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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 유학기] 불교의 옵티미즘 : 은퇴 불가한 중생의 미래를 긍정하는

by 북드라망 2025. 12. 17.

불교의 옵티미즘 : 은퇴 불가한 중생의 미래를 긍정하는

이 윤 하(남산 강학원)

 


네팔 시위와 마이트레야
지난달 8일, 네팔에서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나는 그 소식을 뉴스가 아니라 다음 날 같은 반 학생인 슬로베니아인 W스님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스님은 그때 마침 두어 명의 친구가 유럽에서 네팔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돕고 계신 와중이셨고, 한 친구 분은 이미 네팔로 이동하신 상황이어서 아주 염려스럽게 상황을 전달하셨다. 나는 정부군의 총격에 시위하던 학생들이 사망했고, 공항이 폐쇄되었지만 총리는 사임하고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항쟁의 참상이 곧바로 연상되며 몹시 걱정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네팔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가자지구와 러시아-우크라이나로 이어졌고, 티베트와 중국(당시 우리는 존자님의 망명 전후 생애를 다룬 전기『Voice of Voiceless』를 읽고 있었다), 대만과 홍콩 등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역시 휴전상태인 분단국이고, 미얀마와 수단도 끝나지 않는 내전을 겪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카슈미르 지역에 힌두교도 테러가 있어 인도와 파키스탄 간 갈등이 큰 전쟁으로 이어질 뻔하기도 했고, 이제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할수록 나는 촘촘히 연결된 이 세계의 폭력에 공포와 절망을 느꼈다. 그때 W스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관점을 하나 제시해주셨다. 개별의 인간은 죽겠지만 인류는 아직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몇 겁 이후 미륵(Maitreya) 부처님이 오실 것이 예언되어있기 때문이다. 2천 5백 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세계의 네 번째 부처님이시고, 다섯 번째 부처님이신 마이트레야가 세계에 오실 때 인간 역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트레야 부처님이 세계의 종말 신호인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 뒤에도 세계가 있으며 부처가 온다. 영겁의 시간을 다루는 불교의 세계관은 사람을 아득하게 만든다.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을 다르게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3차 세계 대전! 종말! 파국! 이라는 다분히 현실적인 미래 전망에, ‘아직 다음 부처님은 오지 않았어’라는 감미로운 대답이 아주 놀랍달까. 이것이 진짜냐 아니냐를 논하기 전에 나의 마음이 제법 평온해진 것은 사실이다. 왜였을까?

그 전에, 이런 식으로 미래로 시선을 쭈욱 늘려버리는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미래형 인간이 아니다. 미래라는 것을 생각하면 비관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그렇지만 ‘종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뿐 아니라 과거, 미래와 연결을 유지한다. ‘현대인’인 나는 역사와도 단절되어있고, 미래의 전망으로부터도 고개를 돌린다. 그래서 남게 되는 것은 지금 여기의 나. 그렇지만 그것이 오히려 비관주의자가 되는 길인 것 같다.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시간대의 존재들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꼭 불교, 힌두교, 기독교와 같은 제도 종교를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사고는 무교라도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라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이번에는 다람살라에 지내면서, ‘미래’라는 참으로 인간적인 시간대(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생들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에 대한 불교의 ‘긍정’적 세계관을 마주친 순간들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낙관과 비관을 넘어선 ‘긍정’.

 

달에 한 번 작은 그룹으로 진행되는 『Voice of Voiceless』 읽기 수업. 

티벳어로 읽는 게 너무 어렵고 오래 걸려서 나는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영어 → 한국어로 읽는다.

 


짧고도 긴 인생
하루는 티벳어로 각자 짧은 시를 세 편씩 써서 선생님께 보여드리는 날이었다. 내가 써간 첫 번째 시는 이런 시였다.

