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청년의 에로스
부끄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박 소 연(남산강학원)
모든 MZ 세대가 『간디 자서전』을 꼭 한번 읽었으면 좋겠다. 청년들이 간디란 사람에 대해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대뜸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디를 만나고서 내 삶에, 정확히는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간디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는 연령 관계없이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런데 청년과 간디의 만남은 그 울림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짭짤한 맛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십 대 초반에 간디를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다. 간디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편안함도 없을 거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왕좌왕, 우당탕탕 사는 건 똑같다. 고민 많고, 허술하고, 미흡한데 자존심은 또 무척 센 나를 보며 착잡한 것도 여전하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이 한바탕 바뀌었다. 이제는 나의 좌충우돌이, 착잡함이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나와의 소통이 조금 더 원활해졌고, 유쾌해졌다. 무거운 보따리 하나 내려놓은 기분이다. 딱 그만큼, 보따리 하나 사라진 만큼의 가벼움을 나누고자 한다. 이십 대에 청년 간디를 만나서 한 짐 덜고, 또 공부해 나가며 두 짐 덜다 보면 언젠가 다 내려놓게 되는 날도 오겠지.
“자기 절제를 믿는 사람은 심기증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오는 편지들을 보면, 많은 이들이 자기 절제에 실패한 일을 곱씹으며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선한 일과 마찬가지로, 자기 절제 또한 다함없는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낙심할 이유는 조금도 없으며, 실패에 사로잡혀 마음을 어둡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Self-restraint v. Self-indulgence』, M.K. Gandhi, Navajival Publishing House)
낙심하지 말라! 간디 삶의 시작과 끝을 꿰뚫는 외침이다. 흔히 듣는 말인데, 간디의 음성으로 들으니 코끝이 찡하다. 마음을 울리는 정도가 다르다. 간디가 삶의 곡절마다 이를 몸소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간디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달랐던 것이, 이 한 마음이었다. 낙심해 머물지 않는 마음. 평범한 소년이 인도 민중의 아버지가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막막함, 슬픔,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 간디가 전하는 크나큰 긍정의 메시지를 그의 삶을 따라가며 읽어보려 한다. 이야기는 13세 꼬마가 신랑이 되었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렬한 욕망과의 대면
간디가 어렸을 당시 인도에는 조혼 관습이 있었다. 이에 간디도 어린 나이에 동갑내기 신부와 결혼한다. 꼬마 신부의 이름은 카스투르바이 마칸지. 둘은 서로 앞집, 뒷집 사는 동네 친구였다. 둘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자신들의 아들, 딸을 서로 맺어주기로 다짐해 두었다. 그렇게 간디와 카스투르바이는 7세에 약혼을, 13세에 결혼을 하게 된다. 떠들썩한 결혼식이 그저 재밌기만 했던 애들은 “철도 없이 인생의 바다에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 형수가 첫날밤의 내 행동에 대해 꼼꼼하게 가르쳐 주었다. (…) 그러나 그런 문제는 사실 가르쳐 줄 것이 없다. 전생의 인상들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모든 가르침은 불필요했다.”(『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68쪽) 나이 불문,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게 하나 있다.
어렸을 때 ‘Why?’ 시리즈라는 학습 만화책이 대유행을 탔다. 수학, 과학, 생물, 역사, 사회 등의 주제를 세분화해서 하나하나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만화책인데, Why 책 없는 가정집이나 도서관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였다. 그런데 어딜 가든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보면 거의 다 빳빳한 새 책인데, 그중 한 권이 독보적으로 너덜너덜했다. 바로 <사춘기와 성> 편이었다. 애들이 주야장천 그편만 탐독한 거다. 나도 흥미롭게 읽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지만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끌린다. 따로 보고 들은 게 없더라도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다. 간디는 이걸 ‘전생의 강렬한 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욕은 우리 몸에 새겨진 윤회의 코드 일지도.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나고 죽기를 반복하다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태어남은 성의 산물이다. 테이프로 누덕누덕 기워진 <사춘기와 성>이 보여준다. 성욕이 얼마나 원초적인 욕망인지를.
