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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박소연의 브라마차르야] 좌충우돌 청년의 에로스

by 북드라망 2025. 12. 9.

좌충우돌 청년의 에로스

 

할 때는 화끈하게! - 악마 대장 되기

박 소 연(남산강학원)

 


에로스-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조르바는 세상을, 사람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보면 그 기운이 내게도 마구 전해진다. 내 안의 생명력이 덩달아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 기분이 좋다. 특히 청년 조르바는 소설 속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65세의 조르바─이때 두목을 만났다─보다 내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있는 멋진 장면 하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안 해본 일이 없었던 조르바는 한때 도자기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흙덩이 하나를 앞에 두고 무얼 만들어 볼까 상상하는 일. 녹로 위 흙덩이가 생각을 따라 항아리 모양이 되어가는 걸 보는 일. 아주 짜릿했다.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름지기 이런 게 아닐까요, 자유 말이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9쪽) 만들고 싶은 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자유! 조르바는 도예의 매력에 취했다.

그런데 왼손 집게손가락이 자꾸 걸리적거렸다. 손가락이 삽시간에 끼어들어 조르바가 만들려는 것에 흠집을 내곤 하는 거였다. 그게 조르바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루 이틀 지켜보던 조르바는 돌연 손도끼로 문제의 손가락을 내리찍어버린다. 세미나 시간에 이 장면에서 멈춰 웅성웅성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무식할 수가! 근데 또 너무 멋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는 자기 신체마저도, 몸 전체로 퍼지는 끔찍한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화끈함이.

그 시절 조르바에게 도예는 자신이 사람임을, ‘자유’임을 일깨워주는 엄청난 활동이었다. 그래서 손도끼를 들었다. 자유에 훼방 놓는 것은 뭐든 가만둘 수 없었다. 조르바의 이야기를 듣고 두목은 탄복한다. ‘……얼마나 사랑하면 손도끼를 들어 내려치고 아픔을 참을 수 있는 것일까…….’(29쪽) 얼마나 사랑하기에! 청년 조르바는 뜨겁게 달려들어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 시절 조르바는 자유에 대한 불같은 열정으로 가득한 통제 불능의 야생마 같았다.

 



청년의 에로스, 조국을 향하다
그때의 조르바는 이런 모습이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까마귀처럼 새까만 것이 아주 색이 제대로”였고, “이빨도 서른두 개 고스란히 다 있었고, 술에 취하면 먼저 전체요리, 그다음 본요리 이렇게 싹싹 해치웠”다.(33쪽) 젊음의 윤기가 넘쳐흘렀던 청년은 곧 격동하는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1897년에 일어난 크레타 혁명이 그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봐야 한다.

그리스는 약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제국의 통치하에서 그리스인들은 비교적 잘 지내왔다. 오스만은 피지배 민족들을 종교 공동체(밀레트)로 구분하여 통치했다. 각 밀레트는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그 안에서 각자의 종교적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갔다. 물론, 자율성이 보장됐다 하더라도 지배 국가와 식민지 사이엔 엄연한 차별이 존재했다. 술탄의 지배 아래에서 비이슬람교도는 “넓게 보면 이슬람의 친척들”이나, 정통 이슬람과는 달리 “불완전한 계시를 받은 ‘딤미’(2등 시민)”였다. 딤미는 고위직에 진출할 수 없었고, 지즈야나 하라지 등의 세금도 납부해야 했다. 점차 ‘2등 시민’이란 분류, 그에 따른 법적 지위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고, 부과되는 세금의 액수 또한 오스만 통치 후반부로 갈수록 높아져 비(非)무슬림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차별이 특히 심했던 시골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를 진압하려 애쓰던 오스만제국은 1821년,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그리스 정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나니, 이에 대한 응징으로 정교 공동체 지도자 그레고리오 5세를 처형시켜 버린 것이다. 술탄에 반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도 없었으며, 그레고리오 또한 “술탄을 거스르는 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며 반란군을 설득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에 확실한 경고장을 날려야 했으므로 그가 희생양이 됐다. 나아가 오스만제국은 그의 시체를 유대인에게 넘겨 조리돌림을 시킴으로써 다른 밀레트에게도 섬뜩한 경고를 날렸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러시아가 같은 정교인 그리스에 행해지는 박해를 더 두고 볼 수 없다며 개입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 일로 그리스인들의 피가 끓기 시작했다. 차츰 형성되어오던 민족의식이 폭발한 시점이었다.(인용 – 유튜브: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 그리스편)

