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마음에 비치던 햇살
강가에나무(마산토박이)
이른 봄 목련꽃이 피어오르고 보랏빛 등나무꽃 한창이어도, 사루비아 붉은 꽃이 달콤한 꿀 건네주고 한겨울 사철나무가 싱그러움을 전해주어도 집안 깊숙이 드리워진 그늘은 좀처럼 걷히지를 않았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면 시어머니는 방을 소제하고, 며느리가 빨래를 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마당을 쓸었다는 다정하고 사이 좋던 고부지간, 아무리 생각해도 며느리가 떠난 까닭을 알 수 없으셨던 할머니는 야속함이 뒤엉킨 그리움으로 남은 세월을 보내셔야 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누군가의 귀띔에도 그럴 리가 없다며 크게 화를 내신 아버지의 믿음은 이내 배신감과 절망감으로 돌아왔다. 상실과 분노, 애증이 한데 섞여 아버지는 속병을 얻으셨고, 좀처럼 웃으시는 일이 없으셨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어나 다름없었고, 어른들의 슬픔이 너무나 컸기에 오빠들과 나는 엄마를 찾지도, 어떤 원망의 말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저마다의 가슴의 자리한 깊은 슬픔이 큰 장막이 되어 온 집을 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 살이던 해, 그렇게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이듬해 겨울 큰불이 났고, 그 다음해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겪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흔히 하는 말로 삼재였는지도 모른다. 오빠들이 모두 놀러 나가고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게 되는 날이면 책장에 꽂힌 사진첩을 꺼내어 보곤 했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어느 해에는 부곡 하와이로, 무더운 여름날엔 가까운 바닷가로, 벚꽃 좋은 봄날엔 진해 군항제로 나들이 간 사진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렇듯 행복했는데 엄마는 왜 떠나간 것일까, 혹시 내가 태어나면서 우리집에 불행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진들이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갓난아기였을 때 찍은 것이었으므로 연이은 집안의 불행이 내가 태어나면서, 나로 인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이 집의 불행을 두고 친척들 사이에서는 여러 말들이 있었다. 뒷간 한편에는 큰 돌이 담처럼 우뚝 들어앉아 있었는데 누군가는 그 돌이 뒷산 줄기의 끝부분이라 집터가 좋지 않다 했고, 또 다른 이는 오래전 앞집에 작은 절이 있었던 까닭에 땅의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젊은 시절 출가하여 수계를 받으신 적이 있는 아버지는 업보에 대한 책을 탐독하기 시작하셨다. 일평생 남에게 해코지하는 일 없이 살아온 당신에게 별안간 들이닥친 불행들을 받아들이시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런 어른들의 이야기를 비집고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안으로 삼켰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나일지로 모른다는 생각, 집 나간 엄마를 둔 아이라는 부정적 감정들이 솟구쳐 아직 다 자리지도 못한 내 마음의 키를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칠 때마다 나는 더 작게 움츠러들었다.
그런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 성당 가는 일은 마음에 햇살이 드는 시간이었다. 어린이 미사는 부산스러웠으나 제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전례가 주는 경건함, 세상의 일들과는 사뭇 다른 어떤 고귀한 일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소리를 맞춰 부르는 성가도, 가슴 앞에 공손히 기도손을 모으는 일도 좋았다. 신부님과 수녀님, 교리 선생님들은 친절하고 다정하게 하느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당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으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보살피신다고 하셨다. 나는 하느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그분들이 보여주신 친절과 사랑, 환대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 역시 선하고 좋은 분이실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면 신앙학교 캠프를 가고, 겨울이면 성탄 예술제를 준비했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없던 내게는 다양함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가방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주산학원, 피아노학원, 미술학원이 붐을 이루던 시절, 아이들은 책가방과 실내화 가방, 도시락 가방 외에 학원 가방 하나씩을 더 들고 다녔고, 그 가방엔 학원 이름들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내심 그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토요일이면 가방 안에 교리책과 성가책을 야무지게 챙겨 팔을 앞뒤로 휘저어가며 신나게 성당으로 걸어갔다. 첫영성체를 하게 된 뒤로는 내 안에 예수님을 모셨다는 기쁨보다, 성체를 모신 뒤 드리는 기도를 가장 잘 들어주신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 성체를 모시면 자리에 앉자마자 집안의 근심 걱정거리들을 아뢰었다. 재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던 철없는 어린 신앙인이었다.
그렇게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을 성당에서 보낸 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다. 내가 받은 사랑과 좋은 추억들을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다 수녀님의 권유로 성소자 모임에 가게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 부르는데, 모든 믿는 이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각자에게 맞는 고유한 길로 부르심을 받지만 특별히 사제, 수도자의 길을 제한적인 의미의 ‘성소’라 칭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수녀원에서 수도 성소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성소자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러 프로그램과 수녀님들과의 면담을 통해 자신의 수도 성소에 대해 식별해 나간다. 나는 성소 모임에 참여하면서 살아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감실 앞에 앉아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원망보다, 그 시간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그 길을 통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는지 차츰 깨닫게 되었다. 마음 가득 환한 빛이 들어차면서 내 안의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한 신부님이 성모님에 관한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령은 오실 때 그냥 오지 않으시고 항상 선물을 가지고 오신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은 이들은 그 선물만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 자신까지 포함하여 그것을 다시 세상에 선물로 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신 분이 성모님이시고,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함께 강의를 들은 분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긴 고민 없이 대답했다. “엄마가 없는 것이요.” 나는 담담했지만 그분은 흠칫 놀란 눈치였다. “엄마가 계셨더라면 이것저것 하고픈 게 많았던 저는 욕심 많은 아이로 자랐을 것 같아요. 할머니가 계셨지만 이미 연세가 많으셨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시작해야 했지만, 그 덕분에 밥하고 빨래하며 청소하는 일들이 주는 기쁨과 보람을 일찍부터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은 수월하게 살림살이를 해가고, 나름의 요령도 많이 생겼어요. 이제 음식도 어렵지 않게 만들어내니, 그렇게 만들어 사람들과 나눠 먹을 수 있어 좋아요. 또 엄마가 없으니 엄마 없는 아이들, 부모님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어려움, 그 마음자리가 자꾸 눈에 들어와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엄마가 계셨더라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이제는 더이상 행복과 불행을 구분 짓지 않게 되었다. 때로 그것이 불행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고, 당신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설혹 그것이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은총의 또 다른 모습임을 알기에 어떤 순간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할 일은 다만 매 순간을 성실히 살아가면서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감사드리는 일이다. 문득 한 목사님이 쓰신 책의 제목이 떠오른다. ‘돌아다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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