호기심이 폭발하는 사춘기에 덥석 결혼했다. 에너지가 엄청난데, 어떻게 다룰 줄을 모르는 시기다. 이때는 이것저것 궁금해 하고 들춰보면서 나름의 윤리를 확립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끓어오르는 육체적 충동을 제어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윤리도, 절제도 모르는 아이에게 아내가 생겼다. 첫날밤은 간디의 욕망에 불을 붙였다. 간디는 그야말로 자나 깨나 아내 생각뿐이었다. 학교에 가도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와 다시 만날 밤을 상상하며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결혼한 해에는 연말 시험도 보지 못했다. 학교 공부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아내에게 열중했다.

열정은 집착과 동의어였다. 간디는 카스투르바이의 일상을 통제하려 했다. 사원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조차 간섭하려 들었다. 못된 친구의 말에 현혹된 탓이었다. 그는 “어린 간디에게 아내의 생활을 완전히 통제하고 아내가 하는 모든 일을 보고받아 그녀를 지배해야 한다고 충동질했다.”(『제자 간디, 스승으로 죽다』, 토머스 웨버, 35쪽) 간디는 정말로 생트집을 잡아가며 카스투르바이를 괴롭혔다. 아내의 정절을 의심했으며(!), 때때로 심하게 화를 냈고, 어쩔 땐 카스투르바이를 친정집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아니, 의심을 하려고 해도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그러나 간디의 말마따나 “질투심은 이유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 시절 간디는 질투와 간언에 눈 멀어 애꿎은 사람을 못살게 구는, 그러나 성적 욕망은 그대로여서 밤마다 아내를 찾는 못난 남편이었다. 훗날 간디는 이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아내를 그러한 궁지에다 몰아넣었던 죄를 나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 의심과 혐의로 캄캄했던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어리석음과 잔인한 치정이 혐오스러워 가슴이 꽉 막히고 내가 맹목적으로 친구를 믿었던 것을 통탄하게 된다”(『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85쪽)라고.
하지만 카스투르바이는 결코 호락호락한 여성이 아니었다. 둘은 동갑이지만, 개월 수로 따지자면 카스투르바이가 간디보다 5개월 누나다. 어릴 때는 몇 개월 차이도 매우 중요한 법이다.^^ 당차고, 단순하고, 독립적이었던 카스투르바이는 간디에게 이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는 간디의 요구를 완벽히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언제든지, 어디든지 제가 가고 싶기만 하면 가고야 말았다.”(위의 책, 69쪽) 둘은 이 문제 때문에 많이 토라지고 다퉜던 것 같다.
『간디 자서전』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이 놀랍다. “나를 붙들어 진리에게로 못 가게하고, 진리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저 나쁜 정욕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것을 떼어버릴 수 없다. 그러나 이만 그칠 수밖에 없고, 다음 장에서부터 사실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위의 책, 55쪽) 자서전 집필을 시작한 해는 1925년, 간디의 나이는 56세였다. 브라마차르야를 맹세해 실천해온 지도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정욕은 간디에게 어려운 문제였던 거다. 그래도 그렇지, 정욕에 대한 고백으로 자서전을 시작하다니. 진짜 간디답다. 내 이야기를 글로 쓸 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난 부분을 편집하게 된다. 사건을 다듬고 깎아서 최대한 멀끔하게 내보이려 한다. 글로 드러난 내 모습이 너무 적나라해서 낯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 사전에 편집이란 없다. 머리말부터 어쩐지 마음이 상쾌해진다. 과오든, 업적이든 대명천지에 다 드러내 놓는 사람의 삶, 너무 담대해 보였다.
진정한 용기
카스투르바이와의 우여곡절은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욕망의 불꽃이 하나도 사그라들지 않은 채로 3년이 지났다. 16세 간디는 이제 아버지가 될 참이었다. 그러나 일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이 사건은 평생토록 간디를 따라다닐 터였다. 이 시기 간디의 아버지는 치루 때문에 꼼짝도 못 하는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깊었던 간디는 아버지를 지극하게 간호했다. 상처를 돌보고, 약을 챙기고, 밤마다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간디는 기쁘게 그 일을 했다. 아버지를 간호하는 게 첫째로 중요한 일이었고, 임무가 끝난 뒤에야 학교에 가 있거나 산책을 다녀오거나 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성욕은 망동했다.
그 사이 카스투르바이는 아이를 가졌다. 그런데도 간디는 매일 밤 아내를 찾았다!
