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마차르야 vs. 아프로디테
결혼만 3천 번? - 수많은 아프로디테를 만나다
박 소 연(남산강학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음식, 술, 여자와 춤─ 는 그의 건강하고 왕성한 몸에서 사라지거나 둔화되는 날이 없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81쪽) 가진 것이라곤 달랑 산투르 하나. 말년에 ‘오라지게’ 추워 결혼하기 전까진 늘 길 위에서 살았다. 혁명이다, 전쟁이다 해서 혼란스러웠던 그리스에서 형형한 마음과 우렁찬 신체로 자유를 구현했던 조르바! 그의 자유는 ‘음식, 술, 여자와 춤’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나지 않은 게 아니라 그것들이 늘 생생했기에 자유로웠다. 놀랍다. 인간의 욕망 그대로가 자유의 표현일 수 있다니.
사람이 종교에 귀의해 수행하는 이유는 딱 하나, 자유롭기 위해서다. 나를 자유롭게 하고, 타자를 자유롭게 하려고. 그리고 자고로 수행이라 하면 저 네 가지의 금지가 기본 중 기본이지 않나. 그런데 음식과 술, 여자와 춤, 그리고 자유라고? 솔직히 말해서 혹했으나, 그럼 그렇지. 책을 읽어 내려가며 느꼈다.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댓잎마냥 욕망 따라 흥청망청 사는 건 조르바의 자유가 아니다. 조르바는 왕성한 식욕의 소유자다. 어찌나 잘 먹는지 책을 읽다가 배가 고파질 정도다. 그런데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건 또 아니다. 대신 어떤 음식이든 달게 먹는다. 포도주도 사랑한다. 그러나 술을 아무리 마셔도 절대로 소위 ‘개가 되지’ 않는다. 술 없으면 못 사는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다. 그렇담 여자는?
“결혼을 몇 번 했느냐고요? 정당하게는 한 번…… 딱 한 번 했소. 반쯤 정당하게는 두 번. 부정하게는 천 번, 2천 번, 3천 번? 몇 번 했는지 그걸 다 어떻게 계산합니까?”(위의 책, 119쪽) 간디가 들으면 깜짝 놀랄 답변이다. 약간의 허풍이 곁들어 있다 치더라도 3천 번? 계산도 못 하겠다고? 혹시 여자에 미친 섹스 중독자인가? 싶지만,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조르바가 문자 그대로 길 위의 인간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방랑자로 살면서 그가 터득한 생존 기술(?)이 있었으니, 바로 과부다. 어떤 마을이든 과부 한 명은 꼭 있는데, 조르바는 그 집에서 머문다. 과부들의 집이 조르바의 숙소였으니 평생 거쳐 간 여자가 몇이었겠나. 조르바가 일일이 계산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여자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낯선 남자를 집에 들일 리 만무하다. 경계를 풀고 스스럼없이 문을 열어줄 만큼 조르바가 엄청 매력적이었단 이야기인데, 도대체 그의 매력이 뭔지 궁금해진다.
커다란 귀와 푸짐한 입
조르바에게 여성은 세상의 신비고, 경이로운 존재다. 그리고 그는 이런 감정을 표현하기를 숨기지 않는다. 시선으로, 말로, 행동으로, 온몸으로 자신을 좋아한다는 신호를 꾸밈없이 팍팍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대화가 시작되면 게임 끝. 조르바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자라는 존재의 모든 문은 활짝’ 열린다. 얼굴의 주름살이 펴지고, 젊었을 적 당당함을 회복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조르바는 듣는 사람이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사람이다. 당시 여성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 아마도 평생 시집온 마을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과부의 삶은 더 팍팍하지 않았을까. 남편을 잃고 홀로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하면서, 어디다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외롭게 살아야 했으리라. 조르바는 이런 여성들에게서 말을 길어 올렸다. 메말랐던 입에 단침이 돌게 했다.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커다란 귀와, 길 위에서 겪어온 재미난 일들을 과부의 눈앞에 펼쳐줄 푸짐한 입. 오직 그것만으로! 이 만남의 케미가 어땠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크레타섬에 도착한 두목과 조르바는 마담 오르탕스의 여관에 머물기로 한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오르탕스 부인은 부리나케 식사를 준비해 내왔다. 맛난 요리가 담긴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부인은 깜짝 놀라고 만다. 접시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조르바가 3인상을 봐둔 것이다. 오르탕스 부인의 얼굴이 기쁨으로 빨개졌다. 그녀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성이고, 여관 사장이고, 과부고, 과거가 어떻고, 예쁘지도 않고, 나이도 많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다. 이제껏 여관을 찾는 손님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왔지만, 식탁에 그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의자가 하나 더 있고, 접시가 세 개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부인의 모습이 마음 한구석을 찡- 울린다. 오르탕스 부인은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가장 아끼는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셋은 함께 밥을 먹고,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부인은 이야기를 풀어내며 무시와 외로움으로 쭈그러졌던 마음에 공기를 한껏 넣는다. 조르바는 눈을 반짝이며 듣는다. 중간중간 힘찬 리액션과 노골적인(!) 눈길을 보태며. 두목이 보기에 오르탕스 부인은 실시간으로 젊어지고 있었다.