ཚེ་ཡུན་ཐུང་ (체윈퉁 – 생이 짧다는)
གསུང་ཐོས་ཀྱང་ (쑹퇴꺙 – 말씀 들었지만)
ངའི་མི་ཚེ་ (예미체 – 내 생은)
རིང་དྲགས་མྱོང་ (링닥뇽 – 너무 길게 느껴지네)

 (이 시는 블랙코미디의 느낌으로 지은 시다. ‘생이 짧다’는 것은 티벳불교의 입문에서 아주 많이 듣는 핵심 가르침으로, 평생 살 것처럼 생각하면서 수행을 미루거나,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지 말라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이 시는 그런 이야기를 매일 듣지만, 실제로는 내 생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라는 내용이다.)

 

티벳어 어학 수업을 맡아주신 A스님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분이시다. 해서, 특히 시를 봐주실 때는 문법에 안 맞는 부분뿐 아니라, 맛이 안 나는 부분도 고쳐주시기 위해 작문의 의도를 물어보실 때가 있다. 그날 스님은 내 시를 보고 이게 무슨 말이냐고 굉장히 의아해하셨다. 왜 생이 ‘너무’ 길다는 거야? 길다는 것이 무슨 말이지? 올해 몇 살이야? 어설픈 나의 티베트어 설명을 스님이 이해하지 못하시자 뒤에서 보고 있던 대만 언니가 나의 의견을 대변해주었다. 얘는 어리니까(나는 우리 반에서 유일한 이십대다), 아직 살날이 많아서 길게 느껴질 수 있어요. (맞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그럼에도 스님은 의아해하셨다. 이건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아. 이건 인생을 다 살고 죽음만 기다리는 노인이 하는 말이야.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 길다고 느끼는 노인과 앞으로의 남은 삶이 너무 길다고 느끼는 젊은이는 하나의 데칼코마니 같다. 삶에 지친 노인과 앞으로 책임져야 할 미래가 벌써 무거워서 지친 나! 그 당시 나는 인간 몸으로 태어나는 것의 희유함과 보살심에 대해서 배우고 있었고, 그 앎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어쩌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는 걸까? 나에겐 인간의 삶을 기꺼이 살아갈 배짱이 부족했다(부족하다)! 차라리 나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그렇지만 아쉽게도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식물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식(識)이 나무의 태를 입을 일은 없다). 어찌되었든 나는 이런 감정이 스님께 잘 이해될 수 없다는 것에 놀랐다. 나에게 그리고 한국과 대만 사람들에게는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감정이 대번에 이해되지 않는 세계관이 있구나! 스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오래 살고 싶어. 인생이 짧다고 생각해. 너는 인생에 기대하는 것이 많은 거야?

이후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있었다. A스님이 어느 수업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이 부분은 진도를 천천히 나갈게요. 윤회계에서는 빨리빨리 해봤자,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먼저 달려가도 나중에는 다시 뒤에 있어요(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시며). 일본 사람들은 빨리빨리 하고 싶어 하죠(일본 친구를 쳐다보시며). 나는 느긋하게 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빨리빨리 해봤자 다시 뒤에 오니까요. 천천히 가다보면 나를 앞지르던 사람들이 다 뒤로 가게 되어있죠. 중요한 건 빨리 가는 게 아니라 즐기며 가는 거예요.

앞자리에 앉아있던 일본 친구와 러시아 친구는 약간의 반대를 표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어요. 이 생은 짧고, 생이 끝나기 전에 깨달음을 얻어야 하잖아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스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다음 생이 기대되는데요.

 

A스님과의 수업시간. 중국령으로 표기된 티벳이 아닌 '티벳 지도'를 가리키시며 고향과 어린시절 지내셨던 사원의 위치, 인도로 오신 망명 길을 알려주고 계신다.


어째서 나는 지금 사는 생도 길어 죽겠(?)는데, 스님은 다음 생까지 기대하고 계신 걸까? 나는 그날 불교를 공부하는 외국학생들과 불교문화 속에서 자란 비근대인 스님의 차이를 느꼈다. 아니면 중생과 스님의 차이였던 걸까? 다음 생까지도 기대해버려! 그것이야말로 불교의 힘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회계의 반복되는 고통을 알지만, 그것마저 괜찮은 걸! 생부터 사(死)까지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은, 결국 낙관과 비관을 할 만한 상(相)을 내려놓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A스님은 나에게, 인생에 기대하는 게 많니? 라고 물으셨던 것이다.

