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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온 편지

[마산에서 온 편지] 그 마을의 이야기들

by 북드라망 2026. 2. 2.
'마산에서 온 편지'를 시작합니다.
2월부터 한 달에 한 번 독자 여러분께 드릴 이 편지는 마산에 사는 '강가에나무' 님이 주시는 글입니다.
마산 토박이인 '강가에나무' 님이 마산의 여러 이야기들을 여러 방편으로 들려주실 예정입니다.
'강가에나무' 님과 북드라망의 인연은 북드라망이 생기기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순전히 블로그에 실린 저의 글을 통해 소통하기 시작한 친구는 마치 인터넷 없던 시절 먼 곳에 사는 펜팔 친구처럼 한동안 진짜(!) 편지와 소포를 통해서만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편지에 담긴 '강가에나무' 님의 선한 마음과 담백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연민(달라이라마께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씨앗인)이 저에게도 때로는 큰 힘이 때로는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이 마음을, 마산의 이야기를, 독자 님들과 이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마산의 이야기에, 그 안에 담긴 연민의 씨앗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 마을의 이야기들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잦아들면, 볕을 쬐러 대문 앞에 나와 앉은 노인들의 나지막한 수군거림이 한낮의 정적을 드문드문 깨우곤 했다. 매일 같이 보는 얼굴, 새로울 것 없는 일상, 누군가 지나다가 인사라도 하게 되면, 그이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주고받는 것이 노인들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언제부턴가 주말이면 이 고요한 마을에 낯선 이들이 찾아와 북적이는 날들이 많아졌다. 난생처음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에 숨이 찼던지 사람들은 잠시 서서 숨을 고르기도 했고, 마을 안내문을 읽어 내려가거나, 집집이 그려진 형형색색의 그림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곤 했다.

가고파 꼬부랑 벽화마을, 여섯 해 전까지 내가 마흔 해 동안 살았던 옛집 바로 위에 그 마을이 있다. 원래는 한 동네나 다름없었지만 우리 집 앞뒤로 이면도로가 생기면서 윗동네가 되었다. 서른이 넘어 두 해 동안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마을이 온통 그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우리 집 담벼락에도 덤으로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었는데 샛노란 꽃이 주는 환한 느낌이 싫지는 않았으나 그리 달갑지만도 않았다. 마을 조성을 기획하고 그림을 그린 이들에게는 나름의 의도가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단순한 캔버스가 아니었다.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에겐 저마다의 삶이 있었다. 하지만 집들에 그려진 색과 선, 형상들에 그런 사연들을 담겼을 리 만무했고,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흔히 달동네라 불리는 곳에 살다 보니 그린 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사연 가진 이들이 하나둘 그리로 찾아들어서였을까. 돌이켜보면 함께 이웃하며 살았던 이들의 삶은 하나같이 애처롭고 처연했다.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니 또래 친구들도 한동네에 제법 많았다. 우리 집 조금 아래에서 왼편으로 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큰 집이 나오는데 거기엔 민희가 살고 있었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민희는 재혼한 어머니와 같이 살 수가 없어, 남편을 잃고 큰댁에 더부살이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던 큰이모에게 맡겨졌다. 마침 큰이모에겐 동갑내기 딸도 있어, 민희가 겪어야 했던 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을 지나 꼬부랑 벽화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가면 홀로 손자를 키우시던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종종 빈 편지지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오시곤 했는데 할머니가 무언가 읊조리시면 아버지는 정갈한 글씨로 그 말을 받아 적으셨다. 할머니가 교도소에 있는 아들에게서 온 답장을 들고 오시는 날이면 아버지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셨고,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할머니가 세 들어 사시던 집은 딸부잣집이었는데 훤칠한 키에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엄마를 닮아 딸들도 모두 키가 크고 예뻤다. 얼마 뒤 아주머니의 가출 소식을 들으신 우리 할머니는 당신 일처럼 근심하셨으나, 한참 뒤 아주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얼굴엔 부러움과 기대, 그리움이 가득했다. 

