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金) : 버림으로써 다른 존재가 되는 힘 (1)
김 지 영(남산강학원)
수렴하고 매듭 짓는, 금
가을, 만물이 익어간다. 치성했던 양기가 서늘한 음기로 바뀌는 시기이다. 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은 같은 벡터를 지니고 있어서 계절의 변화가 다소 온화하다. 하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는 다르다. 곡식을 재배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여름에 무성했던 양기가 수렴되어야 한다. 따라서 양에서 음의 벡터로 바뀌는 시기에는 훨씬 강한 힘이 필요하다.
가을은 화려했던 여름의 치성함을 멈추고 에너지를 내부로 가두고 수렴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갖고 있었던 화려한 것들을 버리고 진짜 필요한 것만 남긴다. 가을의 찬바람으로 무성했던 잎들을 떨어뜨리듯, 자연은 스스로를 덜어내며 균형을 회복한다. 이것을 ‘숙살지기’라고 부른다. 양기의 발산이 끝없이 계속된다면 우주는 금세 폭발해버릴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계속해서 뻗어나가지 않고 기존의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죽인다. 금이 가진 날카로움, 냉정함과 단호함은 이런 가을의 성질과 닮아 있다.
그래서 금을 상징하는 자연물은 바위와 쇠이다. 목, 화, 토, 금, 수, 오행 중에서 가장 단단하다. 금은 흙 안에서 서서히 응축되어 자라난다. 이러한 바위의 단단함은 논리력, 구조화, 원리원칙의 세계와도 통한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금기가 강한 친구들을 두려워하면서도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찾게 된다. 스스로도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이 되지 않을 때, 금기 친구들은 나보다 더 나를 논리적으로 잘 정리하고 설명해 준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고민이 생기면 그들에게 달려가게 된다. 따뜻한 위로보다 냉철한 판단으로 내가 보지 못한 방향을 제시해 준달까. 하지만 그만큼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논리적으로 인과성을 따지기 때문에 날카로운 말들로 타인을 아프게 찌르는 경우도 많다(^^;).
금의 강단과 단호함, 냉정함은 ‘의(義)’와도 연결된다. 금이 가진 “날카로운 본능은 자신 안의 윤리적 모호함을 참지 못한다.”(『운명의 해석 사주명리』, 안도균, 북드라망, 123쪽) 금의 ‘의’는 ‘사적인 이익’이 아닌 ‘공적인 정의’를 바탕으로 한다. 금 기운이 강한 사람은 매뉴얼과 원리원칙을 세우고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엄격히 단련한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정의의 틀을 지키지 않는 타자를 향해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게 반응한다. 이는 옳고 그름의 선이 그만큼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결실을 짓는 힘은 현실감각과 맞닿아 있다. 목(木)과 화(火)의 기운은 상상과 창조의 힘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나 모험의 세계를 연다. 금은 그 창조적 에너지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응축시킨다. 나무(木)를 잘라내서 장작더미로 만들어 실생활에 필수품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두루뭉술했던 사유를 다듬어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언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금이 발달한 사람을 실리적이고 계획적이며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며 음양이 전환되는 시기를 동양철학에서는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인 전환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이전의 방식을 단숨에 부수고 질적으로 기존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혁명이라고 한다. 금의 본질은 기존에 자신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힘이다. 따라서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 금의 에너지를 삶에 불러들이면 된다! MZ는 외친다. “기성세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시도하지만 어쩐지 기성세대의 그물 속에 계속 걸려드는 것만 같다. 우리가 진정으로 다른 존재가 되려면 금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할까?

MZ가 외치는 공정성
2016년, 이화여대에 부정입학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들끓었다. 입학 과정에서 특정 학생이 특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비리를 통해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대학생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했다. ‘부모가 곧 스펙이 되는’ 현실은 청년들의 공분을 샀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얽히고설킨 정치적 비리와 비선 실세가 드러나며 결국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3년 뒤 2019년, 기성세대의 무대였던 정치판에 다시 한 번 MZ가 등판하게 된 사건이 있다. 조국 대표 자녀의 입시 특혜 의혹. 역시나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세대는 다름 아닌 MZ, 특히 20대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부모 찬스’라는 단어에 어느 때보다 격하게 반응했다.
“그 자리가 열심히 노력한 누군가 것이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부모 찬스로 자리를 빼앗았다”라는 생각이 대학생들의 존재 근간인 ‘노력과 결과의 인과’를 위협했다. 6년이 흐른 지금도 ‘공정성’은 MZ들에게 큰 화두이다. “남자들만 군대 가는 불공정한 사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오히려 역차별”, “우리가 낸 돈으로 다른 세대의 노후를 떠받치는 국민연금”처럼 청년들은 사회 곳곳에서 불공정을 감지하고 있다.
이렇듯 MZ에게 가장 강력한 정의는 ‘공정성’이다. 사회정치에 무관심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 MZ들이 유독 분노 버튼이 눌릴 때도 바로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졌을 때다. 물론, 이전에도 공정성은 언제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차별받는 세상을 타파하기 위해 기존 세대들도 불의에 저항해왔다.