본격적인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1822년, 혁명 지도자들은 그리스의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이 해에 ‘히오스 대학살’이란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오스만군은 병력을 투입해 히오스 섬사람 수만 명을 학살하고, 노예로 끌고 갔다. 이 사건은 신문과 그림(프랑스 화가 들라쿠르아의 ‘히오스 섬의 학살’)을 통해 서유럽 국가들에 알려졌다. 낭만주의가 활발하던 이 시기,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유럽 곳곳의 젊은이들이 그리스로 몰려가 독립을 도왔다. 히오스 섬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리스군은 오스만군의 기함을 불태웠고, 2천여 명이 죽었다. 씁쓸하게도 사망자 대다수는 노예로 붙잡힌 히오스 섬사람들이었다. 잔혹한 복수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스군을 쉽사리 진압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식민지 중 하나였던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했다.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은 승승장구 밀고 나가 아테네와 아크로폴리스까지 탈환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유럽 열강이 나섰다. 러시아는 그리스와 같은 정교라는 명목 아래, 영국은 지중해 근처까지 밀고 내려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는 인도주의의 여론을 이고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해군을 파견해 1827년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이집트 함대를 격멸시켰다. 1830년에는 런던 의정서를 통해 그리스의 독립을 공식 승인했다. 18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에서 오스만 정부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 영토는 소수에 국한되었으며, 마케도니아, 크레타섬 등 상당수 그리스인 거주지는 여전히 오스만제국의 영내에 남았다. 열강의 도움을 받은 반쪽짜리 독립이었으나, 그리스인들은 자주권을 되찾았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시선은 자연스레 ‘다른 지역의 그리스인 해방’으로 쏠리게 되었다.

특히 크레타섬에서 그리스인들의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 1896년, 크레타에서 대규모 기독교도 봉기가 일어난다. 이에 그리스 본국이 지원군을 파병하며 봉기는 다시금 그리스-오스만 전쟁으로 번졌다. 조르바가 한참 혈기 왕성하던 때의 일이었다. 당시 조르바는 봇짐장수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었다. “크레타의 운명 같은 건 쥐나 물어 가라지!”(34쪽) 외쳤지만, 그 혈기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조르바는 팔던 물건을 치워두고 총을 든다. 크레타 반란군에 가담한 뒤로 조르바는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가 됐다. 오래전부터 쌓여온 적대감은 서로를 인간이 아닌 짐승이나 악마 따위로 생각하게끔 했다. 죽이는 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조르바는 터키인들의 목을 망설임 없이 잘랐고, 귀를 술에다 절였다. 그 시절은, 60대 조르바의 표현에 따르면, 모두가 ‘미친 지랄병’에 걸려 있던 때였다.

“두목, 여기 기적 비슷한 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참 웃기는 기적이어서 기가 막힐 지경이오. 우리는 반란군이 되어 그 지랄을 했는데, 사기 치고, 훔치고, 죽이고 했는데, 그 덕분에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크레타로 왔답니다. 그러고는 자유라니!” (같은 책, 36쪽)