조르바는 돈도 없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나이도 많은 백수 아저씨다. 그러나 평생 맛깔나게 산다.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조르바가 알려주는 돈 한 푼 안 드는 연애 비법이자, 신명 나는 삶을 위한 꿀팁이다. 귀를 열고, 신나게 떠들라! 그런데 ‘듣는 게 무슨 비법이고 능력이야?’ 의아할 수 있다. 한편으로 ‘푸짐한 입은 타고 나야 하는 거 아냐? 나한테는 그런 재능이 없는데.’ 하며 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르겠다.
말을 잘한다는 게 뭘까? 멋들어진 단어 선택과 매끄러운 문장 구사? 청산유수로 듣는 이를 압도하는 것? 달콤한 말로 상대를 홀리는 능수능란함? 보통 이런 걸 두고 언변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너무 일방적이지 않나. 내가 말을 잘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듣는 상대는 안중에도 없다. ‘프로 소통러’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완벽한 내가 되기 위해서 말도 잘하고 싶은 거다. 이렇게 되면 역으로 입을 닫게 된다. 유려하게, 재미있게 말하지 못할 거면 그냥 말을 안 하겠다는 극단적 선택이다.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지 않는 말하기라니?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 존재하는 건가, 하고 언어가 자괴감을 느낄지도. 듣는 것도 그렇다. 내가 얼마나 안 듣고, 못 듣고 사는지 알지 못한다. 듣지 못하는데 말을 잘할 수 있을 리 없다.
감이당·남산강학원에 온 첫해에 내가 잘 못 듣는 단 걸 처음 알았다. 충격과 공포! 분명 선생님 강의를 재밌게 듣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집중을 놓치고 아득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세미나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반엔 맥락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순간 딴생각에 빠져 대화 미아가 되고 마는 거였다. 말하는 것도 어렵기만 했다. ‘내 차례가 돌아오면 뭐라고 말하지?’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놓쳤다. 말하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세미나 마지막 10분 전까지 조용히 있다가 한 번도 입을 안 뗀 사람을 찾는 반장의 레이더에 걸려 겨우 몇 마디 하는 식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말을 못 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 말에 집중하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이놈의 귀가 문제였다. 다른 거 생각 말고 듣는 연습부터 하자고 다짐했다. 맥락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되기까지 2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귀에도 근력이 필요했다.
들을 수 있으면 말은 따라온다. 듣는 사람의 말은 재미있다. 조르바는 상대의 이야기에 옴팡지게 스며들어 공명한다. ‘조르바’는 희미해지고 ‘카나바로’가 된다. 그리고 상대방은 이걸 기막히게 안다. 이 사람이 온전히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니면 건성으로 들으며 하룻밤을 보낼 궁리나 하고 있는지를. 그가 말을 할 때는 ‘또 시작이네’ 하는 생각이 안 든다. 동어 반복이 없다. ‘자유’는 그의 입을 통해 매일 새롭게 변주된다. 조르바를 보면서 말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느꼈다. 언어가 신이 나서 춤추는 것 같았다. ‘그래! 나를 이렇게 쓰란 말이야!’ 하면서.
