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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현민의 독국유학기] 실패하는 이야기

by 북드라망 2025. 10. 23.

실패하는 이야기

 

글_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가을이다. 낙엽이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간다. 이번 여름에는 많은 실패를 했다. 살면서 이렇게나 많이 실패해본 적이 있던가? 처음 타지에서 이민자로 살기를 결심했을 땐 당연히도 많은 실패와 고난을 예상했다. 이 정도로 주저앉으면 안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실패하는 일은 늘 낯선 감각을 가져다준다. 떠나온 사람에게 ‘다시 돌아가기’라는 결론은 별로 달갑지 못하다. 이번 여름 나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할까 봐 불안했다.

독일에 도착해 1년간 어학연수를 한 후, 나는 책과 관련된 아우스빌둥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아우스빌둥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교육’인데, 학교와 회사에서 번갈아가며 실무와 이론교육을 받는 직업교육 제도이다. 아우스빌둥으로 할 수 있는 직업으로는 목수, 사무관리, 판매원부터 간호사, 선생님, 사서까지 굉장히 다양하고 넓은 분야가 존재한다.

독일에서 아우스빌둥을 지원할 때에는 직업을 구할 때처럼 이력서, 커버레터는 필수고 그 외 고등학교 졸업장과 자격증, 인턴십 수료증 등을 추가로 제출할 수 있다. 이제 막 독일어로 음식 주문이나 겨우 했던 나는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커버레터의 기초를 썼고 지원하는 회사와 직책에 맞게 매번 수정해 제출했다. 그렇게 한동안 몇 번의 인터뷰도 다녀오고 했지만, 결론은 실패였다. 수많은 거절 메일을 받았고, 그조차 오지 않는 곳들도 많았다. 인터뷰를 다녀온 곳에서도 모두 거절 받았다. 이렇게 계속 시도하다 보면 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출판사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다.

 

 

친애하는 김현민님,

저희 출판사 인턴십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서 산업에 대한 귀하의 열정은 분명히 드러나지만,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드릴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턴들은 타이틀 제작 과정, 특히 교정과 편집을 포함한 편집과정에 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원어민 수준의 독일어는 필수적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작은 출판사이기 때문에 언론 및 판매 분야에 대한 인턴을 고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에게는 출판계로 향한 입문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언론 및 판매에 대한 인턴십, 또는 라이센스, 외국인 권리 부서에 초점을 맞춘 인턴십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책 만드는 이로 향하는 당신의 여정에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이 메일을 받고, 나는 비-모국어 사용자로서 독일 출판계에서 일하고자 하는 한계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막막했던 찰나에 이런 메일을 받을 수 있어서 후련했다.

그 후, 나는 다리를 부러트렸다. 이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독일은 보통 9월에 새학기가 시작하는데, 일년 전에 모든 지원과정이 끝난다. 내가 가지고 있던 어학비자는 올해 11월에 종료되기 때문에 독일에 남아있으려면 무엇이든지 이번 년 9월학기에 시작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뼈가 붙어서 금방 나으려면 가만히 있는게 답인데,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자니 피가 말릴 지경이었다.


현실과 타협하기
독일에 인력이 언제나 부족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어느 사회나 그렇겠지만, 독일도 돌봄/서비스 인력이 늘 부족하다. 자국민으로 필요인력을 다 메꿀 수 없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특히 이 분야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간호사, 요양사, 유치원 교사 등 이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을 때, 서점에서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던 시절, 아이들로부터 삶의 생기를 많이 얻었던 기억이 났다.

선생님 아우스빌둥은 보통 3년제 학교 베이스 프로그램이다. 인터넷에서 서칭 중 본격 3년제 아우스빌둥을 시작하기 전, 미리 경험을 쌓으며 2주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2주는 어린이집에서 실습을 하는 1년제 SEJ(Soziales Einführungs Jahr)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1년 동안 이 프로그램을 하며 실무와 전문 지식을 배울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2달간은 서류 준비에만 매달렸다. 한국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장과 성적표 원본을 받고, 공증받은 번역사로부터 번역 받았다. 아이들을 만나는 직업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개인 건강검진 증명도 받아야 했고, 시민청에 가서 범죄경력증명서도 받았다.

이 교육과정에 참여하려면 직접 자기가 일할 어린이집 그러니까, 실습 장소를 찾아 계약해야 한다. 별안간 뮌헨 전역의 어린이집을 돌아다니며 인터뷰와 반나절 정도의 실습을 했다. 결국 한 바이링구얼(Bilingual, 이중언어의) 인터네셔널 어린이집과 계약서를 썼다. 뿌듯한 마음으로 마지막 서류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한국에서 졸업한 학교에 대한 학위인정을 받아야 한다. 독일은 서류절차가 굉장히 느리기로 유명한데, 역시나 최소 3개월이 걸리는 절차라고 했다. 나는 이미 다른 서류들을 제출 후, 이 성적표 인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은 4학년까지 초등학교를 다니고 5학년부터는 졸업까지 하나의 학교를 간다. 이 학교를 굳이 한국 시스템에 비유하자면, 대학중심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 전문계 고등학교인 레알슐레(Realschule), 직업 중심 학교 하웁프트슐레(Hauptschule)로 나뉘어져 있다. 졸업 후 어느 고등학교를 가는지에는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의 선생님이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12년제 인문계 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가지 않았어도, 적어도 레알슐레 이상의 학위인정을 받을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가장 낮은 학교인 하웁트슐레 졸업장을 받게 되었고, 레알슐레 이상의 졸업장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입학 전제조건에 맞지 못해 입학이 무산되었다. 현실과 타협하려고 했는데 타협하고자 했던 현실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 세상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 크게 배우는 시간이었다.