오스만군은 그리스군을 상대로 연이은 승전보를 울렸으나, 3국이 또다시 제동을 걸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반강제적으로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 또한 열강은 크레타섬에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군과 오스만 모두 크레타를 떠나고, 1898년에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열강의 동의를 받아 크레타 자치국의 수장이 됨으로써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조르바는 조국, 그리스를 사랑했다. 그리스가 독립해 자유를 얻는 것만큼 기쁘고 뿌듯한 일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손가락을 잘라냈던 것처럼, 그리스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들을 손도끼로 내리찍어 제거해야 했다. 사랑한다면 그래야 했다! 자유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던 청년에게 “<왜>라든지 <어째서>” 같은 질문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폭력은 계속됐다. 몇 년 뒤에는 마케도니아 지역을 두고 불가리아와 끔찍한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그리스 무장단은 불가리아계 마을을 공격해 주민들을 몰살시키고, 마을을 불태웠다. 불가리아계 조직도 똑같이 보복했다. 서로 반복적인 학살, 약탈, 방화를 주고받으며 애꿎은 민간인만 셀 수 없이 죽었다. 조르바는 이 전투에도 참여해 산과 마을을 누볐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것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열정에서 광기로
마케도니아 투쟁으로 뒤숭숭하던 어느 해, 조르바는 어느 불가리아인 마을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런데 그만 정체가 발각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포위망을 좁혀왔고, 조르바는 발코니를 통해 빠져나와 지붕에서 지붕으로 도망쳤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불가리아인들도 따라 올라와 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조르바는 에라 모르겠다, 아무 마당으로나 뛰어내렸다. 그 집 창문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불가리아 여자가 잠들어 있었다. 인기척에 잠을 깬 여자가 조르바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조르바는 여자에게 몸을 밀착해 속삭인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그녀는 조르바가 그리스인임을 알고도 그를 집 안으로 숨겨주었다.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며 조르바는 생각한다. 불가리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상관없다고. 중요한 건 여자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란 것, 그러니 죽이지 말자고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자가 죽은 남편의 옷을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드밀라. 루드밀라는 마지막까지 조르바의 무릎을 부여잡고 간청했다. 꼭 다시 돌아오라고. 남편을 잃고 외로웠던 루드밀라는 그만 조르바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루드밀라의 도움을 받아 조르바는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튿날 밤, 조르바는 정말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루드밀라를 찾아가진 않았다. 대신 “석유 한 통을 들고 들어가 마을에다 불을 싸질렀”다. 루드밀라도 틀림없이 그 불에 타죽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내가 애국자였어요.”(327쪽)라는 조르바의 말이 충격적이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인데,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지라도 마을을 태워버릴 것까지 있나.

그리스-터키의 관계는 한일관계보다 몇 십 배 더 예민하고, 갈등의 골도 더 깊다고 한다. 이번 글을 쓰며 얕은 수준에서 스케치만 했는데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이해가 된다. 더불어 사는 삶을 도모하는 21세기에도 과거 일본의 만행을 담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피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민족주의란 게 얼마나 힘이 센지, 너무나 쉽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편을 가른다. 또 죽음을 쉽게 말하게 된다. <하얼빈>이란 영화의 장면 하나. 안중근 의사가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로로 잡힌 일본군 하나를 살려 보낸다. 선한 마음의 결과는 부대의 전멸로 돌아왔다. 살려준 일본군이 부대를 이끌고 독립군 기지를 습격한 것이다.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안중근 의사가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절규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러게, 그때 죽였어야지!’

하필이면 그 일본군이 제국주의에 헌신하는 냉혈한이었고, 자신을 살려준 데 대해 더 큰 모멸감과 복수심을 불태운 인간이었다는 것. 그래서 동료들이 죽었고, 안중근 의사의 선택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그려졌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사형만이 답인가? 뭣도 모르고 전쟁에 동원된 일본 ‘사람’이 포로로 잡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의 저 생각은 불가리아인 마을이라는 이유로 석유를 들이 붓고 불을 놓는 조르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은 배신할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죽여 마땅하다. ‘사람’은 지워지고, ‘일본’만 남는다. 폭력이 그렇게 정당화된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이건 불가리아 놈, 요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었기 때문이지요.” (같은 책, 325쪽)


