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의 옛집
강가에나무(마산토박이)
그 마을 아래에 우리 집이 있었다. 일곱 살 때 6.25 전쟁이 나자 서울을 떠나 원주 외가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마산으로 내려온 것이 1953년 봄. 그때부터 아버지가 예순여섯 해, 여기서 나고 자란 나는 마흔 해를 이 집에서 살았다. 지금은 산책길로 조성된 마을 초입의 기찻길을 지나면 그때부터 차츰 가파른 길이 나타나는데, 꼬부랑 벽화마을로 오르는 오르막길의 허리춤쯤에 우리 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양손 가득 든 짐을 잠시 부려놓거나, 눈짓으로 남은 길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이 집에서의 처음 시작은 일곱 식구였다. 피난 길에 넷째 딸을 잃고, 원주에서 다시 아들을 얻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자식 넷과 함께 이 집에서 마산살이를 시작하셨다. 몇 해 뒤 삼촌과 고모가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면서 다시 아홉 식구로 늘었다. 원주에 계시다 잠시 서울에 다니러 가신 길, 피난민들에 떠밀려 먼저 마산으로 오게 되신 할아버지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작은할머니를 얻게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더 보셨으니, 때로 이 집에는 열두 식구가 어울려 살기도 했다. 아버지와 바로 아래 작은아버지가 여기서 신접살림을 시작하시면서 식구가 더해졌다. 얼마 있지 않아 작은아버지 내외가 분가하시고 쌍둥이 고모와 삼촌이 연이어 출가하시는 사이 나의 두 오빠와 내가 태어났다. 한때는 타향살이에서 돌아온 작은할머니네 막내 삼촌 세 식구가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 우리 집 문간방에서 얼마간 머무르기도 했다. 참으로 많은 식구가 이 집을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이 집은 자기 곁을 내주었다.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터로 삼았을 그 시절의 집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집 역시 네모반듯하지는 않았다. 가로로 길게 뻗은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 화장실이 있다. 그 옆으로는 아빠방이라 부르던 자그마한 문간방이 있는데 키 180m 이상은 반드시 고개 숙여야 하는 천장 낮은 방이다. 그 방 곁에는 뒷간으로 가는 좁은 길이 있고, 그 옆으로 다시 연탄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이어진다. 부엌 안에는 마루를 딛고 살짝 올라가면 들어갈 수 있는 한 평 남짓의 방이 있는데, 방처럼 문도 어찌나 작은지 그 높이가 1m 남짓, 드나들려면 무조건 겸손해져야 한다. 부엌 바로 옆으로는 다시 큰방이 들어앉았고, 그 방과 담벼락 사이에는 다시 뒷간으로 가는 길이 있어 좁은 골목 형태의 뒷간이 모든 방을 뱅 두르고 있는 셈이다. 뒷간이 제법 너른 편이어서 할아버지가 반지 공장을 하시던 때 쓰신 주물작업과 세공을 위한 도구들이 있었다. 할머니가 쓰시던 다듬잇돌에 증조할머니가 쓰셨다는 화로까지, 오래된 물건들과 한겨울을 나게 할 연탄들도 든든히 쟁여져 있었다. 할아버지 장례를 집에서 치르던 날, 숙모들은 그 뒷간에서 전을 구우셨는데 철없는 나와 사촌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뛰놀기에 바빴다. 집 제일 안쪽에 있는 너른 빈터는 본래 방이 있던 자리였으나 내가 다섯 살이던 해 겨울밤에 난 불로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나란히 늘어선 방들 맞은편으로는 좁은 마당과 화단이 있었다. 등나무가 담장을 타고 대문 위로 올라 꽃을 피우면 말 그대로 꽃대궐을 이루기도 했다. 사루비아가 한창이면 우리는 꽃을 따서 그 속에 든 꿀을 맛보았고, 할머니는 잎사귀를 따다가 큰방 창호문에 붙이신 뒤 그 부분만 다시 창호지를 덧바르셨다. 사철나무는 겨우내 푸르렀고, 이른 봄 목련은 등불같이 환했으며, 분꽃은 저녁마다 자줏빛 고개를 내밀었다. 분꽃의 검은 씨앗이 여물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가지런히 손에 받아다가 종이에 싸서 갈무리를 해두셨다.