“밤마다 손은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기에 바쁜 동안에도 내 마음은 침실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그때는 종교적으로 보나 의학적으로 보나, 상식에 비추어보나 성교는 할 수 없는 때였다. 나는 항상 그 임무를 어서 마치고 나오고 싶었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곧장 침실로 갔었다.” (위의 책, 89쪽)
아버지는 점점 더 위독해지셨다. 어느 날 밤 간디가 여느 때처럼 아버지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있었는데, 삼촌이 오셨다. 그쯤 하고 건너가 쉬라는 삼촌의 말씀을 사양 않고, 간디는 침실로 가서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웠다. 5분이나 지났을까? 하인이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아버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본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더라도 부모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에게는 짙은 후회가 남는 법이다. 그런데 아내와 자고 싶은 마음에 위독한 아버지를 뒤로하고 나왔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중대한 순간에 육욕을 느꼈다는 이 수치감은 결코 지우거나 잊을 수 없는 오점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낳은 가엾은 어린 것은 태어난 지 사나흘 뒤에 숨을 거두었다.” (『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70쪽) ‘삼촌의 권유를 뿌리치고 조금만, 조금만 더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간디는 아마 수천수만 번 그때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그 되새김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내 외할머니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가까이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할머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던 내게도 이별의 아쉬움이 한가득 남아있는데 간디는 오죽했을까.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했던 아버지와 작별조차 할 수 없었다. 임종 소식을 듣고 아버지 방으로 달려가며 간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첫 아이까지 죽었다. 간디는 그 원인이 임신 중 성교일 것이라 생각했고, 큰 자책에 빠졌다. 부성보다는 순간의 욕망이 앞섰기에 이런 참사가 벌어졌다 해도, 한편으로 아버지가 될 생각에 몹시 설렜을 터였다. 무엇보다 카스투르바이가 정말 슬퍼했을 것이고, 그런 아내를 보는 건 쓰디쓴 일이었으리라. 간디가 ‘수치(羞恥)’라고 표현했듯 – 부끄러울 수, 부끄러울 치 – 두 번 강조해도 모자란 부끄러움이, 크나큰 슬픔이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내 쾌락욕에 대한 천벌이라도 되는 양 한 사건이 터져서, 그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늘 내 마음에 걸려 있다.”(『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67쪽) 16세부터 평생,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참 담담하다. 죄의식에 휩싸여 굴 파고 들어앉지 않는다. 너무 놀랍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고, 자책에 휩싸였고, 끝없이 비참했다. 그런데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는다. 잘못은 잘못이고, 슬픔은 슬픔이고,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다. 사실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슬픔도 느낀다. 거기서 끝이다. 머무르질 않는다. 되려 빛이 나게 산다.
어린 간디는 어둠을 무서워해 잘 때 작은 등불 하나를 꼭 켜고 잤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둠 속에서 귀신과 강도, 뱀의 환영을 봤다. 이 대목을 읽으며 피식했었다. ‘진짜 귀여운 겁쟁이였잖아!’ 하면서. 우리는 보통 어둠이나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울퉁불퉁 강력해 보이는 피지컬로 악당들을 무찌르는 사람을 두고 용감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부끄러움을 직시하는 것. 순간 과거의 잘못, 부끄러웠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하면 몸서리치는 나를 본다. 부끄러움을 정면 돌파하는 게 어둠보다, 귀신보다 더 싫고 무섭다. 아무리 겁 없고 육체적으로 강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자신 앞에서는 괴로워하며 무너지고 만다. 그런 면에서 간디는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직면하길 꺼리는 내면의 어둠을 간디는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 삶은 20대가 다르고, 30대가 달랐다.
수치심이 주는 이로움
그로부터 2년 뒤, 간디는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대학에 적응하지 못했던 탓이 컸다. 인도에서의 공부는 아무 재미가 없었다. 간디가 영국 유학의 뜻을 밝히자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다. 카스트 제도상 바다를 건너가는 것 자체가 종교적 금기였고, 영국에 가면 식습관도 생활도 타락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간디는 유학을 가고 싶었다. 이런 간디를 보면서 왠지 웃음이 났다. 나중에 남아프리카행을 결정하는 걸 보면서도 그랬는데, 뭔가 공감되는 게 있다. 앞이 잘 안 그려지는 막막함. 새로운 시공간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싶은 욕구. 약간은 정처 없고, 동시에 설레는 마음. 나도 딱 열여덟, 열아홉에 뉴질랜드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었다. 이런 건 청년의 공통감각인가 보다.