MZ의 ‘공정성’은 그때와 조금 다르다. 기존 세대는 보편적인 잣대로 모두를 위한 공정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MZ는 본인과 비슷한 그룹이 차별 받는 것에만 선택적으로 분노한다. 공정성의 범위가 협소하게 줄어든 것이다. 부모 찬스 입시에 분노했던 양상도 살펴보면, 특히 해당 학교의 재학생들이 가장 큰 분노를 했다. 그 외 다른 대학교 재학생들이나 다른 세대에게는 큰 감응을 불러일으키지 못 했다. MZ 안에서도 분열되어 좁은 집단 내에서만 주장이 맴돌 뿐, 성별과 세대를 넘어서 다양한 계층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있다.
차별받지 않는 세상과 ‘공정함’에 대해 특별한 주장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간디’다. 청년 시절, 간디는 남아프리카 기차에서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차에서 쫓겨나는 일을 겪었다. 같은 티켓 값을 지불한 것임에도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탑승 도중에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꾼 결정적 경험이었다. 이후 그는 인종차별을 겪은 이후 인도인들을 위한 인권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인도인들이 백인들에게 차별받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인도인)가 “불가촉천민을 차별한 대가”라고.
그의 논리는 이러하다. 인도인들은 백인들이 자신들에게 유색 인종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분노를 일으킨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인도인)들도 사실 온갖 차별을 자행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인도 카스트에서조차 제외되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당시의 차별은 엄청났다. 정통 힌두교는 불가촉천민과 접촉해서는 안 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그림자조차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가장 빈곤한 지역에 살았고, 오물이 뒤섞인 물이 흘러나오는 지대에 살았다. 샘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 그들로 인해 물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수구에 의존해 물을 마셨다. 당시에는 차별로도 여겨지지 않을 만큼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차별이었다. 간디는 우리 자신이 이러한 차별을 자행했다는 점에서는 무감각하고, 본인들이 백인에게 차별받은 것에만 분노하는 이 지점을 오히려 불공정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간디는 유색 인종 차별에 저항함과 동시에 불가촉천민 철폐운동을 함께 한다. 본인들이 ‘받는’ 차별을 넘어서 ‘하는’ 차별에도 저항한 것이다. 인종의 경계를 너머 카스트 계급의 선까지 허물어 버리며 인도인들이 외부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내부도 성찰하게 했다.
간디는 죽음을 맞기 전까지 불가촉천민 철폐운동에 매진했다. “인도의 수많은 비참한 인민 가운데 가장 비참한 불가촉천민”(『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정영목 번역, 한길사, 165쪽)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단식”까지 한다. 자신들이 받고 있는 차별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차별의 불공정성에 맞선 간디의 운동은 인종과 계층을 넘어 인도를 하나로 묶어냈다. 간디가 내세운 정의는 ‘보편적 공정’으로 나아갔기에 전 국민이 감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의 윤리는 의(義), 특히 ‘공적인’ 정의를 향한다. 따라서 집단의 원칙과 절차, 형평성의 규칙을 중요하게 여긴다. 금은 칼처럼 명확한 선을 긋는다. 그 선을 경계로 삼아 ‘맞다’와 ‘틀리다’, ‘정당하다’와 ‘불공정하다’를 명확히 나눈다. 이러한 정의는 선 바깥에 있는 것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금이 폭력성을 유발하면 파시즘의 광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공정성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타자와 소통되지 않는 일방적 주장 혹은 윤리적 강요가 되기 쉽다.
간디의 공정성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로도 향했다. 이는 차별에 대한 저항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큰 비전을 제시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청년 세대는 공정성의 범위가 자기 그룹을 넘어서지도 못할뿐더러 일관성도 없다. 정치인들의 자녀 입학 비리 사실은 이후에도 여러 건이 밝혀졌으나 MZ들은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다시 침잠해 들어갔다. 왜 우리는 똑같은 부모 찬스를 썼는데도, 누구에게는 저항하고 누구에게는 저항하지 않는 걸까? 이런 공정성의 사적인 잣대는 자신의 그룹을 넘어서는 연대를 창조해 내기 어렵다.
노력해 온 결과가 박탈당했다고 느꼈을 때, 억울하거나 모욕적인 일을 당했을 때 등 2030은 ‘공정’과 관련된 사회적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그 마음에 전제된 우리의 전제를 보자. 우리는 정말 사회에 보편적인 공정성을 요구하고 있는가? 거기에 우리의 사사로운 마음은 없는 것일까? 금이 불에 의해 제련되듯 우리가 요구하는 공정성에 대한 깊은 내부 성찰이 있을 때, 표면적인 공정성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 다음 글에서 계속 ─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토(土) : 중심과 포용의 에너지 ─ 중심을 세우고 다름을 품는 힘 (2) (0) | 2026.07.01 |
|---|---|
|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토(土) : 중심과 포용의 에너지 ─ 중심을 세우고 다름을 품는 힘 (1) (0) | 2026.06.24 |
|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화(火) : 세상을 밝히는 ‘빛’-되기 (2) (0) | 2026.05.14 |
|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화(火) : 세상을 밝히는 ‘빛’-되기 (1) (0) | 2026.04.09 |
| [MZ세대를 위한 사주명리] 목(木) : 나무는 숲이 되어 서로를 살린다 (2) (0) | 2026.03.05 |
| [MZ 세대를 위한 사주 명리] 목(木) : 나무는 숲이 되어 서로를 살린다 (1) (0) | 2026.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