따져보면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날지 나방으로 태어날지 소로 태어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도 얼마나 곤란하고 힘든 상황에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SF소설들이 전망하듯 생물이 살아가기 참담하고 어려운 지구에 태어날 수도 있고,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계에 태어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스님이 기대하신다고 하는 건 그런 조건에 달려있지 않다. 스님은 우리에게 10년 뒤가 있을지, 심지어 내일이 있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다음 생은 백퍼센트 있는 거라며, 10년 뒤보다는 다음 생을 계획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농담을 던지셨다(웃고 계셨지만 사실 진담이셨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음 생이 있다, 그렇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와 긍정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누가 그런 불확실한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은퇴는 없다
  그럼에도 다음 생은, 다시 또 산다는 것은 왜 기대할만한 것이 되는가? 물론 불교는 생사조차도 하나의 상이며, 둘은 불이의 관계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중생에게는 여기에서 한 차례의 긍정이 더 필요하다. 바로 우리 모두는 미래에 부처가 ‘된다’는 긍정이다. 놀라운 일이다. 당신이 중생이라면 나중에 부처가 확실히 된다(지금 이미 부처라는 것과는 다르다). 해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모든 생이 부처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이트레야 부처가 아주 먼 미래에 온다면, 그때의 인간들도 불법을 들을 것이다. 그 부처님이 실제로 오시든 오시지 않든, 중생은 늘 깨닫고자 할 것이고, 그 자체로 미래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 된다. 전쟁도 종말도 죽음도 막을 수 없는 마음의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하고 자유롭고자 하는 중생들의 가장 원초적인 발원이다.

스스로 깨닫고자 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 인간의 지성을 세계가 만들어냈다는 것은 참 경이로운 일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든데, 나를 포함해 인류가 스스로 자기를 멸망시키는 대신 더 잘 해내기를 바라게 된다. 더 많은 이들이 자기가 부처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되기를. 그렇게 되면 우리는 조금 더 기쁘게,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듬으며 갈 수 있다. 세계에 만연한 폭력과 불안정한 전망은 현실이다. 그러나 자유를 발원하는 중생의 마음 역시 현실이다.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면, 그 발원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이 짧은 생에서 해야 할 일이다. 지난달 다람살라에서는 달라이라마 존자님께 올리는 두 번의 장수기도회가 있었다. 큰 라마들께서 의식을 집행하시고, 사원의 스님들께서 함께 기도를 올리시면 대중들은 뒤에 앉아 의식을 참관한다. 존자님께서도 직접 자리하시고 의식이 끝나면 짧게 말씀도 해주신다. 존자님께서는 요즘 130세까지(이전에는 113세라고 하셨는데) 사실 거라고 말씀하신다. 수행자들이 자신의 수명이나 죽음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130이라는 숫자는(113 역시 마찬가지지만) 존자님의 삶을 지탱하는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학교의 불교철학 선생님이신 C스님께서는 ‘존자님께는 은퇴가 없다’고 하셨다. 그 말인즉슨, 흔히 상상하듯 (실제로 은퇴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일하는 시간이 끝나고 은퇴 후 나를 위한 편안한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의미였다. 90세가 되신 존자님은 여전히 법문을 하시고, 수계를 주시고, 수많은 사람을 친견해주시며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으시고, 법과의 연을 맺어주신다. 늘 하시는 말씀처럼 존자님께서는 지금까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130세까지 사신다고 하시는 데에는, 오직 티벳인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위한 마음뿐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방편도 알고 계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스스로 그 노년의 생을 ‘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우리 중생들도 죽을 때까지는 이 생에서 은퇴하지 못한다. 해탈할 때까지는 윤회계에서 은퇴하지 못하고 말이다. 결국 어떻게 해도 부처-되기에서 은퇴하지 못한다는 것! 이왕 시작한 거 A스님의 말씀처럼 즐기며 가보자.

 

 

지난 달 장수기도회에 참여하신 달라이라마 존자님과 기도 의식을 하고 계신 린포체님 (사진 출처 : tib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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