타고 나기를 수줍음 많게 태어났으며, 겁이 많던 그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만 하면 긴장해서 말을 잘 못했다. 그러나 수줍은 만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생각이 참 차분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줍어도 할 말 다 하고 할 일 다 했다.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고,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유학비도 소심하게나마 꾸러 다녔다. 빨리빨리 다니기 위해서 난생처음으로 낙타도 타봤다고 한다. 유학 생각에 그 많던 겁도 다 달아났던 듯싶다. 이 마음도 너무 잘 알겠어서 웃기다.
마구 공감을 하다가 여기서부터 ‘헉’했다. 뉴질랜드에 갈 생각을 했을 때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달려 나갔었다. 원래도 성격이 급한데다가, 뭐에 한 번 꽂히면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 한 마음만 가득 들어차 있어서 다른 게 안 보였다. 그런데 간디는 한 스텝, 한 스텝 겉 넘는 법이 없다. 영국에 가기 전 간디는 어머니와 자이나교 사제(집안의 고문 중 한 분이셨다) 앞에서 ‘술, 여자, 고기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한다.
간디의 집안은 힌두교 중에서도 비슈누파에 속했다. 꼬마 간디는 무서울 때면 유모가 가르쳐 준 ‘라마나마(비슈누 신의 화신)’를 암송했다. 청년 간디가 브라마차르야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다잡아주고, 온갖 투쟁 가운데에서 중년의 간디를 지탱해 준 것도 이 만트라였다. 간디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기도 하다. ‘라마나마’는 신의 이름이다. 간디에게 신은 진리다. 신은 개개인의 마음에 머무신다. 마음속에 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삶은 “티끌보다도 겸손할 수밖에 없다”. 신 앞에 부끄러운 행위를 했다면 다음 스텝은 어때야 할까. 좌절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한시라도 빠르게 비워낼 뿐. 청정한 마음으로 돌이킬 뿐. 그것이 신 앞에, 심정의 진리 앞에 선 자그마한 생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신과 가까운 삶, 이게 간디의 토양이었다.
또한 간디의 고향인 구자라트는 자이나교가 번성한 지역이었다. 자이나교의 핵심 교리는 ‘아힘사’, 불살생의 계율이다. 자이나교 수도승들은 채식은 물론이거니와, 미생물을 해칠까 염려하여 물을 꼭 한번 걸러 마신다. 앉을 때는 부드러운 털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낸 뒤에 앉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벌레가 없는지 땅을 자세히 살핀다. 마음속의 악을 뽑아낸다는 의미에서 머리칼을 손으로 잡아 뜯고, 무소유의 완전한 실천을 위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다(공의파–하늘을 입은 사람들–에 해당). 이들은 고행을 통해 몸에 새겨진 업을 덜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몸을 애지중지하지 않으며, 걷기와 단식, 채식이 예사인 분위기에도 간디는 익숙했다. 정기적으로 단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시절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환경이 이러했으니, 그 또한 진지했다. 일단 영국엘 가고 보자 해서, 들떠서 한 맹세가 아니었다. “누가 말하기를, 영국 간 젊은이들은 다 버렸다고 했다.”(위의 책, 101쪽) 어머니는 이런 풍문을 듣고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셨으나, 결국 아들을 믿기로 하셨다. 사제의 주관 아래 씩씩하고, 엄숙하게 맹세하는 아들이 못내 믿음직스러우셨으리라. 열여덟의 발걸음이 이렇게나 듬직하다니!