그 화단이 끝나는 곳에 ‘당고’라 부르던 지금의 물탱크 같은 곳이 있어 미리 수돗물을 받아두곤 했다. 겨울이면 꽁꽁 얼게 되는 날이 많았으므로, 살얼음이라도 비치면 수시로 미리 깨어두어야 했다. 당고 옆으로는 장독대들이 모여 앉았고, 볕 좋은 날엔 뚜껑을 열어두었다. 그 앞으로는 자그마한 우물이 있었는데 오래전 이웃에서 물을 길어가기도 했다는 그 우물에, 우리는 여름이면 수박을 담궈두었다가 꺼내먹기도 하고, 한낮에는 길어 올린 우물물을 온 마당에 뿌려 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혀보곤 했다.
방들이 서로 이웃해 있고 방문을 열면 곧장 마당이라 이 방에서 저 방 또 화장실이나 부엌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마당을 거쳐야만 했다. 마당 위로 하늘이 늘 열려 있으니 박명에 번져오는 붉은 햇살과 바다 건너 산 위로 떠오르는 저녁 달을 항상 볼 수 있었다. 한겨울밤 마당을 지나 화장실에 가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었으나, 그때마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그 귀찮음을 곧장 잊게 만들었다. 마당 가득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이불을 둘둘 말고 마루에 앉아 오래오래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 보았다. 내 몸이 자꾸만 달 곁으로 솟아오를 것만 같아 드라마 <무빙>에 나오는 봉석이처럼 무거운 이불로 나를 애써 눌러야만 했다. 차고 기우는 달로 음력 날을 셈했기에 나에게는 굳이 음력 달력이 필요치 않았다.


할머니는 불로 공터가 된 자리를 배추밭으로 일구셨다. 배추가 한창 자라날 때면, 저녁마다 배추밭에 물을 주는 일을 나는 참 좋아했다. 사방으로 물이 퍼져나가게끔 엄지로 호스 구멍을 적절히 막아 배추밭을 향해 팔을 훠이훠이 내저어 뿌려가면, 배추에 물 부딪는 쏴아쏴아 소리가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푸른 배춧잎들이 얼굴을 씻는 동안 내 마음의 묵은 때도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간혹 출몰하는 쥐를 잡기 위해 밭 한쪽에 쥐덫을 놓기도 했는데, 가끔씩 애꿎은 참새들이 걸려들었다. 작은오빠와 나는 빈 성냥갑에 조심스레 참새를 넣어 밭 귀퉁이에 묻으며 무고한 참새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버지는 때때로 여름 저녁이면 공터 담벼락 곁에 있던 아카시아 나무와 탱자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모깃불을 피워주셨다. 마당 가득한 연기에 캑캑거리다가도 그 연기가 나를 지켜줄 것 같은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모깃불을 피우던 자리에 모닥불이 지펴졌다. 할머니는 모닥불 위에 가마솥을 올려두시고 간장이나 멸치젓을 달이셨는데, 그날은 온 집이며 입고 있던 옷에 간장 냄새와 잘 삭은 멸치 비린내가 배어들어 냄새가 없어지기까지 한동안 애를 먹었다.
나무 기둥에 흙벽으로 지어진 옛집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들었다. 여덟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방 마루를 좁히고 방을 넓혀 오른편을 시멘트벽돌로 쌓아 올리면서 우리 집에도 시멘트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보면 여전히 좁은 방이지만 새로 올려진 큰방에서 처음으로 저녁을 먹던 날, 마치 이 방이 얼마나 너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나의 두 오빠는 차려진 저녁상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서로에게 발차기를 시전했다. 나도 아닌 체했지만, 어여 그만하고 밥먹으라시던 할머니의 다그침에서 여느 때와 다른 울림을 느끼며 새 방은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 화단과 텃밭이 사라지고 거기에 시멘트 바닥이 깔렸다. 화단도 당고도, 목련나무도 한 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마치도 내 안의 일부를 도려낸 것처럼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라렸다.
재래식 화장실에 변기가 들어온 것은 그보다 더 한참이 지난 뒤였다. 재래식 화장실이라는 말 앞에는 ‘누가 요즘 세상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그런 세상을 내 것으로 여기고 살았다. 십여 년 전쯤엔 드디어 부엌에 수도가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수도가 마당에 있어 호스를 끌어당겨 쓰거나 양동이에 물을 받아 썼기에 양동이 가득 물을 받아두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귀신이 집에 왔다가 먹을 것이 없으면 물이라도 마시고 가야 한다시던 할머니의 지론도 한몫했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가 그렇듯 부엌은 세면장으로도 사용되었으므로, 물을 받아두는 것은 누군가가 쓸 물을 미리 마련해두는 일이기도 했다. 오랜 양동이 나르기에 익숙해진 덕분으로 나의 팔 근육은 지금도 평균 이상을 자랑한다.