최선을 찾기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8월 한 달은 내내 여름방학이라 학교에서는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이 말은 내가 아무리 학교에 전화나 메일을 보내 도움 요청을 구해도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다시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프라우 베스트가 생각났다. 프라우 베스트의 성은 베스트(Best)다. 나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준 나의 플렛메이트 T는 그것은 그녀가 정말 베스트이기 때문이라고 늘 덧붙여 말했다. 그녀는 노동청의 청소년 진로상담 파트에서 근무한다. 이전에 찾아갔을 때 나는 그녀로부터 진심으로 도움 받는 기분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난번 그녀는 나에게 어렵다(difficult, schwierig)는 말을 쓰지 않기로 약속해주겠냐고 물었다.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할 때 종종 도움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이 더 어려운 상황임에도 어렵다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내게 사회봉사연도(Freiwilliges Soziales Jahr)라는 1년 동안 자원봉사자로 사회 복지 시설에서 일하는 제도를 소개 시켜 주었다. 독일에서는 이 봉사증이 직업 채용에도 도움이 될 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시스템이라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엇을 할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종종 하는 경우가 있다. 적은 돈을 받으면서도 풀타임으로 일해야 하지만, 워킹비자보다는 훨씬 쉽게 1년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이전에 계약을 했던 어린이집에 개학을 하는 9월 1일 첫날 아침 일찍 찾아갔다. 다행히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같은 어린이집에서 1년간 사회봉사년도를 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 독일에 더 남아있을 합법적인 구실이 생겼다.

나의 남자친구 니키는 내 상황에 대해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얻은 아이디어를 말해주었다. 내가 하려고 했던 교육자(Educater, Erzieher) 아우스빌둥은 레알슐레 졸업장이 필요하지만, 어린이 보육자(Childrencareer, Kinderpfleger) 아우스빌둥은 내가 받은 하웁트슐레 졸업장으로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아우스빌둥은 2년제인데, 졸업시험을 보면 뮌헨시에서 인정받는 어린이 보육자 자격증을 딸 수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입학 지원을 보통 1년 전에 끝내는데, 새 학기가 시작하는 이 시점에 내가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학교에 구구절절 길고 긴 사연이 담긴 메일을 보내고 하루에 몇 번씩 전화해 얻어낸 답은 너를 웨이팅 리스트에 넣어주겠지만, 일주일 내에 학교로부터 추가합격 전화를 받지 못하면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나는 어린이집에서 일하면서도 전화가 울리면 뛰쳐나갈 수 있게 긴장하고 있었지만 결국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니키가 더 시도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됐다고, 이미 독일에 머무를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겠다고 했다. 이미 계획한 모든 것이 틀어져서 뭐가 더 나은 건지, 내가 뭘 원하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니키는 그리스에서 친구들과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는데 매일같이 전화로 내 상황에 대해 함께 논의해주었다. 어느 날 일하다가 잠시 점심시간에 니키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알고보니 그 애가 내가 포기한 이후로도 그리스에서 맨날 학교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맨날맨날 전화하니까 된다고 했다고? 내가 물으니까 니키가 예스하고 답했다. 이럴거면 왜 처음부터 된다고 안했나 싶지만 독일 사람들 일처리가 또 이렇다. 나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앞길이 캄캄한 현실이었지만 여름에 한 도서관에서 인턴십을 했다! 독일에서는 인턴십이 한국보다 흔한데, 인턴십 후 이런 평가증 혹은 인턴십 확인서를 받으면 꼭 잘 저장해 놔야 한다. 이런 경험이 있고 없고가 나중에 정말 중요하다. 내게 모든 일을 다 가르쳐준 사수 사라가 나에 대한 아주 좋은 말을 많이 써줬다. 이 인턴십평가서를 주면서 너한테 모두 다 1을 주고 싶었지만, 나중에 이걸 보는 사람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까봐 두 항목에는 2를 체크했다고 말해줬다. (1이 제일 높은 평가) 도서관 사서 인턴십 정말 재밌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가
나에게는 한국에 가는 일이 어렵다. 한국에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내가 독일에서 뭘 이뤘는지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도 당연히 있다. 사실 나는 한국사회가 지겹다. 문제도 뻔하고 문제를 해결할 답도 뻔한데 문제를 반복한다. 문제를 반복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럼 나는 미치는 기분이 든다. 독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왜 하필 독일에 왔어? 라고 물으면 그냥 나는 한국이 지겨워서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 안 갈 수는 없다.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보고 싶다. 살면서 이미 오천 번은 먹어봤을 한국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고, 매일 모험하듯이 산책하던 동네도 그립다.

가끔 클럽에서 가장 신나는 음악을 큰 스피커로 들으며 음악에 압도되어있을 때 나는 가끔 미친년처럼 소리를 지른다. 아무도 못 듣는다는 게 너무 확실하니까 소리를 박박 지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아, 나는 아직 여기 더 있어야 돼, 라는 생각이 든다. 낯섦이 주는 자유를 더 누리고 싶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다. 어느 날씨 좋은 날은 다 받아들일 수 있겠다가도, 어느 날 날씨가 안 좋으면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이걸 계속 할 것이다. 하나의 일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지 않다. 하루하루 날들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사는 삶을 살고 싶다. 일도 재미있게 하고 싶다. 지금의 시간이 그 발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실패를 마주했을 때는 감당이 안되서 눈물만 주륵주륵 났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알맞은 도움을 받았다. 이제는 훌훌 넘기고 이 실패들을 소재로 농담이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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