다른 이유가 없다. 불가리아 놈이고, 터키 놈이라서 그랬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 놈이라서 죽였고, 그리스 놈들이 사는 마을이라 통째로 불태워버렸다. 맹목적인 증오, 끝없는 폭력 앞에서 조르바도 몹시 괴로웠다.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으로 곧장 가라,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려. 이 병신아!’”(325쪽) 때때로 비참한 심정이 되었지만, 그 짓을 멈추진 않았다. 청년 조르바의 에로스는 온통 조국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놀랍게도 이 당시, 조르바는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조국에 몸 바친 자신에 심취해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루드밀라와의 하룻밤이 보여주듯,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 정도에 불과했다. 욕망이 동할 때 잠깐 건드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그것마저도 최대한 절제했던 것 같다. 성행위가 투쟁할 힘을 빼앗아 가버릴 거라고 여겨서다. 모든 여자에게서 아프로디테의 얼굴을 마주하는 중년의 조르바와는 퍽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조르바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변화는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가리아인, 터키인, 여성…, 이 모든 것들의 경계를 일순간에 타파할 크나큰 변화가!


조국과 종교로부터 도주하다
애국자란 말은 종교적으로도 투철했단 뜻이다. 그리스 정체성의 중심축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였기 때문이다. 조르바도 엄청났다. 머리털을 뽑아서 성 소피아 성당의 모습을 수놓아 목에 감고 다닐 정도였다. 종교, 신념, 무기로 무장한 조르바는 살아있는 살인 병기였다. 그가 “걸어갈 때면 철꺼덕철꺼덕, 흡사 연대가 마을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322쪽) 마케도니아 투쟁이 계속되던 어느 날, 조르바는 어느 신부의 마구간에 숨어들었다. 신부의 정체는 위장한 불가리아 비정규군이었다. 낮에는 교회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밤에는 그리스인들의 마을에 숨어 들어가 사람들을 총살하는! 조르바는 저 극악무도한 놈을 처리해야겠다 다짐하고 숨어든 것이었다. 신부가 마구간으로 들어와 양에게 풀을 먹이려고 하는 순간, 조르바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신부의 목을 베어버렸다. 귀도 잘라서 기념품으로 챙겼다.

 



조르바에게 신부는 죽여 마땅한 놈이었다. 그리스인으로 위장해 동포를 해치고 다니는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신부로 위장해 그 짓을 하다니! 얼마나 비열한가. 그대로 놔뒀으면 가짜 신부는 계속해서 종교를 모독하고, 동포를 무참히 살해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를 단죄한 조르바는 그리스의 영웅이었다.

다음 날 아침, 조르바는 뿌듯한 마음으로 동료들을 위한 빵과 소금, 장화 따위를 사러 마을에 다시 갔다. 길을 걷는데 검정 옷을 입은 꼬마 애들 다섯이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게 보였다. 어째선지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가서 보니, 첫째 애가 열 살쯤 되어 보이고, 막내는 갓난아기에 불과했다. 조르바는 평소 안 하던 짓을 했다. “뉘 집 아이들이야?” 불가리아 말로 물어본 것이다. “신부 댁 애들입니다. 아버지는 며칠 전 마구간에서 목이 잘렸답니다.” 돌아오는 대답을 듣는 순간,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이 순간, 질문이 돌풍처럼 일어나 조르바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자유에 대한 강력한 의문이 들었다. 자유롭기 위해 얼마나 더 잔혹해져야 하는가? 이런 게 자유라고? 또 어젯밤 내가 죽인 사람의 아이들을 맞닥뜨렸다. 동료들 없이! 사명감으로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동료들과 몰려다닐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어두운 밤, 마을에 불을 지를 때도, 그 불에 루드밀라가 타죽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리스인이 터키인을 보는 게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인간을 만났다. 코흘리개 꼬마 애들 다섯을. 이 아이들이 악마인가? 조르바는 갑갑함을 느꼈다. 그동안 자유를 외치며, 자유를 위해 살았는데…. 자유는 개뿔, 자신을 옭아맨 폭력의 사슬만 덩그러니 보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를 치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내가 죽이고 사기 친 이야기를 다 한다면 두목, 아마 머리털 끝이 송두리째 곤두설 겁니다. 그런데도 그 결과가 뭐였다고? 자유라니! 우리 같은 것들에게 벼락을 내려 싹 쓸어버리지 않고 자유를 주신 하느님이라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같은 책, 36쪽)


