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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현민의 독국유학기] 진로고민 part.1

by 북드라망 2026. 3. 12.

진로고민
part.1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고등학교 삼학년 즈음 친구들에게 자신 있게 진로에 대해 말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난 대학 안 간다. 왜 필요한지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맥락과 배경 상황이 너무 달라져 웃음이 난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대학에 갈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이 괴기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게 싫었다. 지금은 대학이 수단처럼 느껴진다. 사실 언제나 수단이었을 것이다. 내가 매사에 너무 진지했던 탓이다. 살면서 겪어야 하는 모순들을 그냥 세상은 이렇구나, 사람들은 이상하구나 하고 웃어넘기지 못해서. 물론 지금도 잘 못 한다.

이번 글에서는 근 몇달간 골몰했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언어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긴 호흡의 글이 되어버려 글을 두개로 나누었다.
  

유아교육 아우스빌둥에 대한 고찰
나는 현재 독일에서 유아교육 아우스빌둥을 하고 있다. 아우스빌둥은 독일의 직업 교육 시스템이다. 내가 하고 있는 교육은 2년제고 졸업 시험에 합격하면 뮌헨시 공증 유아 보육사 자격증을 얻게 된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출판 도서계 아우스빌둥이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지내려면 언제나 명분이 있어야 비자를 받을 수 있기에, 그 모든 실패 후 나는 무엇이라도 시작해야 했다. 그게 유아교육 아우스빌둥이었다. 어디나 그렇듯이 양육/돌봄 분야에는 인력난이 심해, 나는 비교적 쉽게 이 세계에 편입되었다.

언제나 의미 있는 일이라면 돈을 적게 받아도, 사회적 인정이 덜 한 곳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우스빌둥을 시작한 후에는 현타가 세게 왔다.
첫째로는 언어라는 한계를 제외하고서 배우는 내용이 쉬웠다. 많은 시험을 보아야 했고, 독일의 학교 시스템이 낯설었고, 새로운 사람들과 적응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그러면서 언어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내용의 수준만 보았을 때 나에게 의미 있는 혹은 내 성장 단계에 맞는 챌린지는 아니었다.

둘째로는 어린이집에서 죽을 때 까지 일하고 싶지 않았다.
독일 사회에 편입된 후 첫 사회생활을 아이들과 했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 아이들을 만날 때에는 완벽하지 못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덜 불안해할 수 있었고, 자주 즐거웠다. 하지만 어린이집 교사의 과제는 대단히 의미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하기보다 돌봄과 규칙을 따르는 것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다는 걸, 3살에서 6살 사이의 어린이집 아이들과의 활동을 준비할 때 마다 줄곶 나의 실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덧붙여 어린이집이라는 작업 환경이 내게는 잘 맞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고 싶을때 방해요소가 너무 많았고, 동료 교사들은 언제나 정신이 없었다.

셋째로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이다. 내가 학교에서 본 사람들 중 대게는 순수 독일인보다는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학교에서 독일인들은 공부해서 의사 변호사 되고 싶어하지 돌봄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한다.) 그들 대다수의 부모는 발칸 혹은 중동에서 독일로 이민왔으며 그들은 주로 이민 2세대이다.
그들의 배경이 어떻던 간에, 의도치 않게 매일 얼굴을 보고 반나절을 부대끼며 나는 생각했다. 나라면 저렇게 안 할텐데... 정확히는 진짜 왜 저러지? 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들과 있을 때는 차라리 혼자 있고 싶었다.

 

정치 시간에 민주주의에 대해서 배울 때 이걸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시간 아깝다며 불평하거나, 귀머거리나 병신, 게이라는 차별적 언어를 갖다 쓰며 낄낄댈 때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졌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책임감, 내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곳에 대한 궁금증,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언어와 존중 받는 분위기. 나는 이런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종종 그리웠고 그건 이곳에서 채워지지 못했다.

애초에 이 아우스빌둥은 비자 때문에 시작한 게 컸다. 물론 장점도 있었다. 유학원에서 언어만 배우던 내게 학생이라는 신분이 생겼고, 전문적인 직업장에서 견습생으로서 경험을 만들 수 있었다. 아우스빌둥을 시작하기 전에는 독일이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외국인으로서, 가족과 친구라는 안전망 없이 실패를 했을 때 금방 낭떠러지로 떨어질까봐 조마조마했다. 이 자격증은 내게 그런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모든 계획이 틀어졌을 때, 내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플랜 B.

 

첫 실습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했던 프로젝트.

지나가다가 우리를 보면 밝게 인사해달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이들과 함께 문구를 고민하고, 색칠하고, 붙였다.           



서점 주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좋은 기억
고등학교 졸업한 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서 우주소년이라는 독립서점을 운영하면서 책이라는 매체에 특별한 유대감이 생겼다. 책은 다른 미디어처럼 거창하지 않았다. 책은 읽는 이에게 고요하게 읽는 시간과 생각할 공간을 선사하고 나는 그걸 아주 사랑했다. 종종 사람들은 디지털 업계가 발전하면서 종이 책이 사라질거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지만, 종이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영화, 드라마, 광고, 소셜 미디어, 뉴스가 아니라 오직 책에 담겨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쉽게 잊혀지는 가치들, 그틈에서 돈으로 환산될 만한 가치가 없어 조명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 여성, 청소년과 어린이, 노인, 장애인, 퀴어, 정신적으로 힘든시간을 보내는 사람, 가난한 사람, 비인간 동물, 자연 등. 나는 그것이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 같았고 서점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뭍으로 내놓고 싶었다. 그러다 종종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연결되는 시간들을 관찰하게 될 때에는 이 직업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고, 책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온라인 대형 서점이 할인과 굿즈와 무료배송을 퍼다줘야 고객들이 책을 사는 마당에 오프라인 독립 서점의 한계는 분명했다. 파는 행위에 대한 환멸도 있었다. 내가 서점을 운영하면서 내밀었던 가치가 무엇이건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그들이 내게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야만 했고 그래야 서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책이라는 물건도 한 권 팔면 남는 이득이 너무 적어서 공공 기관이나 학교에 대량 납품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근데 이 공공 기관 납품이라는 시스템은 대통령이 한번 바뀔 때마다 휘청휘청했다.

사실 내가 추구했던 가치에 알맞은 공간은 서점이 아니라 도서관이었을 수 있다. 그후 내가 사랑하는 동천동의 느티나무 도서관을 떠올리며, 사서라는 직업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독일에도 사서 아우스빌둥이 있었다. 하지만 첫 아우스빌둥에 대한 실망감 이후엔 신중해지고 싶었다. 남자친구의 가족 중 한분이 사서인데 그분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프로니는 기꺼이 나를 만나러 와주었다. 프로니는 어릴 적 호텔 경영 아우스빌둥을 마친 후 전문 대학 입학 시험을 봤다. 그 후 문헌 정보학을 전공했고, 역사학 박사를 마쳤다. 그녀는 뮌헨 공대 도서관에서 전문 학술사서로 일하고 있다.

 

삼주 간 인턴십을 했던 뮌헨 근교 공공 도서관.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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