아내와 눈물의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간디는 영국행 배편에 몸을 실었다. 배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 영국에서 고기와 술 없이 살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다. 장기간 여행으로 친해진 영국인들은 같이 술 마시고 고기도 먹자며 간디를 꼬셨다. 배가 잠시 정박했을 땐 포주가 접근해왔다. 시작부터 유혹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와 자이나교 사제에게 했던 맹세를 깨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마하트마 간디』, 요게시 차다, 90쪽)
그렇게 무사히 영국에 도착했는데, 진짜 먹는 게 문제였다. 고기가 빠진 영국식 식사는 상당히 부실했다. 식성이 좋았던 간디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사람들은 더욱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간디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간디에겐 주린 배보다 어머니와의 맹세가 더 중요했다. 채식 식당을 찾기 전까지, 채식주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기 전까지 간디는 상당히 배고프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한 가지 어려움이 더 있었다. 영국에는 조혼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인도인 유학생들은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결혼한 사실을 숨겨야 했다. 하숙집 딸들과의 ‘불장난’을 편하게 할 수 있어 여러모로 좋은 거짓말이었다. 처음엔 간디도 따라서 총각 행세를 하고 다녔다. 어떤 식당에 갔을 적에 메뉴 이름이 모두 프랑스어로 쓰여 있어 쩔쩔매던 간디를 한 노부인이 도와주었다. 이 일을 인연으로 간디와 노부인은 친구가 되었는데, 그녀는 일요일마다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간디를 집으로 초대했다. 노부인의 소개로 간디는 젊은 여자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에게 끌림을 느끼게 된다. 간디는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관계를 이어갔다. 둘 사이가 가까워지자 노부인은 옳다구나, 둘의 약혼을 계획하는데, 그때 정신이 번쩍 든 간디는 구구절절한 편지를 써 사실을 털어놓는다. 노부인과 여자 친구의 반응. “당신의 솔직한 편지 잘 받았습니다. 우리는 둘 다 반가웠고, 실컷 웃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허위라 한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있는 대로 알려주어 매우 기뻤습니다.”(『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132쪽) 몇 번이고 썼다 지우길 반복한, 너무너무 자세하고 솔직하고 진지한 편지에 웃음이 터진 것이다. 노부인은 유쾌하게, 간디는 상쾌하게 해프닝이 끝났다. 그 뒤로 간디가 다시 총각 행세를 하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까? 노부인의 집에서 만난 젊은 여성은 수줍음 많은 성격의 간디가 편히 말을 터놓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사교를 가르쳐 주었다. 간디는 곧 일요일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간디처럼 진실을 고백하지 않는다. 아내와 아들은 인도에 있으니 거리낄 것이 무엇인가. 욕망 따라 살고 거짓으로 무마하려 든다. 하지만 간디는 달랐다. 간디는 그날을 절대 잊지 않았던 거다. 부끄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늘 자신을 살폈다. ‘나는 왜 인도에 아내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 친구를 대하고 있지?’ 자문한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 사실을 털어놓고, 사건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수치‘사(死)’ 대신 수치‘생(生)’
현대인, 특히 청년의 발목을 잡는 감정은 아마 수치심일 것이다. 어디 가서 실수하거나, 놀림거리가 되는 걸 견디지 못한다. 오죽하면 ‘수치사’란 말이 있을 정도다. 너무 수치스러워서 차라리 죽고만 싶다는 거다. 도대체 뭔 실수를 했길래 저러나 하겠지만 별거 없다. 말하다가 긴장해서 더듬거리거나, 길 걷다가 넘어지거나, 상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다른 행동을 하거나, 고백했다가 차이거나…. 한 마디로 내가 부족한 게 밖에 드러나는 모든 순간이, 내 뜻대로 안 되는 모든 게 다 ‘수치사’감이다.
말은 내 마음을 대변한다. 삶은 결국 말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수치사’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스갯소리로 자주 쓰이는 걸 보면 조금 무섭다. 혹시 사람들 마음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있지는 않을까, 부끄러움도 너끈히 견디어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빠져버리진 않을까 해서.
간디를 만나고서 긴장으로 팽팽했던 줄 하나가 탁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자서전을 읽으며 특히 사춘기 간디에 퍽 공감이 갔다. 1893년, 스물넷에 남아프리카로 갔을 때부터는 공감보단 감탄만 나왔다. 이십 대 초반,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압도적으로 멋졌다. 친구이자 스승, 최고의 사우(師友)를 만난 기분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비참한 상황에 놓인 인도인들을 만났을 때 간디는 이들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는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지만, 기차에서 쫓겨났을 때 간디도 고민이 됐다.
그의 앞엔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첫째, 내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이냐? 둘째, 인도로 돌아갈 것이냐? 셋째, 모욕은 생각 말고 그냥 프리토리아로 가서 사건을 끝낸 다음 인도로 갈 것이냐? 간디는 무엇보다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다. 일단 맡은 사건은 마무리해야 했다. 또한 이번 일을 결코 방관할 수도 없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라는 깊은 병’에 대해 알게 된 이상! (위의 책, 184쪽) 간디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먼저 철도 총지배인한테 전보를 쳐 사실을 알렸다. 그 뒤로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지만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끈기 있게 되찾는다. 마차에서 좌석을 사수하고, 1등칸 표를 사서 1등칸에 앉아가는 그런 것들부터.
