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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온 편지

[마산에서 온 편지] 씨앗이 뿌려지던 날들

by 북드라망 2026. 5. 11.

씨앗이 뿌려지던 날들 

강가에나무(마산 토박이)


옛집 옆으로 난 골목엔 딸 셋에 아들을 막내로 둔 집이 있었다. 그 집 셋째 딸이 나랑 동갑이었다. 이제 막 문을 연 병설유치원의 첫 입학생으로 함께 다녔으니, 친구네는 그전부터 거기 살았을 것이다. 위로 세 살, 다섯 살 터울의 오빠를 두었던 나는, 어린 날엔 그것이 얼마나 큰 나이 차이였는지 오빠들의 놀이에 낄 엄두를 도통 내지 못했다. 성별이 다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딸 많은 친구네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은 골목에서 다섯 개 정도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대문이 있었다. 나는 계단 아래서 고개를 위로 바짝 쳐들고 친구를 부르기 시작했다. “친구야, 놀자~ 친구야 놀자~.” 아무 대답이 없으면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의 부름은 계속되었다. “친구야, 놀자~ 친구야 놀자~.” 지금도 목소리가 작은 편이니, 그때라고 다르진 않았을 게다. 부르는 소리가 그 집 안까지 닿으려면 계단을 올라 마당을 지나 다시 제법 높은 마루를 올라야 했기에 쉽사리 들릴 리 만무했다. 하지만 주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대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꼬맹이는 인내로이 친구를 목 놓아 불렀다. 

한참을 그러고 있노라면, 길을 지나시던 어른들이 보다 못해 한마디씩 거드신다. “그리 해갖고 들리겠나? 대문 열고 들어가서 불러야지.” ‘그런가?’ 어른들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진 나는 계단을 올라가 대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 다시 친구를 부른다. “친구야, 놀자~ 친구야 놀자~.” 그렇게 몇 번을 부르다 보면 그제야 친구가 나와서 나를 맞이해 주거나, 어머니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셨다. 나는 친구네 다락방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마당에서 친구 언니들과 함께 고무줄뛰기를 하거나, 마루에서 꼼박기(공기놀이)를 했다. 때로 중요한 임무가 주어지기도 했는데, 친구 어머니의 부업을 돕는 일이었다.

친구 아버지는 경찰이셨지만 여덟 형제의 맏이인 데다 네 명의 자식을 두셨으니 어머니도 어떤 식으로든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셨다. 빨간 고무다라이(이 상황에 이 단어는 대체불가다)에 밤을 한가득 담으신 어머니는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으셨다. 밤이 어느 정도 불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는 그 다라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밤을 까기 시작했다. 검지 가장 안쪽 마디와 엄지에 자른 고무장갑 조각을 야무지게 끼우신 어머니는 전문가다운 포스와 날래고도 정갈한 솜씨로 밤을 척척 까내셨다. 나는 어머니가 밤을 까시는 순서와 기술을 유심히 살펴 가며 따라 해보려 애썼다. 여러 번 돕다 보니 제법 실력이 늘고 재미가 붙었다. 한참을 까다 보면 오른손 검지 마디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껍질 속에 감추어진 밤의 뽀얀 속내를 맞이할 때의 기쁨과 보람, 속껍질을 벗겨 낼 때 나던 슥슥거리는 소리의 개운함과 경쾌함이란! 열 살쯤 되었을 많지 않은 나이, 나는 손으로 하는 일의 보람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몸으로 체득한 것은 어찌 이리 오래 남는지, 지금도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 가는 날이면 가족들은 내 앞에 생밤을 내민다. 

당시 아이들에겐 머릿니(虱)가 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친구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친구네 자매들을 한 사람씩 불러 당신 무릎에 뉘여 머리카락을 뒤적이시며 이를 골라내셨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제집처럼 드나드는 딸내미 친구, 엄마 없는 어린 것이 애처로우셨는지 어머니는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당신 무릎을 내어주셨다. 그런 어머니이 마음이 내 가슴에도 가득 들어차서였을까. 나는 부끄럽고 민망해하면서도 염치없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가끔 친구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던 날 나도 덩달아 머리카락을 잘라, 친구와 나는 쌍둥이처럼 바가지머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처음으로 콩국수를 먹어 본 곳도 친구네 집이었고, 집에서 끓인 우동을 처음 맛본 곳도 친구네였다. 친구네가 근처 동네 아파트로 이사를 가 놀러 갔던 날, 근처 시장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진분홍색 면바지를 내 손에 들려 보내셨다. 자식 넷을 먹이고 입히시기에도 빠듯하셨을 살림, 어린 마음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마음이 먹먹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내 마음의 구멍에 찬 바람이 드는 대신 빛 고운 꽃들이 피어나도록 자꾸만 씨앗을 뿌려주셨다. 그때마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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