잘 들으려고 애쓰다 보니 자연스레 질문이 생겼다. 상대가 궁금해지니 말이 나왔다. 타이밍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문맥이 이상해도 일단 투박하게 물었다. 이야기의 리듬에 발맞춰 따라갈 수 있게 됐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읽고 가장 부러웠던 것이 그의 말솜씨였다. 그런데 조르바에게서 배운 바에 따르면 ‘푸짐한 입’의 비결은 따로 없다. 감응하면 된다. 경청과 호기심이 한데 섞여 침이 돌고, 말이 쏟아지면 그때가 바로 커다란 귀와 푸짐한 입을 지닌 순간이다. 이 순간을 한도 끝도 없이 늘리고 싶다. 존재의 문을 활짝 여는 듣기와 말하기라니, 이 세상 그 어떤 초능력보다 멋지다!
기대 없는 사랑
앞에 이야기했던 조르바의 화려한 사랑 경력을 떠올려보자. 정당하게는 한 번, 반쯤 정당하게는 두 번, 부정하게는 계산도 못 할 정도라고 했다. 정당한 한 번의 결혼이 어땠길래 조르바는 가정생활을 접고 길 위로 나섰던 것일까? 조르바의 가족관이 아주 흥미롭다. 그는 결혼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자유다’라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핵심 메시지를 상기하자. 모름지기 인간이라 하면, 자유라 하면 근심 걱정이 없어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장차 이러다 우리는 어찌 될까?’ (위의 책, 22쪽)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한 그러지 않을 수 없다.
또 조르바가 주변을 잘 관찰해보니 이렇더란다.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돈만 손에 쥐었다 하면 당장 발길을 끊더군요. 그들은 친구도 피하고, 지참금을 요구하고, 가서 결혼을 해버리고, 집안 살림이 뭔지 시시껄렁한 것들을 시작하며, (좋은 여자건 나쁜 여자건) 한 여자에게 쥐여 살고, 그게 전부더라고요.”(엘레니 카잔차키 엮음, 『카잔차키스의 편지』,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147쪽) 가정을 꾸리는 건 근심 걱정거리를 끌어안는 일이지만 그래, 좋다. 하지만 더 이상 친구도 만나지 않고 가정 안에만 폭 박히는 건 조르바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가정생활을 해야 할까? 기대 없이, 희망 없이 함께하면 된다.
아내와 자식한테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건 그들의 존재만으로, 이 관계망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내 바람을 투영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조르바 눈앞의 이 아이는 훗날 의사나 법조인이 될 훌륭한 내 자식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나의 첫아들 꼬마 디미트라키다. 이게 조르바의 사랑법이다. 조르바는 친구들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들도 사랑한다. 자신의 아이에게 10드라크마를 주는 일은 어떤 다른 사람에게 그걸 주었을 때 얻는 기쁨과 다르지 않다(위의 책, 148쪽). 내 아이라서 더 사랑스럽지도 않고, 내 아이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귀하지도 않다. 내 아이, 내 가족을 특별하게 여기는 감각 자체가 없다. 특별하다면, 모든 존재가 그러하기에 차별 없이 대한다.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기에 자유롭다. 조르바가 질색팔색하는 것 중 하나가 늙어서 자식한테 의지하는 거다. 그는 말한다. 며느리나 사위가 사랑하는 당사자는 조르바의 아들, 딸이지 조르바가 아니라고. 며느리, 사위가 아무리 착해도 그들 입장에서 조르바는 어쨌든 외부인이라 서먹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사는 노인들이 얼마나 비참한고 하니, 자식들뿐만 아니라 손주 눈치까지 봐야 하는 신세가 된다. “유황불 속이라도 헤치고 나아가는 이 사람, 아무 겁도 없이 모든 곳을 싸돌아다니는 나 ─ 그런 내가 몇 명의 괴물 같은 애들 ─ 조그마한 내 손자들이나 감시하는 신세로 끝장을 보고 ─ 그 녀석들이 내 옷에 오줌을 싸갈겨도 나로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화가 치민다는 말도 못하고 ─ 이러면 정말 너무나 한심하다는 기분이 들겠고, 나는 불쌍하고 비참한 인간이 되겠죠.”(위의 책, 150쪽) 그러나 의존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가족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언제든 이전의 아내들, 그녀의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즐겁게 만날 수 있는 조르바처럼.