조르바가 원했던 자유는 이런 게 아니었다. 터키인들을 죽여서 얻을 자유도, 그런 자유를 요구하는 조국도, 끔찍한 학살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한 하느님도 다 가짜다! 그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아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물건을 사려고 가져온 터키 돈이고, 남아있던 그리스 돈이고, 남김없이 털어서 애들한테 주었다. 그렇게 다시 길을 잡았다. 동료들에게로 돌아가는 대신 반대로, 정반대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324쪽) 함께 투쟁하던 동료들에게는 변절자로 기억될 터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변절할 조국이 더는 없었기에. 다른 쪽의 삶을 산산이 깨부수고 얻어야 하는 자유라면 차라리 조국으로부터 탈주하겠다. 그의 에로스 또한 방향을 틀었다. 세상 만물로, 사람에게로, 세상의 신비, 여성에게로.

조국을 사랑하는데, 그 표현이 폭력이어야 하는 아이러니. 이건 전의 경험과는 맞지 않았다. 손가락을 잘라버렸을 때의 후련함이 여기엔 없었다. 조국을 사랑할 때도, 버릴 때도 조르바는 화끈하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일을 어정쩡하게 하는 거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들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332쪽) 그는 뭐가 됐든 악마 대장이 되어서 제대로 했다. 경계를 해체하는 일도 대장이 되어서 했다. 조르바는 더 이상 사람을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터키인으로 구분 짓지 않았다. 오직 그 인간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놈인지가 중요했다. 더 나이를 먹으면 좋고 나쁨마저 상관없어질 거라고 장담한다. 악하기만 한 놈도, 착하기만 한 놈도 없기에. 이놈 안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이놈도 언젠가는 죽어 한 줌 먼지가 되겠지 하면 모두가 한 가지다. 모두가 생각하면 뭉클한 존재들이다. 절대 칼로 멱을 따거나 강간하거나 죽일 수 없다.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르바는 젊었을 적 자신이 얼마나 눈꼴사나웠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신은 암탉을 찍어 누르고는 가슴을 턱 펴고 똥 더미 위에 올라가 뻐기며 한바탕 우는 수탉과 다름없어요. 암탉은 보지 않아요. 볏만 봅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걸 알 턱이 없지요. 제기랄!”(129쪽) 두목을 답답해하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말이다. 조국에 미쳐 있을 때 수탉처럼 여성을 대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래서 아마 저 마지막 ‘제기랄!’은 자기한테 하는 푸념일지도 모르겠다.

조르바는 신체를 완전히 탈바꿈시켜버렸다. 철거덕 소리가 나던 신체에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완벽한 비폭력의 신체로, 에로스-인간으로! 그는 또 머리털로 정성스레 수놓았던 성 소피아 성당 장식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젠 종교고 성당이고 십자가고 따로 필요가 없었다. 믿음이 있다면,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기에. (320쪽)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327쪽)

조르바는 두목이 꼭 자신 같다. 두목이 아주 어렸을 때, 우물 속에서 환상을 보았다. 우물 속엔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안을 들여다볼수록 풍경은 더 선명해졌다.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고 싶다! 발을 박차 우물로 뛰어들려던 아이를 어머니가 가까스로 붙잡았다. 청년이 된 두목은 계속해서 다른 우물들에 빠지곤 했다. <영원>, <사랑>, <희망>, <국가>, <하느님>…. 두목은 끊임없이 이념에서 이념으로 옮겨 다니며 구원을 찾았다.

조르바도 우물에 화끈하게 뛰어들었다. 넘치는 혈기를 조국과 종교에 온통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의 우물은 결국 박살이 났다. 이제 두목의 차례다. 조르바는 두목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서로를 악마화하던 그리스 정교회와 이슬람, 이 종교라는 우물에서 벗어나고 보니 아버지를 잃은 다섯 꼬마가 보였다. 이념을 통한 자유, 이념을 위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인간’이 ‘자유’여야 한다. 조르바는 어떻게 우물 속의 자유가 진짜가 아님을 깨달았을까? 폭력의 광기 한가운데서 어떻게 멈춰 설 수 있었을까? 두목을 향한 그의 세레나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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