건물의 본관이 있고 여기에는 1, 2학년 교실과 교무실이 있었다. 본관 왼편으로는 한 층에 교실이 하나씩 있는 자그마한 2층짜리 단독 건물이 있었다. 본관과 떨어져 있는 데다, 1층 계단에 발을 내딛는 순간 여지 없이 들려오는 오래된 건물의 삐걱거림은 누군가의 출몰했음을 친절하게 미리 알려주었다. 1학년 때 2층을 썼던 우리 반은 선생님들의 감시를 피해, 시청각 교육용이던 TV로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방영되던 청소년 드라마 ‘나’를 보기도 했다.
본관 뒤편에는 오래된 석조 건물이 하나 있는데 1928년에 지어진 성 요셉 성당이다. 마산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지금은 경남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지만, 그때만 해도 항상 문이 열려 있어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곳이었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마룻바닥에 앉아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비춰드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고요하고 평화로워졌다. 어느 해엔 먼저 성당으로 들어가 제대 뒤에 숨어 있다가 친구가 들어서는 소리에 바르르 떨어가며 하모니카로 생일축하곡을 불러 소박한 축하행사를 갖기도 했다. 성당 맞은편에는 성모상이 있어 아이들은 성당과 성모상 사이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거나, 성당 계단에 앉아 햇살을 쬐기도 했다. 어느 해 스승의 날엔 우리 학년 괴짜들이 머리에 스타킹을 뒤집어 쓰고 당시 유행했던 영화 황비홍을 흉내 내며 무술 연기를 선보였다.
성당 왼편에는 3학년 교실 건물이 따로 있었고, 2, 3층 교실엔 베란다도 있었다. 우리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들은 때때로 거기에 숨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도시락을 까먹었다. 버너에 프라이팬까지 야무지게 챙겨와 삼겹살을 구워 먹는 대담함을 보였으니 선생님들이 기함하실만했다. 게다가 우리는 고3이 아니었던가. 3학년 교실과 본관 사이에는 3학년 교무실이 따로 있었고, 그 옆으로는 하트 정원이 있었다. 오래된 메타세콰이어 아래로 하트 모양으로 잘 가꿔진 앉은뱅이 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3학년 건물과 성당 사이를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왼편 나지막한 언덕에 주교관이 있었다. 오래 전 김수환 추기경님이 마산교구 첫 교구장으로 착좌하신 뒤 추기경 서임으로 서울로 떠나시기 전까지 주교관으로 사용하셨던 곳이다. 이후로는 은퇴하신 주교님과 신부님들께서 지내시는 곳이 되었고, 그 옆으로는 교사로 소임을 맡으신 수녀님들이 함께 지내시는 수녀원이 있었다. 그곳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임간 교실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숲 사이에 자리한 교실이었다. 한참 돋우어진 땅 위로 키 큰 나무들이 빙 둘러싸고 있어 그곳으로 올라오지 않고서는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벤치까지 넉넉히 마련되어 있으니, 숨어 있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나면 그곳으로 찾아들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이나 심지어는 수업 시간에도 화장실이나 양호실을 핑계 삼아 나왔다가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벤치에 누워, 나무 사이로 보이는 호수 같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관장도 절로, 상처 난 마음에도 새살이 솔솔 돋아나던 시절이었다.
성당 오른편 2층에는 체육관이 있고, 그 아래층엔 본관에 합류하지 못한 2학년 교실 다섯 곳이 있었다. 교실 밖 테라스 공간 옆으로 작은 정원과 벤치가 있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 아래 왕벚나무 옆 자그마한 연못에서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곳곳에 나무 그늘과 벤치가 있고, 어느 곳에나 잠시 머무를 수 있었다. 체육관 옆 계단이나 교실 밖 테라스, 바로 옆에 있던 성지여중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던 벤치까지 어디든 아이들은 모여 재잘거렸다. 까르르 숨이 넘도록 웃어댔지만 때로 슬프거나 근심에 잠겨 있기도 했다.
가장 큰 특별함은 본관과 3학년 건물 그리고 체육관과 그 아래층 교실 어디에도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3층으로 된 화장실 건물이 아예 따로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전교생이 화장실로 모여들었고, 점심시간에는 양치질을 하기 위해 또 한번 대대적인 집합이 이루어졌다. 화장실이 멀리 있다는 불편함보다, 거기 가면 더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수돗가는 학교 운동장과 본관 뒤편 그리고 하트 정원 쪽에도 있어 상황에 따라 여러 곳을 골라가며 양치하는 재미도 누렸다.
커다란 직사각형 건물에서의 상하좌우의 단선적인 이동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동선이 존재했다. 마치 하나의 마을 같았다. 길이 다시 다른 길로 이어지며 다른 곳들로 우리를 인도해주었다.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 마음에 너무나도 선명히 들어앉은 마을. 학교는 더 이상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고 펼쳐지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치도 하나의 인격체 같았다. 지금도 우리는 ‘학교에서’라는 말보다 ‘우리가 함께 한 성지에서’라는 말로 옛이야기를 시작한다. 교실 안에서 이루어진 배움의 시간이 우리를 대학으로 이끌어주었다면, 교실 밖에서 나누었던 친구들과의 대화들은 더 깊고 너른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었다. 우리에겐 ‘어느 대학’도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도 간절하고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 고민 많던 날들에 언제나 친구들이 함께 있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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