거기서 다시 한참을 더 올라가면 외할머니, 펜싱선수 이모와 함께 살았던 미진이네 집이 있었다. 미진이네까지 가려면 집들이 별로 없는 외진 산길을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하루는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산꼭대기 미진이네에 놀러 갔다가, 온종일 나를 찾아다니신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내려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막내 고모를 잃었다 되찾은 적이 있으신 할머니는 그때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셨단다. 그날 혼쭐이 난 이후로 나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서게 되면 행선지를 꼬박꼬박 밝히고 귀가 사실을 아뢰는 공손한 어린이가 되었다. 


벽화마을 입구 오른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지금은 베어 없어진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 왼편으로는 비쩍 마른 체구에 키가 작고 주근깨가 많았던 민준이가 여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댁에 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미정이가 살았는데, 그 동네 내 또래 중 몇 안 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친구였다. 고등학생이던 무렵 그런 미정이에게 약간의 허언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스럽기도 했으나, 그에게도 감추거나 부풀리고 싶은 부족함이 있었구나 싶으니 괜스레 측은해졌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동그란 얼굴에 유난히도 피부가 뽀얗던 영준이가 살고 있었다. 영준이네 어머니는 제법 규모가 컸던 우리 성당에서 미화원으로 일하셨다. 나는 언제나 환한 얼굴로 조용하고 묵묵하게 성당을 청소하시던 어머니를 뵐 때마다, 나도 커서 어머니처럼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 자체가 기도요, 그 모습이 성인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영준이는 그 사실이 싫었던지 학년이 올라가면서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영준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직 서른다섯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한동안 틈만 나면 하염없이 성전에 앉아계셨다. 

영준이네 집 반대편으로 난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엄마와 떨어져 이모네에 얹혀살던 춤추고 노래하기 좋아하던 은지네 집이 있었다. 그때 유행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모조리 섭렵했으니 친구들에게는 인기가 좋았으나 조카를 맡아 키우는 이모에게는 근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모에게도 두 명의 어린 딸이 있었으니 혹여나 저걸 보고 배우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도 있으셨을 게다. 그 마음을 알았던 나는 가끔 은지네 집에 놀러라도 가게 되면, 이모님 앞에서 은지의 학부모가 된 것 마냥 어쩔 줄 몰라 하며 송구해 했다.

 



그 좁고 가파른 길 집들마다 이렇듯 사연들이 숨어 있었다. 남몰래 울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설움과 감옥에 갇힌 아들을 둔 어머니의 기도가, 방황하며 엄마와 함께 살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어린 딸의 소망이 서려 있었다. 산도 아니고 언덕도 아닌 이 작은 마을은 그렇게 가슴에 구멍 하나씩 가진 사람들을 말없이 품어주었다. 온갖 어린 것들을 업어 키우신 그 옛날 할머니의 굽은 등처럼. 그래서인지 한두 번 가본 것이 고작, 지척에 그 마을을 두고도 나는 함부로 오를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또다시 그곳에 터를 잡고 고단했던 하루를 위로받으며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를 내일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겠기에 그 귀한 삶의 자리를 한때의 구경거리, 내 사진의 배경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마을을 구경하며 집들을 배경 삼아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면, 나는 사진하는 사람 임종진을 생각했다. 그는 ‘함부로 찍지 않는 사진’에 대해 강의하며 대상에 대한 깊은 존중의 마음 가질 것을 권한다. 사람을 대상화시키지 않기 위해 천천히, 깊게, 느리게 다가간다는 그는 대상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계와 구분이 사라지고 나서야 셔터를 누른다고 했다. 피사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사진에 담는 것이다.

휴대전화에 장착된 카메라 성능이 좋아지면서 사진을 찍는 일은 쉽고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관광지로 조성된 곳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이며, 그들의 마음을 내가 다 어찌 알겠냐마는 그래도 내 서운함은 어쩔 수가 없다. 다만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누군가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함부로 카메라를 꺼내 들거나 셔터를 누르지는 말아야겠다. 먼저 마음을 공손히 하고 천천히, 깊게, 느리게 다가가 오랫동안 바라보아야겠다. 

 

* 그 아래 마을의 골목길을, 조심스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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