만약 그때 인도로 돌아갔다면 지금의 간디는 없었을 거다. 남아프리카에서 여러 활동을 하면서 간디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여러 방면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긴장해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싶게 바뀌었다. 열심히 공부하며 무수히 많은 글을 썼고, 이곳저곳에서 연설했다.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차별을 타파해야겠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최대한 낮은 자세로, 부당함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러지 않으면 폭력의 표적이 되었기에. 그런데 이 청년이 순식간에 판을 뒤집었다. 새바람이 불었다. 생채기가 잔뜩 나 있는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져줄 시원한 바람이. 자연스레 간디를 돕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간디는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조직을 꾸리고, 청년들을 가르치고, 인도인들의 내적·외적 생활을 개선하려 애썼다. 집회를 열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켰다. “그 결과 프리토리아에서 내가 모르는 인도인은 없게 되었고, 그 사정을 내가 소상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없게 되었다.”(『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201쪽)

간디가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괴로움에, 첫 아이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주저앉았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절대 만날 수 없었을 세상이다. 이게 청년의 힘이다. 과오를 품에 그러안고, 다음 길을 모색하는 것. 부끄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삶을 더욱 알짜로 가꿔 나가는 것. 영국 유학을 갈 생각에 무서움도 극복하고 낙타에 올라타고, 남아프리카로 갈 생각에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도 감내하는 그런 에너지. 간디는 절대 잘못을 나로 삼지 않는다. 굳이 ‘나’를 찾자면, 브라마차르야(생각, 말, 행동의 일치)를 향한 노력이, 의무를 다하려 애쓰는 과정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수치심을 대하는 간디의 태도는 이렇듯 슬기롭다. 마지막으로 간디의 이 말을 꼭 소개하고 싶다. 긴 글을 압축해놓은 대목이다.
“내가 절대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상대적 진리를 굳게 잡을 수밖에 없다. 이 상대적 진리가 그때까지는 나의 등대요, 작은 방패요, 큰 방패다. 이 길이 비록 험하고 좁고 면도날같이 날카로울지라도 그것이 내게는 가장 가깝고도 쉬운 길이다. 나의 히말라야산맥 같은 실책조차도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은 내가 이 길을 엄격하게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 길은 나를 실패에 빠지지 않게 건져주었고, 나는 내 빛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53쪽)
‘히말라야산맥 같은 실책’이라니. 자신의 허물을 이렇게까지 표현하는 것도 놀라운데, 이것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하는 것도 놀랍다. 간디가 ‘상대적 진리’, ‘등대’, ‘방패’라고 표현한 건 어기기를 택하느니 죽는 게 낫다던 어머니 앞에서의 맹세일 것이다. 더 이전에는 16세 간디에게 큰 슬픔을 안겨줬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또 아내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소유욕으로, 질투로 표현되는 이상한 상태에 대한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등대가 되어 다음 걸음을 비춘다. ‘히말라야산맥’ 크기의 등대가 생긴 거다. 이런 사람에게 부끄러운 실수는 수치‘사’ 감이 아니다. 수치심이 나를 살게 하는, 수치‘생’ 하는 일일 것이다.
마음이 후련하다. 어렸을 때부터 내 발목을 계속 잡았던 건 자책하는 마음이었다. 네다섯 살에 있었던 일이 최근까지 마음에 남아 가끔 떠올랐을 정도로 이전의 것들을 비워내지 못했다. 그래서 간디가 성욕이 동해 아버지를 놓아두고 침실로 가는 걸 보고 나도 같이 ‘으악’ 했다. 저 사건을 어떻게 소화할까, 저 죄책감을 어떻게 할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눈 크게 뜨고 자서전을 읽기 시작했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정리가 좀 됐다. 자책은 참회가 아니라 핑계다. ‘험하고, 좁고,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길에 서기 싫은 거다. 말인즉슨 자기의 못난 모습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남들이 내 오류를 모른다고 해도 나는 안다. 내 마음속 진리에 비추어 부끄러운 일임을. 그리고 참회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빛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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