이성을 대하는 마음도,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현대인의 감각과는 완전 딴판이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요즘 결혼할 최적의 사람을 따지는 ‘육각형 배우자’ 모델이 있다고 한다. 최고의 배우자는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성격, 집안의 여섯 가지를 두루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다. 잘생기고, 예쁘고, 학력 좋고, 대기업에 다니거나 전문직이고,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어야 한다. 혹시 비혼주의 선언인가. 나는 몇 각이니, 너는 몇 각이니 하며 평생 함께할 배우자를 찾는다니, 기이한 모습이다. 자식은 또 어떻게 대하는지. ‘4세 고시’, ‘7세 고시’가 생긴 지 오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고시를 본다. 4, 5, 6, 7세… 나이마다 도달해야 할 레벨, 들어가야 하는 학원이 세팅되어 있다. ‘초등 의대반’이란 것도 있단다.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이 의대가 뭔지 알게 뭔가. 부모의 온갖 기대와 희망을 자식에게 구겨 넣고 있는 형국이다. 내 아이가 제일 소중하고, 특별하다고 연신 외치면서. 이리 빚고, 저리 빚어 육각형 인간으로 만들어두면 분명 훗날 아이도 고마워할 거라면서. 조르바가 보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아마 질겁해서 외칠 거다. “이런 젠장! 제발 기대를 버리라니까!”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존재, 아프로디테
조르바의 정당한 결혼 생활이 어떻게 막을 내렸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첫아들이 세 살 되던 해에 죽었는데, 그게 계기였을 수도 있겠다), 조르바와는 잘 안 맞는 삶이란 건 알겠다. 그럼 반쯤 정당한 결혼, 부정한 결혼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가 섞이고, 술기운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잠을 잔다. 수많은 여자와 이런 관계를 맺지만, 조르바는 여자에 미친 자도, 섹스 중독자도 아니다. 이게 바로 조르바의 특이점인데,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조르바를 평가하려는 사람들은 다 여기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과부와 함께 살면서 먹고 자고 하다가도 인연이 다하면 또 떠난다. 조르바가 가야 할 때라고 느껴서든, 여자가 미남 군인과 사랑에 빠져 조르바를 버리고 달아나든. 잘은 몰라도 조르바의 에로스에는 육욕 이상의 뭔가가 있다.
조르바의 에로스에선 소유욕과 질투심을 찾을 수 없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 카페에서 조르바와 두목은 비가 죽죽 쏟아지는 창밖을 무심코 응시한다. 그런데 그때, “숱 많은 머리채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검은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빗속을 달려가는 여자가 보였다. 탄탄하고 둥그스름한 몸매가 비에 젖어 달라붙은 옷 위로 드러나 고혹적이었다. (…) 조르바는 과부가 지나간 뒤부터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자제를 할 수 없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41-143쪽) 조르바는 과부를 보고 강렬한 에로스적 충동을 느낀다. ‘뜨거운 벽돌 위에 올라앉은 고양이’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과부에게 반한 건 조르바뿐만이 아니었다. 두목도 그녀를 보고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두목의 마음을 금방 눈치챈 조르바. 이때부터 그의 포지션이 180도 달라진다.