이후 내 방으로 쓰게 된 문간방 마루에 샷시가 설치되고 문이 생기면서 탁트였던 마루가 아담한 공간이 되었다. 사려 깊고 꼼꼼한 손재주를 가진 작은오빠는 직장 일로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쉬는 날이면 틈틈이 찾아와 그 큰일을 혼자 해냈다. 마루 천정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구색 노란 등을 달아주었고, 마루 벽면을 편백나무로 마무리하는 세심함도 잊지 않았다. 아침 햇살과 보름날 달빛이 예전만큼 방안으로 들지 않는 것은 아쉬웠지만 한겨울의 찬바람과 여름 태풍의 두려움을 막아내기에는 더없이 훌륭했다. 무엇보다 일상의 불편함을 덜어주려 한 작은오빠의 마음이 내내 고마웠다.
하지만 그 방의 아궁이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겨울이면 전기장판을 켜고 지냈다. 전기장판이 방안의 냉기까지 몰아내지는 못했으므로, 겨우내 코끝이 시리고 입김이 났다.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친구에게 편지라도 쓰게 될 때면 몇 줄 쓰고서는 꽁꽁 언 손을 엉덩이 아래에 넣고 녹여야 했다. 다리 저림과 손 시림으로 인해 한겨울엔 언제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엎드린 채 턱을 괴고 책을 읽었으므로, 책 읽기는 잠들기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한파가 몰아치는 날엔 모자가 달린 패딩 조끼를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자곤 했는데, 그런 밤엔 ‘추워하며 살게 해달라’ 청하시던 마종기 선생님의 시를 읊조렸다.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겨울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해달라시던 싯구를, 손난로를 만지작거리듯 입술로 되뇌다 보면, 난로가 들어앉은 듯 이내 마음이 후더워져왔다. 때때로 마음의 온기는 찬 기운을 이겨내게 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은 것은 부엌에 있는 큰방의 연탄 아궁이었다. 여러 다른 방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범대원에 이어 격일제 아파트 경비원으로 주로 밤에 일하시고 한낮에 주무셔야 했던 아버지께 집의 여러 곳을 손보고 살피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독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이어진 우여곡절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아내가 없다는 사실은 우울의 그림자를 더 깊게 했다. 애증으로 꽉 찬 세월 동안에도 아버지는 홀로 꿋꿋하게 우리 셋을 키워오셨지만, 무언가 새로운 일을 벌이시기에는 너무 지쳐계셨다. 그래서 나는 그 연탄 아궁이를 내 세상으로 삼았다. 무언가를 더 개선해야 한다는 열망 대신 연탄 갈기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에 흡족해하며, 살아가는 일에 대한 생각을 쌓아가는 요즘 세상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집이 이렇듯 오래되다 보니, 우리는 모두 날씨에 예민했다. 집을 떠나 지내던 두 오빠와 이 집에 한 번이라도 머물렀던 친척들은 춥거나 덥거나, 비가 많이 내리면, 또 태풍 소식이 찾아들게 되면 어김없이 전화기를 주셨다. 추운데 괜찮으냐, 더위에 어쩌느냐, 태풍이 온다는데 단도리는 잘 했느냐, 태풍 지나는 동안 별 탈은 없었느냐 … 안부 전화가 줄을 이었다. 이 오래된 집의 취약함을 잘 알고 있는 가족들로서는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많던 식구들을 품 안에 거둬들이던 옛집은 남루하고 초라해졌으나, 그 낡음이 되려 우리를 다시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큰방 구들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연탄을 때어도 예전만큼 뜨끈하질 않았다. 바닥만 고치려니 이미 너무 오래되어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마침 큰오빠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새 식구가 들어오는데 이리 지내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 이사에 마음이 없으셨다. 아픈 기억으로 가득한 그 집과 마을을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시면서도, 어떻게든 그곳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셨다. 누군가 돌아올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빠들과 나는 이웃 동네의 아파트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여섯 해 전 가을,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미리 준비된 각본에 따라 아버지 몰래 이사를 감행했다.
이사 후 아파트에서 맞이한 첫겨울, 아버지가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게 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었으나, 겨울밤이 이리 춥지 않아도 되나 싶어 나는 한동안 쉬이 잠들지 못했다. 춥지 않은 겨울이 추워하는 누군가를 잊게 만들진 않을까 두렵고 조바심이 났다. 자기 몸에 갇힌 인간은 안락함이 가져다주는 평온 속에서 다른 이의 고통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았으므로. 무엇보다 옛집이 간직한 정서에 대한 그리움이 시시때때로 나를 찾아 들었다. 자꾸만 무언가를 두고 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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