‘나는 그 여자 몫이 아니야.’ 과부에게 푹 빠졌던 사내는 순식간에 중매쟁이로 변신해 어떻게든 두목과 과부를 이어주려고 애를 쓴다. 조르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목은 외면하거나 때때로 신경질을 내기도 한다. 심지어 과부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도 한참 뜸을 들인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르바는 다시 부뚜막 위 고양이 심정이 된다. “모든 사람이 그 여자를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게 견딜 수가 없어요. 그 여자가 혼자 잔다는 게 참을 수가 없어요. 두목, 그래서는 안 돼요.” (위의 책, 156쪽) 그래서 조르바는 매일 밤 과부집 뜰을 방황한다. “누가 이 불쌍한 과부를 끼고 자주어야 내 마음이 편할 텐데….” 하면서. 조르바에게 에로스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힘이다. 이 경우 조르바의 에로스는 과부에게로 흘렀지만, 과부와 두목의 에로스는 서로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 육체적 충동을 한순간에 일소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포인트는 조르바의 이 말이다. ‘나’는 그 여자 몫이 아니야. 보통 이런 상황에서 주어는 ‘그 여자’다. 그 여자는 내 몫이 아니야, 내가 너한테 양보할게. 이렇게. 그 여자가 내 몫이 아니라는 말은 여자는 언제든 누군가의 몫이 될 수 있는, 남자들의 소유물이란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여자는 내 몫도 아니고, 두목의 몫도 아니다. ‘그 여자 몫’이 중요하다. 여성이 사랑할 대상을 선택하는 주체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충격적인 사실 하나. 요즘 들어 마을에 예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는데, 남자들이 과부를 떠올리며 자기 부인과 섹스하기 때문에 그렇단다. 모두 자신의 욕망을 풀기 위한 도구로 과부를 사용하지, 과부의 욕망을 생각해주지는 않는다. 이 시대에 여성을, 그보다 약자인 과부를 조르바처럼 바라보는 남성은 없었다. 지금도 이런 감각을 지닌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당신은 다른 천국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한심해요, 그런 건 없어요!”(위의 책, 149쪽) 조르바에겐 사랑함이 곧 천국이지, 다른 천국은 없다. 욕망을 외면하고 억압하다 나중엔 두려움까지 느끼는 두목이 안타깝고, 외롭게 홀로 잘 과부도 안쓰럽다. 그러나 조르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육신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두목의 사고방식에 때때로 질문을 던질 뿐. 그리고 과부집 뜰을 배회한다. 조르바는 도저히 집에 그냥 들어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마음이 쓰여서 뭐라도 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고, 해서 마당이라도 돈다. 이건 일종의 기도(?)다. 과부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기도.
조르바에게 여성은 소유하고, 독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여성이든, 마주 대할 때면 “개별적 존재는 사라지고 개별적 특징들은 말소되었다. 젊었느냐 늙었느냐, 아름다우냐 추하냐 따위는 하등 중요할 것 없는 차이일 뿐이었다. 모든 여자 뒤에는 위엄이 있고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위의 책, 64쪽) 조르바의 여성 편력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조르바는 육각형 따져 가며, 취향 따져 가며 연애한 게 아니다. 되려 만나는 모든 여성을 자신의 취향에 완벽히 부합하는 존재로 바라봤다. 자신을 투명하게 비우고, 상대를 온전히 비춘다. 젊었거나, 늙었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조르바에게는 한 가지였다. 그가 대화 나누고, 만지는 존재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였기에. 조르바는 여성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아프로디테의 존재를 깨우는 데 큰 소질이 있었다. 여신을 감히 어떻게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상대를 대하는 조르바에게 어떻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디와 조르바를 함께 만나면 서로 매우 달라서 비교 탐사하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공부할수록 디테일한 측면에서 공통점이 많이 보인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자신을 던지고픈 세상과 사람들을 만났고, 조르바는 그렇지 못했다는 환경의 차이가 있을 뿐. 간디는 인도의 바푸로서, 조르바는 고독한 방랑자로서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며 산다. ‘인간은 자유다!’라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천명. 간디나 조르바나 세상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대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은 60대 조르바와 30대 두목이다. 소설 속 알렉시스 조르바는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30대 중반에 만나 우정을 나눴던 기오르고스 조르바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결혼과 가족에 대한 위의 거침없는 견해는 기오르고스 조르바를 인용한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만난 건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석탄이 부족해지자 카잔차키스는 갈탄을 캘 계획을 세웠고, 그 사업을 위해 고용한 일꾼이 바로 조르바였다. 두목은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하,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620쪽)의 조르바를 경애한다. 조르바는 질문을 가득 품고, 세상에 신중한 걸음걸음을 떼어놓는 두목이 참 예쁘다(때론 답답해하기도 하지만^^). 사실, 앞으로 쭉 스케치해볼 조르바의 에로스-자유 이야기는 청년 두목에게 전하는 세레나데에 다름 아니다. “나의 어여쁜 벗이여, 영혼과 육체의 자유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겠네. 그대의 삶이 보다 더 가볍고 경쾌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 라고 하는! 조르바의 세레나데가 두목을 거쳐 내게로 흘러왔다. 호기심 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잘 경청해보려고 한다. 인간이 자유가 되는 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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